창 1:28/세상 속으로 세상 밖으로
작년 11월 30일 의회의사당에서 연합감리교 UMC 소속 로버트 호시바타 감독과 기독교 사회정의활동가인 짐 월리스 등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이 중 12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하원을 통과한 공화당의 세제개혁안에 대해 상원의원들에게 반대표를 던질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들은 공화당의 세제개혁안이 중산층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부자들에게 막대한 감세를 해 주고 서민들의 복지혜택을 줄이는 개악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세제안이 통과되면 연 백만불 이상의 소득가정은 2027년까지 58억불의 세금감면혜택을 받지만 연 4-5만불 수준의 소득가정은 53억불의 세금을 더 내야 합니다. 학자금융자의 비과세 철폐로 저소득층 자녀들의 부담은 더 늘어나고 2025년까지 1,300만 명이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미국교회협의회는 성명을 내고 ‘이 법안이 통과되면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하게 되고 부자들을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된다. 또 연방정부는 부자들에게 감면해준 세금 때문에 1조 5천억에 달하는 부채를 지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독교인들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과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는 분들은 이런 예가 불편하게 들리실 겁니다. 그렇다면 오바마 정부 시절 연방대법원이 내린 동성결혼 합헌결정에 반대하며 동성결혼식에 축하 케이크 제작을 거부했다가 소송을 당하고 유죄판결을 받은 잭 필립스와 그를 지지한 기독교인 시위를 떠올려보십시오. 공화당의 세제개혁안을 반대하든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합헌결정을 반대하든 영적인 사명에 부름받은 성직자와 기독교인들이 이런 세상 문제, 정치나 경제, 환경, 빈부격차, 전쟁 등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찬성 혹은 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냐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에 대해 교회가 마땅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입장과 교회는 세상 일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 항상 대립해 왔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마땅한 것일까요?
오늘 설교는 지난 주 설교의 속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법이 실천되는 곳에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의 정신은 정의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정의와 사랑의 정신이 담긴 법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고쳐나가야 한다고 했는데요, 그럼 고쳐나가야 하는 영역이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가 뒤따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으로 그 법의 실천을 개개인의 영적 삶이나 가정, 교회까지만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 영역을 넘어 사회, 국가 그리고 이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적용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 침묵을 함으로써 은연 중에 그렇게 가르쳐온 것입니다. 혹은 그런 목소리를 내는 교회를 향해 교회는 세상 문제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비판하고 자신들의 태도를 옹호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 답을 얻기 위해 먼저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역사의 교훈을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창조의 하나님의 의도가 잘 드러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인간의 사명은 땅 즉 온 세상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충만하라는 말씀은 세상의 구석구석 다스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인간의 사명은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창조정신인 정의와 사랑의 다스림 아래 놓이도록 하나님을 대리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넘어 온 세상 땅 끝까지 이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마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려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을 모두 제자로 삼아야 하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지, 세상 밖으로 도망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세상을 정의와 사랑의 정신으로 고쳐나가는 기독교인의 사명은 결코 개인경건의 영역이나 가정, 교회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국가와 이 시대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육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을 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반문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과 육은 교회 안의 것과 밖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대표적인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과 육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과 그것을 거스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정치는 대단히 영적이지만 하나님을 거스르는 교회사역은 대단히 육적인 것이 됩니다.
다음으로 역사의 교훈은 어떠할까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종교적 지도자라기보다 사회운동가라는 인상을 더 깊이 심어줍니다. 숱한 예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예만 보겠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입니다.
