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8:19-29/우물쭈물하는 인생
181216 주일설교 대강절3주
결정장애
프랑스의 판타지 소설가 미하엘 엔데의 책에 ‘자유의 감옥’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수많은 문이 있는 방에 던져집니다. 주인공은 어느 문이 출구인지를 고민하지만 잘못된 문을 열까봐 두려워 정작 그 어느 문도 열어보지 못 합니다. 이렇게 고민하는 동안 수십 년이 흐르고 그 동안 문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단 하나의 문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 했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문은, 제 생각에는 죽음이라는 문이 아닐까 합니다. 선택의 자유가 넘치지만 정작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의 고통을 그린 소설이라 생각됩니다.
넘치는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결정장애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뇌했던 세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따와서 햄릿증후군이라고도 불립니다. 결정장애는 현대인들의 신경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분부터 직업, 결혼, 주거지역 등 대부분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어 있던 고대나 중세인들과 달리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인들이나 겪는 장애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봇짐장수가 들러서 내놓는 거울과 노리개 같은 진귀한 물건들은 하나 밖에 없으니 선택할 필요도 없고 그것을 갖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반면 이제는 청바지 하나를 사러 가도 수많은 브랜드, 수많은 스타일, 수많은 컬러, 수많은 가격대가 있어서 그 어느 것을 선택해도 선택하지 않은 것과 비교하느라 도무지 만족이 없고 그래서 후회할까봐 염려가 되어 정작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이런 결정장애가 청바지 선택에만 그친다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우리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도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결혼생활에 행복을 못 느끼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선택의 자유와 결정장애와 관련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배우자를 선택할 수 없었고 물릴 수도 없어서 주어진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만족하고 감사하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도 인터넷에서 다른 예쁜 강아지들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우리 집 강아지 써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 선택하지 않은 이에 대한 미련이 결혼생활을 괴롭힙니다. 쉬워진 이혼으로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선택을 고집할 이유가 약해지고 그로인해 만족도는 더 떨어집니다. 선택의 자유가 오히려 불행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음행의 연고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은 결정장애를 겪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아합이 통치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백성들입니다.
머뭇머뭇 춤추는 사람들
지난 주에 이어 우리는 아합왕을 만난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아합 가문의 바알숭배를 꾸짖은 엘리야는 여호와의 선지자인 자신과 바알 선지자들의 갈멜산 대결을 제의합니다. 산 위에 쌓은 제단에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라는데 동의하고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부르짖어 기도하였지만 아무 응답이 없는 장면까지 읽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대결의 자리에 모인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아합왕을 꾸짖었듯 이렇게 꾸짖습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지금 백성들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첫째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합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요구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합니다. 이 두 가지 상태는 그들의 영적인 자리를 보여줍니다. 머뭇머뭇하다는 히브리어 pasach라는 단어는 26절에 등장하는, 바알의 제사장들이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는 표현과 어원이 같습니다.
(왕상 18:26) … 그들(바알의 제사장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그 뜻은 절뚝거리다, 비틀거리다 입니다. 바알의 제사장들이 바알의 제단 주위에서 바알에게 기도하며 비틀거리듯 춤추는 것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것은 사실상 같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엘리야가 그들을 향해 머뭇머뭇거린다고 일갈한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이 마치 중립을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상 바알의 제사장들의 장단에 맞춰 춤추며 바알의 편에 서 있는 것이라는 고발인 셈입니다. 아합왕이 바알숭배를 주도한 죄가 있다면 백성들은 그 죄를 침묵으로 방조하고 때로 이익이 되므로 동조한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악이 번성하는 조건은 의인들의 침묵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불의가 횡횡할 때 침묵하는 것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무죄한 사람을 속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사기꾼을 돕는 것입니다. 폭력배가 선량한 시민을 폭행하는 것을 보고 말리지 않고 있는 것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폭행을 방조하는 것입니다. 바알숭배가 여호와 신앙을 박해하는 것을 보고 머뭇머뭇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바알숭배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의 안락과 번영을 위하여 불의가 횡횡하는 것을 눈감고 입닫고 살아가는지요! 현대 복음주의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도덕의 영역을 술, 담배 안 하고 부정 저지르지 않는 수준의 개인적 경건생활의 영역으로 축소시켜 버린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결과 괴로운 일에는 아예 참견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소시민적 바램을 성경의 평화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준 참된 평화는 위험하고 불편한 현장에서는 아예 도망쳐서 개인적 평화를 추구하는 도교적 평화가 아니라 불의와 모순에 항거하느라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성령이 주시는 확신과 기쁨을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저와 여러분은 의를 위해 박해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
백성들이 엘리야의 선택요구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강조점입니다. 18절 후반부의 ‘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니라’는 표현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대답한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단어 anah는 18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응답하다라는 단어와 똑같습니다.
(왕상 18:24)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왕상 18:26) 그들이 …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왕상 18:29)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바알은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왕상 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응답의 유무는 살아있는 신이냐, 아니냐를 가릅니다. 응답하는 여호와는 살아있는 신이요, 응답하지 않는 바알은 죽은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이 원리를 백성들에게 적용해 보십시다. 그들이 엘리야의 일갈에 아무 대답-응답도 하지 못 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듭나지 않았기에,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기에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결단하라는 부르심
오늘날도 이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 부자 청년처럼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며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인생이 얼마나 얼마나 많은지요?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일갈하였듯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우물쭈물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짜 적은 무슬림이나 무신론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위협적인 적은 바로 물질숭배입니다. 무슬림이나 무신론은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 합니다. 세상에 무신론이 아무리 퍼지고 무슬림 신도들이 들어와도 교회가 교회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교회의 빛됨과 소금됨은 더욱 드러납니다. 그러나 물질숭배는 교회 안까지 파고들어와 교회가 교회되지 못 하게 만듭니다. 물질숭배는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섬길 수 있다고 속입니다. 물질숭배는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사랑이라고 쓰고 돈 사랑이라고 읽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속으로는 돈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돈을 얼마나 더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돈이 떨어지면 걱정하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며 목사를 찾아오지만 믿음이 떨어졌다고 슬퍼하며 목사를 찾아오는 성도는 본 적이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밤잠을 안 자며 공부하고 일하고 수고하지만 하나님을 더 섬기기 위해 공부하고 잠을 설친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듣지 못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노력이 가있는 곳이 우리가 진짜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돈을 더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결단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 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주님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그 어떤 일,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 가족들과 작별하는 일보다도 우선하는 일입니다. 이런 부름 앞에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응답하는 인생
이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합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었다는 것은 곧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그들이 거듭 났다는 말이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죽은 신은 응답하지 못 하듯 죽은 영혼은 응답하지 못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응답하시듯 살아있는 영혼만 응답합니다. 여기 응답하는 삭개오를 보십시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주님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었습니까? 거듭났기 때문이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고 침묵하는 인생은 아닙니까? 결단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응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