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5:1-13/멀고 험한 화해의 길2
180826 주일설교 요셉15
회개 없이 용서가 되는가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인 첫 남북회담 직후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남한사람들이 북한정권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 후 교우들이 악수하며 나가실 때 한 분이 제게 이렇게 물어오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님, 김정은은 회개하지 않았잖아요?’ 네, 맞습니다. 김정은이 진실한 회개를 한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용서를 하기 쉬울텐데 그런 날이 과연 올지 의문입니다.
6월에는 ‘멀고 험한 화해의 길’이란 제목의 설교에서도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이 참된 뉘우침과 회개이고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이 마음의 응어리를 녹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해자가 참된 회개를 한다면 피해자의 마음의 응어리를 녹이는 것도 더 쉬울텐데 현실에서 그런 일은 가뭄에 콩나듯이 찾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뉘우치지 않는 가해자로 인해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렇게 상대가 뉘우치지 않으면 우리는 응어리를 풀 수도 없고 그러므로 용서도 하지 못 하는 것일까요?
용서를 가능하는 하는 힘
공동체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이를 처벌할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이 복음서에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사회적 용서는 회개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반면 개인적 용서는 회개하지 않는 원수에게도 가능합니다. 개인적 용서와 사회적 용서가 다르게 적용된다는 말인데요, 이에 대해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 용서에 초점을 맞추자면, 예수님은 가해자의 회개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원수를 용서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실제로 당신도 십자가에서 회개하지 않고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로마군병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고 그 가르침에 순종한 스데반도 자신을 돌로 치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원수의 악행마저도 사용하셔서 선한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요셉과 형들이 극적인 화해에 이르는 오늘 본문 5, 7, 8절에는 하나님이 주어로 4회나 등장합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앞서 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큰 구원으로 요셉의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요셉을 먼저 보내신 분입니다. 다시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분입니다. 또 하나님은 요셉을 바로의 아비 즉 애굽의 총리로 삼으신 분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모든 악행 뒤에서 선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이는 원수의 악행 뒤에 보이지않는 하나님의 선함을 보는 것, 이것은 믿음이요, 이 믿음 때문에 요셉은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가 있어야 용서되는가
이 믿음은 가해자의 회개 여부와 상관이 없습니다. 요셉이 언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는 것을 확인한 후일까요? 이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 바로 앞문맥이 44장에서 형들은 베냐민을 버리고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형들의 대표로 이 상황에서 자신을 희생시켜 베냐민을 살리고 아버지를 두 번 다시 아들을 잃는 슬픔 속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나섬으로써 자신들의 과거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다는 것과 더 이상 그런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참된 회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돌이킴을 확인한 후에 요셉이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참된 화해를 시도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형들의 뉘우침은 형들에게 사회적 용서를 베풀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들이 뉘우치고 있지 않다면 그들을 애굽으로 초청하여 함께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면 형들의 회개를 확인하기 전에는 요셉이 개인적으로 형들을 용서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 반대로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증거는 요셉이 형들을 보자마자 목을 잘라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에게 양식을 주어서 보내려 하고 받은 양식값마저 곡식자루에 넣어서 보낸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면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물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의 꿈을 형들을 통해 이런 식으로 이루어주시리라는 것을 형들이 와서 절하는 그 순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깨닫을 후에야 형들을 용서한 것이 아닐까요?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여전히 형들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형들이 와서 절하기 전까지 요셉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렇게 결말을 맺으리라는 것을 깨닫지는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이 형들을 용서하게 한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 증거는 요셉이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태도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뿌리쳤고 억울하게 노예로 끌려온 상황,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삶을 방탕과 절망에 내팽개치지 않고 신실하게 감당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관리나 바로 앞에서도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풀어주시리라는 믿음을 일관되게 고백합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푸실지는 모르나 그것을 풀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고, 형들이 와서 절하는 순간 하나님이 푸신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형들이 와서 절하는 순간까지 정답은 몰랐지만 이 고난의 문제를 하나님이 풀고 계신다는 것을 요셉은 이전부터 믿고 있었고 그 믿음 때문에 형들에 대한 미움을 이미 버렸던 것입니다.