(암 5:7)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
(암 5: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폭정을 비판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헤롯왕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당시의 지배계층의 위선과 탐욕을 비판하다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본 훼퍼는 목사가 왜 히틀러 암살과 같은 정치적인 일에 개입하느냐고 비판을 받자 답하기를, 미친 사람이 차를 몰아 사람들을 치어 죽이고 있다면 그 사람이 차에서 스스로 내려주기를 기도해야겠습니까, 아니면 그를 당장 차에서 끌어내려야겠습니까 하고 답하였습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 제국교회는 히틀러의 통치를 찬양하거나 침묵하는 대가로 많은 혜택을 누렸습니다. 소수의 고백교회 신도들만이 히틀러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다고 비판하다가 본 훼퍼와 같이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날 역사는 그들 중 누가 진짜 하나님의 편에 섰는지를 밝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실패 후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일제식민지배에 침묵하거나 협조함으로써 그들의 안위를 보장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사가들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한국교회의 전통의 이 때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전통 하에서 군부독재시기에도 주류 한국교회는 정부의 폭압을 침묵하거나 심지어 찬양하는 대가로 많은 혜택을 누렸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받는 멸시와 조롱은 한두 가지 사건으로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채 오랫동안 자신들의 안위를 더욱 구하며 불의한 세력에 협조해온 역사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21세기의 C.S.루이스라 불리며 이 시대에 가장 예리한 기독교 지성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뉴욕 리디머 처치의 원로목사인 팀 켈러는 작년 12월 19일 The New Yorker지에 실린 그의 칼럼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도널드 트럼프와 로이 무어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앨라바마주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에 나선 로이 무어는 30년 전 검사 시절 최소 4명 이상의 10대 여성들을 유혹하거나 추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만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답한 유권자의 80% 가까이가 그를 지지했습니다. 물론 그는 낙선했지만 이 선거캠패인과 투표결과를 본 미국인들은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고쳐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이 용어는 이제 위선자들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1970년대에 이 용어를 나 자신을 지칭하며 사용할 때, 이것은 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만약 지금 내가 이 호칭을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근본주의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근본주의자는 흔히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만을 주장하며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비난과 독선으로 일관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불명예스러운 용어였고 복음주의는 이런 이들과의 차별을 꾀하며 건강한 사고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이제는 그 복음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조차도 근본주의자와 다를 것이 없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미국사회의 인식이라고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성 중 한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도덕성과 역사성에 대한 건강한 판단을 잃으면 이렇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대학에 가서 교회를 다닌다는 말을 하면 ‘워우~’ 이런 반응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 반응에는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하고 구시대적인 모임에 나간단 말이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반응할까요? 그것이 ‘신과 창조를 믿고 도덕 타령하는 것’에 대한 조롱일까요? 설문조사를 보면 의외로 미국인들은 교회에는 나가기 싫어하지만 신과 영성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교회 안 다니는 아이들은 전부 마약하고 죄를 짓는 패륜아들일까요? 그들의 조롱은 그보다 팀 켈러의 지적처럼 ‘도덕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도덕이고 뭐고 없는 위선자들’에 대한 조롱은 혹시 아닐까요?
온 세상, 땅 끝까지 나아가 모든 민족을 제자삼도록 부름받아 세상을 고쳐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끊임없는 성경에 대한 연구와 고민, 그리고 경건한 삶의 실천에 더하여 이 시대를 고쳐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시민에 불과한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세상을 고쳐나갑니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고쳐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요즘 미국에 이어 한국에서도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여검사가 상사로부터 장례식 자리에서 오랫동안 성추행을 당했는데도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녀 편을 드는 이들도 없었다는 것입 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검사들은 자신들도 그 상사처럼 적당한 상황이 되면 성추행을 할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분위기를 어쩔 수 없으니 괜히 나섰다가 그녀처럼 불이익을 받을 것이 틀림없기에 침묵하기를 선택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그리스도인 검사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일까요? 정부고위관리와 국회의원들 중 압도적으로 높은 개신교인들의 비율을 볼 때 검찰계도 그와 유사하지 않을까요? 사법고시에 붙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젊은이와 그 어머니의 소원대로 응답된 것을 혹시 그들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불의를 보고 그냥 넘어가지 말라고, 너를 검사로 세우신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는 모르드개의 음성을 듣는 검사는 왜 없었던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불의에 한 예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불의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이 불의라는 것조차 모른 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목사는 늘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저는 이것이 목사 뿐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권면이라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꿀 능력과 임무를 세상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정의와 사랑의 법으로 세상을 치유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김도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