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0:15-21/떨칠 수 없는 추격자
180708 주일설교 요셉12
쉬지 않는 추격자
지난 2004년 한국의 전북 익산 경찰서에 초췌한 모습의 40대 남자가 자수하러 와서 21년 전 자신의 큰 형을 죽인 죄를 고백했습니다. 당시 교도소에서 출소한 큰 형이 매일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집과 재산마저 마음대로 처분하려고 하자 격분한 나머지 둘째형과 공모하여 큰 형을 흉기로 살해하고 집 뒤 텃밭에 암매장하였습니다. 큰 형이 안 보이자 가족들은 그가 가출한 것으로 생각했고 둘째 형과 그는 이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 채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큰 형만 사라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 형제의 삶은 기대와 달리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친형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던 둘째 형은 11년 만에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그 역시 큰 형이 살아돌아오는 악몽을 꾸고 환청을 듣는 등 정신분열증세를 겪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 하다가 10년 전 가출하여 막노동판을 전전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 하고 스스로 경찰서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21년 동안의 삶이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차리라 심판을 받는 것이 낫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왜 이 두 형제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채 평안히 살아갈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을 뒤쫓는, 결코 쉬지 않고 뿌리칠 수 없는 끈질긴 추격자 때문입니다. 그 추격자는 죄값을 치르기를 요구하는 죄책감입니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인간의 삶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너나할것없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인간은 그 죄의 값을 치를 것을 요구하는 추격자,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영혼의 민감성의 차이 때문에 비슷한 죄를 짓고도 죄책감을 느끼는 정도는 다 다르지만 무의식 속에서 늘 우리 뒤를 쫓아오는 이 추격자를 뿌리친 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죄책감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추격자를 의식하지 못 한다는 것이지, 그들이 쫓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추격자 때문에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추격자로부터 벗어나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앞서 예로 든 21년이나 지옥같은 시간을 보낸 남자보다 더 오랜 시간 22년 동안 쫓겨다니며 산 이 형제들에게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요셉을 죽이려다 팔아버렸던 형들,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떨칠 수 없는 죄책감
이들이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힘겹게 쫓겨다니며 살았는지를 보십시오. 창세기 42장을 보면, 그들이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으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정탐꾼으로 몰리자 뜬금없이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죄를 떠올립니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 42: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먼저 그들이 겪고 있는 이 일과 동생에게 저지른 죄와의 아무런 상관관계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 일이 동생에게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그들에게 추궁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무려 22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그 일을 떠올립니다. 두 달 전도 아니고 2년 전도 아니고 22년 전인데도 그들은 마치 어제 한 일을 이야기하듯 그 일을 꺼내어 듭니다. 이 말은 그들이 22년 동안 이 죄책감의 추격에 쫓겨다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돈을 값지 않으면 항상 채무자이고 죄값을 치르지 않으면 항상 범죄자이듯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해 값지불을 하지 않으면 그 죄책은 항상 우리를 쫓아다닙니다. 그 쫓겨다니는 초조함과 압박감에 우리는 짓눌려 살아갑니다. 그 느낌을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죄책감이 우리에게 항상 지르는 소리는 이것입니다.
(롬 6:23) 죄의 삯(대가)은 사망이요…
너는 죄값으로 죽어야 마땅한 존재인데 멀쩡하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두고 봐라. 너는 반드시 죄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망할 것이다,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평소에 우리는 이 소리를 무시하거나 착한 일을 해서 상쇄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합니다만 그렇게 해서 떨쳐버릴 수 있는 추격자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우리는 압니다. 불운한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 안에서 그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거 봐라, 네가 잘 될 줄 알았느냐? 잘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죄값을 치르는 중이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죄책감의 추격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15절 이하를 보면 이 죄책감이 얼마나 끈질기게 오래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나이많아 죽자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의 죄값을 이제 요셉이 요구하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창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창 50: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창 50: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죄책을 벗어버리지 못 한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 지를 이 대목은 잘 보여줍니다. 요셉이 그들을 이미 다 용서하였다고 선언했음에도 그들 스스로 이 죄책감을 벗어버리지 못 합니다. 그들은 왜 요셉의 용서를 못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그들 스스로가 누군가를 이렇게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인간은 인간을 용서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요셉 역시 자신들을 진정으로 용서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못 믿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믿음의 부족’ 그래서 요셉은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요셉의 반응을 보십시오.
(창 50:17) …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왜 울었을까요? 형들이 지금까지도 그 죄책감을 안고 살며 두려움에 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너무나 가슴이 아팠던 것입니다. 요셉은 진정으로 형들을 이미 오래 전에 용서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용서가 가능했던 것일까요?
(창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그런 용서를 가능하게 한 비밀이 여기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즉 죄책감을 이제 벗어버려도 된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하는 존재가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형들을 미워하고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이지요. 왜입니까?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형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히려 구원의 도구로 쓰셨고 그 말은 하나님이 형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결정하셨음을 요셉은 알게 되었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형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말입니다. 형들을 용서한 것은 요셉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요셉이 고백한 것입니다. 형들이 심판의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있는 길은 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간곡히 형들에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호소합니다.
(창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형들이 죄책감으로부터 참으로 벗어나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요셉이 하는 이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시는 분
요셉의 형들이 겪는 일을 우리도 똑같이 겪습니다. 우리도 죄책감을 벗어버리지 못 한 채 살아갑니다. 이 세상이 죄책감을 벗어버리도록 하기 위해 쓰는 모든 일들은 다 허사입니다. 수시로 우리 죄가 생각나고 일이 잘 못 될 때마다 우리 죄 때문에 대가를 치르는 것 같아서 참된 평화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안식은 어디에서 옵니까?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형들이 요셉을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꾼 것처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항상 우리는 악하고 어리석은 죄를 짓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요, 안식의 길이요, 자유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호소한 것처럼 예수님은 주님의 이 은혜와 능력을 믿으라고 명하십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형들의 근심과 두려움처럼 우리 마음에 가득한 근심과 두려움은 오직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악을 선으로 바꾸실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를 그 아들에게 담당시키실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실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 끈질기고 포기하지 않는 무서운 추격자를 떨처버릴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 추격자를 떨쳐버리고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형들에게 요셉이 말하듯 우리에게 예수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을 믿음으로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던 추격자를 떨쳐버리시고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