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 주님이 오신 이유 / 마2:1~12

20181225 주님이 오신 이유 / 마2:1~12

마 2:1-12/주님이 오신 이유

181225 성탄절설교
부러움의 이유
크리스마스만 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을열어주는101가지이야기’라는 책에 실린 실화입니다. 뉴욕시에 사는 조는 큰 부자였던 형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빨간 스포츠카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 차를 타고 출근한 첫 날 조는 차를 자랑하느라 하루 종일 일은 하나도 못 한 것 같았습니다. 퇴근하려고 회사 주차장으로 내려왔더니 한 눈에도 서있는 차들 사이에서 확 뜨이는 자기 차를 열 살 남짓한 꼬마아이가 앞뒤로 오가며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차 아저씨 꺼예요?’ ‘그럼. 아저씨 형이 큰 부자라서 이 차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줬단다.’ ‘와, 정말 좋겠다.’ ‘너도 이런 차 사주는 형이 있었으면 좋겠지?’ ‘아니요. 저도 동생에게 이런 차를 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의 말을 들은 조는 순간 조금 당황했습니다. ‘너 이 차 한 번 타볼래?’ ‘정말요? 그럼 저희 집까지 태워다주실 수 있어요?’ ‘그럼, 이 차가 얼마나 빨리 너희 집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마.’ 허름한 동네에 있는 아이의 집에 도착하자 조금만 기다려줄수 있느냐고 말하곤 아이가 집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가족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멋진 차를 타고 왔는지 자랑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 조가 차에서 기다리는데 아이는 예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동생을 업고 나왔습니다. 한 눈에도 엎혀있는 아이의 동생은 다리가 불편한 장애아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아이는 동생에게 조의 차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타미, 내가 반드시 약속할게. 형이 돈을 많이 벌어서 너에게 이런 멋진 차를 사주고 말거야. 그럼 너는 어디든 갈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형이 꼭 약속을 지키고야 말거야.’ 그 순간 조는 형언할 수 없이 벅차 오르는 무언가와 더불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두 아이를 태우고 허드슨 강변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드라이브를 즐겼습니다.
 
주기 위해서 
이 꼬마아이 때문에 조가 느꼈던 감동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낀 이가 저만은 아니겠지요? 조처럼 우리는 받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고 할 수만 있다면 더 받으려 하고 왜 더 받지 못 하는가 불평하곤 합니다만 이 아이처럼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 가르치셨고 더 주려 하셨고 생명까지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행 20:35) …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성탄절이 있다는 것도 큰 의미라 생각됩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닫고 구하여야 하는 것은 ‘올 한 해 나는 얼마나 많이 받았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주었나’여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나누었나, 동료들에게 얼마나 많은 친절을 베풀었나, 이웃들에게 얼마나 많이 나누었나, 원수들에게 얼마나 많이 용서를 베풀었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올 한 해를 돌아본다면 올 해 여러분은 몇 점이나 되는지요? 시간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이틀이 모여 한달이 되고 한달두달이 모여 한해가 됩니다. 그리고 한해두해가 모여 인생이 됩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이렇게 돌아보는 한 해를 몇 십번만 반복하면 우리 인생이 끝납니다. 인생이 끝날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받았나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주었나로 평가하십니다. 그 때 여러분은 몇 점이나 받을 자신이 있는지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기뻐하는 성도가 되기를 결심하는 이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낮아지기 위해서
성탄절에 오신 주님의 모습은 그 자체로 메시지입니다. 지극히 높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귀한 보좌를 버리시고  서민들이 자는 여관에도 자리가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신 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높고 존귀한 분으로 계시려 했다면 굳이 이 땅에 내려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주님이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낮아지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최근 지인들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SKY캐슬이란 드라마를 추천해 주어서 조금 봤습니다. 자녀들을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SKY캐슬이라는 고급타운하우스의 상류층 주민들을 다룬 드라마인데 그들의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혈통과 학력, 부와 명성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반면 가난한 서민들을 멸시한다는 것인데 극중 인물들은 그 스카이캐슬에서의 풍요롭고 귀족적인 삶을 대물림하기 위해서는 자녀들도 최고명문대학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허영 뒤에는 그 부귀와 풍요를 잃고 추락하면 어떻게 하나 라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낮아질까봐 두려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욱 낮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을 보면 애벌레의 탑 꼭대기까지 올라간 애벌레들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다른 애벌레들을 밀어 떨어뜨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른 애벌레들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를 지키던 애벌레들 역시 얼마지나지않아 밑에서 올라온 또 다른 애벌레들에 의해 밀려 추락합니다. 높아지려는 자는 추락합니다.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집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그 어떤 이들의 말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주님 당신의 삶으로 이 진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이 땅에서도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 십자가까지 내려가셨고 그 결과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빌 2:8)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 성탄절에 지극히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본받아 더욱 낮고 겸손한 마음을 품고 섬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살리기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생명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마귀의 역사를 우리는 매일 신문을 통해 봅니다. 살인과 폭력, 전쟁과 테러, 탐욕과 음란, 환경파괴와 자연재해 등으로 세상에는 죽음의 역사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과 역사와 문명을 지탱시켜오고 있습니다. 태양과 자연과 우주는 자연에 생명을 낳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사람들 안에 생명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적 전쟁의 한 가운데 죽음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생명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당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으로써 살아나시고 죽음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또한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죽음으로서 세상을 살리라는 가르치셨습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죽으면 형제가 삽니다. 내가 죽으면 구역이 삽니다.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삽니다. 내가 죽으면 세상이 삽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가 살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인가요, 세상을 살리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인가요? 죽음으로 세상을 살리기 위해 이 성탄절에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기를 두려워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