문제를 풀고 계시는 하나님
이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고난의 문제를 푸실지 미리 다 알려주신다면 못 믿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답을 미리 알려주시지 않고 당신이 문제를 풀고 계신다는 사실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을 신뢰하라고 명령하시지요. 그러므로 참믿음이란 답을 모른 채 문제를 푸시는 하나님을 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가나안이라고 미리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 하나님. 어딘지는 알려주셔야 가지요. 거기가 이 갈대아 우르보다 더 살기 좋은지 아닌지는 알아야 갈 지 말 지를 결정할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달리 갈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어떻게 떠날 수 있었나요?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요셉의 믿음은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아, 제 고난도 요셉처럼 선하게 사용하신다면 저도 견디지요. 하지만 이 고난이 그렇게 선하게 사용되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셉도 아브라함도 지금 우리처럼 그 고난이 어떻게 풀릴지 고난을 겪는 그 순간에는 몰랐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이 풀고 계시다는 사실만 믿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고난과 시련과 실패의 답을 얻고 싶어 합니다. 이 어려움이 어떻게 극복될지, 이 상처를 어떻게 보상받을지, 이 배신을 어떻게 복수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선하고 전능한 손길로 일하고 계시며 마침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당신께 영광이 되고 믿는 자녀들에게 참된 복과 승리가 되도록 만들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꼴찌 박사
6.25 전쟁 직후 함경도에서 피난온 가정에서 태어난 조명환이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Save the Children이란 구호단체를 통해 미국의 한 기독교인 자매가 매달 보내주는 15불의 지원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는데 머리도 너무 나빠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도 도무지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TV드라마를 보면 형제들은 모두 웃는데 명환이는 왜 웃는지 이해를 못 해 멍하니 있다가 형제들이 설명을 해주면 그제서야 웃곤 했습니다. 그래서 형광등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성적이 나빠 갈 대학이 없어서 뭘 공부하는지도 모른 채 미달된 학과라고 해서 건국대 생명공학과를 들어갔습니다. 입학식을 하는 날 어머니가 선물이라면서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열어보니 편지지에 대하 16:9이 쓰여있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이, ‘명환아, 네가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데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네 머리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네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모를까 네 머리로는 안 되니 이 말씀을 늘 외우고 순종하거라. 줄 돈이 없어서 이걸로 떼우는 것은 아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정말 주님 섬기는 시간만 빼놓고는 죽어라고 열심히 공부했더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과정에 입학을 해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2학기 만에 실력이 안 된다고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돈이 없어서 공원 벤치에서 자면서 미국 전역의 대학에 입학신청서를 보냈지만 단 한 곳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쫓아낸 교수가 원망스럽고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대학들이 미웠습니다.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서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얼마 후 아리조나 대학의 에이즈 전문가 찰스 스털링 교수라는 이가 자기와 공부해보겠냐고 답장이 왔습니다. 찬밥 더운밥 가릴처지가 아니어서 그 길로 아리조나로 가서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도 없던 에이즈 연구를 시작하면서 세계적인 석학들과 노벨상수상자들, 기업가들을 만나서 견문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건국대 교수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에이즈학회장이 됩니다. 그는 에이즈에 대한 전문성과 각계 지도층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2조2천억을 모아서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에 걸린 수백 만명의 아이들을 치료하는 일에 앞장 서고 있습니다. 그는 2030년까지 에이즈가 완전히 퇴치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꼴찌박사라고 소개합니다. 형제들 중에서도 학교에서도 대학에서도 항상 꼴찌였는데 자신이 박사가 되고 전 세계 아이들을 돕는 운동을 지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쫓아낸 오하이오 대학과 지도교수가 원망스러웠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세계적인 에이즈 전문가요, 운동가로 만든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합니다. 오하이오 공원에서 울면서 기도했던 그 밤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만 보고 절망할 때 요셉과 아브라함과 꼴찌박사 조명환은 고난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담대하였고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우리라고 그 하나님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하나님을 믿고 원수를 용서하고 고난을 이겨내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