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0 성전은 어디 있는가 / 요 2:13~22

20190310 성전은 어디 있는가 / 요 2:13~22

요 2:13-22/성전은 어디 있는가

190310 주일설교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얼마 전에 한 교우께서 이메일로 본인이 최근 양육과 성경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얼마나 무지했었는지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전에 맨하탄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자가 무슬림이었답니다. 그 사람과 종교이야기를 하다가 교우께서 말하기를, 내가 믿는 여호와나 당신이 믿는 알라나 모두 같은 분인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결국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제야 그것이 얼마나 무지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이 교우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미국 교회 내에는 제법 있습니다. 2017년 종교성향여론조사기관인 PRRI(Public Religion Research Institute)는 ‘미국인의 영적 성향에 대한 조사’를 내놓았는데 부제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인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었습니다. 미국인 10명 중 7명은 자신을 영적이거나 종교적이라고 밝혔는데 이들 중 자신을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고 답하는 이들이 계속 늘어난다고 합니다. 즉 영성은 추구하지만 특정종교의 가르침에 갇히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게 답한 이들의 70%는 특정종교에 소속해있다고 답했고 그들 중 82%는 기독교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해석하자면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기독교적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그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보다 좀 더 다양한 방식의 하나님 경험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향은 젊은 층으로 갈수록 더 두드러집니다. 오늘날 소위 Unchurched Christian 즉 교회에 안 나가는 기독교인의 출현,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수용, 성경보다는 오두막과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로 하나님을 배우는 경향 등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폭넓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별 문제가 없을까요? 
 
성전은 어디에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성전을 주제로 설교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배당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 성전이 그리심산과 시온산 중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참 예배는 더 이상 장소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예배자의 믿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 어마어마한 크기의 몰몬교 성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는 더 이상 성전이라 불리는 건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그냥 예배당일 뿐입니다. 장소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이제 더 이상 성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 답은 앞서 던진 질문,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도 괜찮은지에 대한 답이 되기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입니다. 유월절을 맞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주님이 사람들이 성전을 시장으로 바꿔버린 것에 분노하고 노끈으로 상인들을 쫓아내시자 성전을 우상화하고 또 성전을 통해 이익을 얻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수수께끼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20년부터 시작해서 무려 46년 째 확장공사를 하고 있는 이 거대한 성전을 어떻게 헐고 3일 만에 다시 세운다는 말일까요?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을 덧붙입니다.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제 이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저 성전이라 불리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뭐가 성전이란 말인가요? 예수님의 몸이 이제 성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요한복음은 이 진리를 계속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장으로 돌아가보면 제자 나다나엘을 만나신 자리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더 큰 일이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삼촌의 집으로 도망가던 야곱이 한 경험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 28:12) (야곱이 벧엘에서 누워자다가) 꿈에 본즉 사닥다리(계단)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의 꿈을 예수님이 인용하셨던 것입니다. 
(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즉 천사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곳은 바로 하나님의 집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당신의 몸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곧 성전이라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은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나님을 보는 길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갑니까?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는 이런저런 주장과 하나님을 안다는 이들의 온갖 가르침과 검증되지 않은 경험들 그리고 기대와 소망을 뒤섞은 추측들에서 하나님을 배웁니다. 이것은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각자 어느 부위를 만지느냐에 따라 코끼리가 부채도 되고 뱀도 되고 기둥도 되듯이 각자 어떤 경험을 하고 누구에게 듣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제 마음대로 그립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어렵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기도 어렵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조차도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런 무지한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모르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곧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녀들을 복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의 비극, 그리스도인의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더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아는 하나님은 허상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이들은 성전되신 예수님께로 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려는 이들은 성전되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다
미국기독교역사상 최장기인 60년 연속베스트셀러 기록을 가진 책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저자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능력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서 나온 생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제자들처럼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주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열심을 낼 때, 오히려 그 열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의 묘사는 혹시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에게 집중하지 않고 있기에 우리의 본성으로 섬기려 하고 그 결과 무기력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까지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 아래서 별을 바라보는 이들과 같습니다. 네온사인의 밝기는 저 하늘에 걸린 별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보잘것없지만 바로 우리 눈 앞에 있기에 그 화려함으로 별빛을 가려버립니다. 그래서 도시에서는 별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눈 앞에 번쩍이는 성공과 쾌락과 즐거움과 오락과 풍요의 네온이 우리의 눈을 가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 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아느냐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얼마나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느냐는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시대에 성전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도 그리심산에도 없습니다. 이 곳 예배당도 성전이 아니니 이 곳에 들어왔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