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15 영문을 모를 인생 / 창 43:15-25

20180715 영문을 모를 인생 / 창 43:15-25

창 43:15-25/영문을 모를 인생

180715 주일설교 요셉13
불안의 이유
현대인에게 우울증과 더불어 빠르게 늘고 있는 신경증이 불안장애입니다. 널리 알려진 공황장애라는 증상도 불안장애의 한 종류인데요. 대략 인구의 13-14%가 불안장애를 겪고 평생 1회 이상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은 인구의 30%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불안해할까요? 
프랑스의 작가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그의 책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의 여러 가지 원인을 소개하는데 그 중 하나가 불확실성입니다. 전통사회에서 신분과 삶의 수준은 대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있고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의 귀족이나 동양의 양반 모두 어지간히 중죄를 짓거나 망나니짓을 하지않고서는 여간해서 신분과 부를 잃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서민이나 천민들도 비록 삶이 고단하긴 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신분과삶의 처지 때문에 불안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신분의 굴레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삶의 수준도 상당부분 스스로가 획득해야 합니다. 노력여하에 따라 더 높은 생활수준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 말은 동시에 자칫잘못하면 더 낮은 생활수준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불안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소개하는데 첫째, 변덕스러운 재능입니다. 큰 히트곡을 냈지만 더 이상 히트곡을 내지 못 하고 잊혀지는 것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가수들이나 아이템을 하나 성공했지만 계속 해서 그런 성공적인 비지니스를 하지 못 해 불안한 비지니스맨들이 그 예일 것입니다. 둘째는 운입니다. 도대체 왜 남들이 안 걸리는 병이 내게 걸리고 남들은 성공한 아이템이 내가 시작하니까 사양길에 접어드는지 예측할 수 없는 운을 말합니다. 셋째는 고용주, 넷째는 고용주의 이익, 마지막은 세계경제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내 마음대로 안 되며 운은 예측할 수 없고 고용주와 세계경제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안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님, 일이 잘 되어 가는데도 왠지 불안해 잠을 못 잡니다.’ 이런 상담을 드물지않게 합니다. 불안을 느끼는 우리에게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시는 걸까요? 
 
불안한 인생
창세기 43장 중반부를 읽었습니다. 이 대목은 이집트에서 사온 양식이 다 떨어져 불가피하게 다시 양식을 사러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내려온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총리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예물을 마련하고 양식값도 갑절로 준비하여 베냐민과 함께 이집트의 총리 앞에 서는데 요셉이 그들을 자신이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먹도록 합니다. 최고권력자에게 식사초대를 받았고 분명 이것은 호의의 표시인데 그들은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불안해합니다.
(창 43: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그래서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가 소개됩니다. 
(창 43: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창 43: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창 43: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알지 못 하겠다! 분명히 우리가 양식값으로 지불한 돈이 왜 도로 자루 안에 있지? 누가 넣었지? 모르겠다!’ 도무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무지, 불확실성이 지금 이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똑같이 겪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미래를 모릅니다. 사업이 잘 될지 안 될지, 병에 걸릴지 안 걸릴지, 자동차 사고가 나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을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무런 사고를 겪지는 않을지, 뉴스에 나오는 불행한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현재의 이유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안 걸리는 병에 나는 왜 걸리는지, 다른 사람 비지니스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힘든건지, 다른 자녀들은 공부도 잘 하고 착한 것 같은데 왜 내 자녀는 이렇게 힘이 드는건지 모릅니다. 원인을 알면 속이라도 시원하고 무슨 대처라도 해보겠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현상 너머의 차원들
자, 그럼 이 형제들은 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여러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차원은 청지기의 차원입니다. 그는 요셉의 명으로 형제들 몰래 돈을 다시 자루에 집어넣은 사람이므로 돈이 어떻게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갔는지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그도 모릅니다. 둘째 차원은 요셉의 차원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반응을 보려고 돈을 도로 집어넣도록 명령하였으니 왜 돈이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가야 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이상은 모릅니다. 마지막 차원은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자루 안에 들어간 이유와 과정 뿐 아니라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 이 일을 통해 어떤 놀라운 일을 또 하실 것인지까지 모두 아십니다. 이 형제들이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야 하는데 청지기나 요셉의 차원에서벌어지는 일도 모르는 그들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빙산의 90%는 물 속에 잠겨있어 보이지 않듯이 실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대부분을 우리는 알 수 없고 극히 일부의 표면 밖에는 못 본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가 직장을 잃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상사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그의 자리에 사장의 친척이 낙하산으로 내려와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와 아무 상관없이 회사가 어려워져 부서마다 한 명씩 감원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에는 중국에서 수입하던 원자재 값이 올랐을 수 있습니다. 혹은 뉴저지의 세금제도가 바뀌면서 회사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주력 판매처인 중미의 정치상황이 불안해져 판로가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래처가 부도나면서 회사가 받을 돈을 못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세계경제가 신자유주의에서 보호무역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의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자원남용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생산비용의 증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 뒤에도 수백, 수천가지 변수가 작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인간이 어떻게 다 쫓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가 아는 것은 실재와 거리가 멉니다.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설명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동시에 교만한 지를 떠벌리는 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전 10:14)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주관자의 위로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무지와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을 극복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모든 변수들을 오묘하게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듣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 이해할 수 없고 무슨 수를 써도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우리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 불안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하나님은 이 형제들에게 청지기의 입을 통해 그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 43:23) 그(청지기)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하나님이 돈을 너희 자루에 넣었다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망하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구원하시려고 일하시는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은 확실한 위로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안심하라, 두려워말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강대한 적 미디안을 물리치라는 감당하기 힘든 사명을 받은 기드온에게 나타나셨을 때입니다. 
(삿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약속이 성취될 지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창 15:1) …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버림받아 절망하고 있는 여인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 21:17) …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삶에 대한 무지와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이 안심하라,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고 다스리고 계시하고 합력하여 마침내 선을 이루시고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 분께 들을 때에 우리는 참으로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창과 방패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성인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열네 살이 된 소년은 마을에서 성인식을 마치면 성인이 된 증거로 창과 방패를 들고 혼자 초원 한가운데로 가서 밤을 지새우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밤새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사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홀로 지새는 것은 보통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해가 지면 홀로 초원으로 향하는 소년에게 아버지가 손을 잡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지만 그 말이 도무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당장이라도마을로 도망치고 싶지만 그러면 평생 겁쟁이로 놀림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사자밥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며 밤새 두려움과 싸우던 소년은 해가 뜨자 아버지가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긴 창과 방패를 든 아버지가 두 눈을 부릎 뜨고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시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어떤 칡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주님은 여러분을 지키시는 창과 방패인 줄 믿으시고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용사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