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2:9-19/어떻게 구원을 받는가5- 마음
180325 종려주일
생명의 근원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주님을 환영한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 지난 월요일부터 부활주일까지의 일주일은 고난주간입니다. 이 한 주간을 우리 교회는 고난주간특별새벽기도회와 성금요기도회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교우 여러분도 함께 하시기를 권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두 종류의 무리를 만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온 큰 무리의 군중입니다. 둘째는 그 와중에도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엿보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 무리입니다. 이 두 무리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4주간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라는 주제로 설교를 해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과 예수님의 공로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회개와 믿음을 요구받습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믿음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일까요? 그 곳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와 죽이려는 무리를 가르는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생명의 길도 죽음의 길도 이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 마음의 중요성은 성경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입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이야말로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이며 의와 심판의 갈림길입니다. 그럼 어떤 마음은 구원에 이르고 어떤 마음은 멸망에 이를까요? 먼저 멸망에 이르는 마음을 살펴봅시다.
완고한 마음
멸망에 이르는 마음에 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가르침입니다.
(렘 18:12) 그러나 그들(유다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頑惡)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 (렘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않으리라.’
완악한 마음, 이것이 멸망에 이르는 마음입니다. 완악한 마음은 두 가지가 결합한 마음상태입니다. 첫째 완고한 즉 고집센 마음입니다. 둘째 악한 마음입니다. 고집 센 마음이란 진리를 믿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만을 고집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 백성들은 그들이 고침을 받을까봐 즉 자신들이 믿는 바와 원하는 바와 생활방식을 바꾸어야할까봐 진리를 듣기를 거부하는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왕이고 주인인 상태를 바꾸어야 할까봐 주님 앞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를 완악하다고 예수님은 꾸짖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도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현재 상태에 문제를 제기하는 말씀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고집센, 완고한 마음이요, 완악함의 첫째 요소입니다.
악함 마음
완악한 마음을 이루고 있는 둘째 마음은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보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의보다 이가 더 중요하기에 이를 위해 의를 희생시키는 일을 감히 합니다. 이것이 곧 악한 일이 됩니다. 본문 9절 이하입니다.
(요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요 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 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으로 큰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 믿기를 원하여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그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고 기적의 증거인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를 합니다. 왜 입니까? 나사로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종교적 권력을 빼앗기거나 혹 소요사태가 일어나 로마군을 상대로 독립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자신들의 누리던 기득권 질서가 무너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의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이익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바로 악한 것입니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보다 자신의 이익과 고집을 더 따른다면 그는 멸망의 백성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한국땅에서 장로인 전직 대통령이 구속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참담한 마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불과 1년 전 탄핵받은 대통령조차도 몰려든 지지자들로 구속하는 날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대통령은 거의 지지자들의 항의시위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언론을 통해 드러난 범죄의혹이 너무나 치졸하고 탐욕스러운 것들 뿐이어서 지지자는 물론이요, 측근들까지 대부분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는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우리가 받을 경고는 우리가 의를 구하는 백성인지, 이를 구하는 백성인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고집과 악함이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으로 고침받고 사라지는 은혜를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영접하는 마음
다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본 이들과 그들의 증언을 들은 이들이 몰려들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하여 영접합니다. 12절 이하입니다.
(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과 구주로 영접하는 마음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럼 어떤 마음이라야 예수님을 온전히 왕과 구주로 영접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14절 이하입니다.
겸손한 마음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요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왕으로 오시는 분이라면 마땅히 크고 화려한 말을 타고 오셔야지 작고 약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 분의 겸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가장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심지어 십자가에까지 내려가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을 왕과 구주로 영접하기 위해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2장이 이렇게 가르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분의 마음을 닮는 자들만이 그 분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겸손한 마음의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믿었는데 우리 마음에 참된 안식이 없습니까? 그것은 그 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 분이 가시는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세요, 저는 여기 앉아 있을랍니다. 멍에를 메고 같은 길을 가지 않으면 그 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고 그 분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길과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듣고 결실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에 관한 성경의 예를 들어보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고넬료가 어떤 마음인지를 행 10장이 보여줍니다.
(행 10:33) 내(고넬로)가 곧 당신(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설교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야말로 참 겸손의 유무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스스로 겸손하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재단하는 이들은 겸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눅 8:15) (말씀의 씨가)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겸손한 마음은 좋은 밭과 같아서 말씀의 씨가 떨어질 때 그것을 잘 받고 싹을 틔워 결실하기까지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좋은 밭과 더불어 길가밭, 돌짝밭 그리고 가시밭을 함께 예를 드셨습니다. 그 밭들도 다 말씀의 씨가 떨어졌지만 결실하지 못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교회 안에 모여서 함께 말씀의 씨를 받는 마음들 중에서도 결실하는 마음이 있고 결실하지 못 하는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결실하는 마음만이 구원을 받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만이 결실하는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만이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입니다. 완고하고 악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결실하여 구원에 이르는 천국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