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8:16-20/가르쳐 지키게 하라
190106 주일설교
탁아소 교회
‘제자입니까’란 책의 저자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200명이 채 안 되는 교인은 극성스러운 전도와 조직 덕분에 2년 만에 600명까지 성장했습니다. 교회의 성장 덕분에는 그는 여러 집회에서 교회의 행정체계와 사역 등을 소개하는 강사로 불려다녔습니다. 그러나 사역을 쉴 때면 찾아오는 공허감 때문에 2주간의 휴가를 내고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그를 깨뜨리기 시작하셨습니다. ‘후안,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콜라를 판매하듯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조금도 자라지 않은 영적 갓난아기 200명을 600명으로 늘렸을 뿐이다. 너희 교회는 자란 것이 아니라 살이 찐 것이다.’ 후안 목사가 숫적 성장에 어두워졌던 눈을 뜨고 교회를 찬찬히 돌아보기 시작하자 교회가 영적 아기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첫째 증거는 기도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다는 것입니다. 갓난아기들이 엄마에 먹을 것을 달라고 하듯 교인들은 하나같이 한결같이 하나님께 더 달라는 기도만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증거는 분열이었습니다. 교회는 교파로 분열하고 교파는 교단으로 분열하고 교단은 개교회로 분열하고 교회는 교인들끼리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증거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섬기기보다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넷재는 교회에 일꾼이 없다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을 신앙생활하면서도 1년에 단 한 명의 영혼도 전도하지 못 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어쩌다 교회로 데리고 오는 이가 있어도 그를 양육하는 것은 목사에게 다 맡긴 채 아무 것도 하지 못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때부터 영적 아기에 머물러있던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시키는 것에 전념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 겪은 일들을 베스트셀러가 된 ‘제자입니까’라는 책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안 목사의 글을 읽노라면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가 꼬집고 있는 아르헨티나 교회의 상황이 오늘 우리가 몸담은 한국교회의 그것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고속성장으로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만 커진 몸집에 비해 그 성숙도는 한참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선교역사에서도 100년이 갓 넘은 어린 교회이지만 교회의 체질 역시 양적 성장에 치중하다보니 질적 성숙에는 소홀했습니다. 교인은 많은데 성숙한 성도는 많지 않고 영적 아기들만 가득합니다. 그 증거로 후안 목사가 지적한 네 가지 증거가 한국교회에도 그래도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천편일률적인 달라는 기도, 분열과 갈등, 섬김보다 누림을 더 좋아하고 일꾼이 부족한 것 등이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교회가 영적 아기들을 돌보는 탁아소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군대를 길러내는 훈련소가 되어야 하는데 그 곳에서 배출되는 이들은 달라고 울고 떼쓰고 싸우는 아기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것일까요?
왜곡된 복음
그 이유 중 하나로 한국교회가 전해온 복음의 왜곡을 들 수 있습니다. 왜곡이란 단어의 의미는 사실과 다르게 무언가를 전하거나 해석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전하신 그대로 온전하게 전하지 않고 무엇을 빼거나 바꾸거나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의 쓴 글을 묶어서 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이 복음서 전체의 메시지를 주의깊게 배워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이 중 한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왜곡하고야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심하게 왜곡된 것은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이란 우리의 전인격적 동의와 헌신, 변화 없이 그저 지적인 동의, 생각의 공감, 뉘우침의 고백 등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예수님을 믿지만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 일요일엔 거룩하지만 평일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교회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일상생활은 제 멋대로 사는 그리스도인 등 소위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예수님은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하셨고 마지막 때에 교인들이 양과 염소로 나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공동체 안에 적용해본다면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알곡이라고 자부하십니까? 염소가 아니라 양으로 불리리라 자부하십니까?
잊혀진 제자도
한국교회가 왜곡한 복음 그래서 회복되어야 하는 복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저는 잊혀진 제자도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인데 한국교회는 제자됨의 중요성을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이 점을 오늘 본문말씀이 일깨워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온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주신 명령입니다. 18절, 19절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명령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지않고 그저 교인으로 삼는데 만족했습니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고 헌금 안 빠지고 봉사까지 하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지난 세기 한국교회 사역의 핵심은 어느 교회 할것없이 예배와 심방이었습니다. 교인들을 예배에 꼬박꼬박 출석시켜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목표였고 출석 안 하는 교인이 있으면 찾아가 심방하여 다시 교회에 출석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까지 얻으려면 교인들을 모을 전도행사,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 행사 등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결정적인 요소가 빠져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변화된 생활로 살아가는 제자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였습니다. 이것은 실수로라도 빠뜨릴 수 없는, 빠뜨려서는 안 되는 목표였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 수 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방법은 예수님이 분부하신 즉 가르쳐서 제자들이 지키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첫째 가르치고 둘째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치고 지키는 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교(교)자는 가르칠 교자입니다. 이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지 않는 곳은 그러므로 교회가 아닙니다.
가르침의 내용은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실수는 모든 것을 가르치지 않고 일부만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파에 따라 혹은 목사에 따라 가르치는 내용이 편중되기가 쉽습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가르침이 문제가 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핵심인 복음은 설교에 없고 수많은 권면 중 하나일 수 있는 긍정적 태도만이 설교에 가득합니다. 매일성경을 통해 새벽기도와 QT를 성경전체를 읽어나가는 것은 그래서 대단히 유익하고 필요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우리의 설교와 공부가 편중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을 양육, 훈련이라고 합니다. 이 양육과 훈련은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즉 복음의 핵심이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한국교회와 아르헨티나교회 뿐 아니라 이 시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양육과 훈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가지불 없는 제자도
그러면 왜 현대교회는 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양육과 훈련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 했을까요?
첫째는 대가지불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4영리 정도 읽고 믿는다 말하고 영접기도 하는 것으로 축소시키면 정말 이해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쉽습니다. 영원히 죽을 죄인이 헤아리지도 못 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데 10분도 안 걸립니다. 교회출석과 봉사까지 더해도 매주 조금 성가시기는 하지만 충분히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대신 교회에서 얻는 것도 적지않으니까요. 그러나 복음을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가르침을 배우고 다 지켜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10분이면 될 것을 10년이 걸려도 잘 안 됩니다. 주일 하루 교인인 척 하면 될 것을 일주일 내내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보통 대가지불이 아니니 그렇게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부담스러운 요구를 하면 교인들이 교회 안 나올 것 같아서 목사도 설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고, 받아들이기 쉽게 짐을 줄여주고, 대가지불을 안 해도 되니 교회 나오라고 사람들을 달랩니다. 그 덕분에 영적 아기들을 많이 모아 탁아소는 크게 키웠지만 정작 예수님이 명령하신 제자는 거의 길러내지 못 했습니다.
둘째는 우리들의 교만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그 어느 시대보다 스스로 완성되었다 믿는 사람들입니다. 근대의 문을 닫고 현대의 문을 연 철학자로 평가되는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책에서 초인사상을 펼칩니다. 한마디로 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 대신 자존하는 현대인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모두 스스로가 거의 신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모두가 자신이 신이 되어 살아갑니다. 순종과 겸손과 훈련과 절제와 같은 신앙의 덕목을 인기가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잘 아니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가장 옳다 믿으니 삶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완성되었다 믿으니 훈련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더 이상 배우지도 지키지도 않는 그리스도인이 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지막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양으로 불리지 못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현상은 현대 교회가 마귀의 탁월한 책략에 속아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교회도 나오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하도록 격려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서 사람들의 인정과 직분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C.S.루이스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등장하는 마귀 스크루테이프는 그렇게 만들도록 조카 마귀 웜우드를 가르칩니다. 다만 마귀는 기독교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지 못 하도록 막습니다. 진실한 제자가 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이름 뿐인 기독교인,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기독교인,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않는 기독교인으로 교회를 가득 채우는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지는 제자
후안 목사는 그의 책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 마음을 잘 고쳐먹어서, 등록카드를 작성함으로써 혹은 직분을 받음으로써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겸손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충성으로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평생의 삶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히틀러 암살사건에 동참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가 죽지않았다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평가를 받는 독일의 본 훼퍼 목사는 그의 책 제자도에서 제자가 되기 위한 값지불이 없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죄악이라고 고발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새롭고 온전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받은 성도들은 부르신 이에게 응답하여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녀와 성도로 부르신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가 되는 길은 그 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 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대일을 통해, 커피브레이크를 통해, 티성경공부와 성경적재정교실과 부부행복학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쉬지않고 가르치고 배우고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 뉴저지장로교회 모든 교우들은 반드시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둘 중 하나는 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종하기 위해 배우지 않으면 안 되고 배운 이는 또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제자로 부름받아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