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9:5-8/먹이시고 어루만지시고
190331 주일설교
어루만지는 손길
얼마 전에 8살인 저희 집 막내 진리가 낮에 너무 많이 뛰어놀았는지 잠자리에서 다리가 아프다고 우는 겁니다. 제가 그 다리를 주물러 주다가 저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하루 종일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공을 차고 놀다오면 밤에 잘 때 무릎이 그렇게 아픈 겁니다. 자다가 깨서 다리 아프다고 울면 어머니가 깨셔서는 무릎과 종아리를 당신 손으로 가만가만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러면 아픈 것도 가시고 어느 새 저도 모르게 편안히 잠들곤 했었던 겁니다. 어머니의 어루만지시는 손길은 저에게 치료이자 위로이자 안도감이고 평화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손길처럼 지치고 쓰러진 우리를 가만히 어루만지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손길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성도가 낙심과 탈진에 빠지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이세벨의 위협처럼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세상의 문제와 엘리야의 수고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것 같은 허무 때문이지만, 영적으로는 시선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려 자신과 세상을 보기 때문이요, 또 주님께 내어드렸던 생명에 다시 집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낙심과 탈진에서 성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시키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키실까요?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5절과 7절을 보십시오.
(왕상 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 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낙심하고 탈진하여 사명을 뒤로 내팽게친 엘리야를 주님은 어떻게 깨우십니까? 잠든 그의 뺨을 냅다 후려치며 ‘야, 이노무 자식아~ 내가 준 사명을 어떻게 하고 여기서 잠만 쳐자고 있냐? 안 일어나?’하고 발길질을 하실 법도 한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천사를 통해 두 번이나 그를 어루만져서 깨우십니다. 주님의 어루만지심은 지치고 낙심한 자녀, 탈진하고 사명이 버거운 종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녀들을 꾸짖으시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 물론 꾸짖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사랑입니다. 어루만지는 것은 사랑이고 꾸짖는 것은 사랑 아닌 것이 아닙니다. 꾸짖어서 일으킬 수 있을 때는 꾸짖으시고 꾸짖어도 안 될 정도로 탈진해 있으면 어루만지십니다. 우리 부모들도 그렇게 하지 않나요? 예수님을 보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당신을 도우라는 간절한 부탁에도 잠들어 버린 제자들을 두 번이나 꾸짖어 깨우시지만 그들이 도저히 깨어있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것을 보시고는 오히려 쉬라고 하십니다.
(막 14:37) …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막 14: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막 14: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부활하신 후 갈릴리 호숫가에서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갈릴리로 도망치듯 가버린 베드로를 만나셨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어떤 책망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책망한들 무엇하겠습니까? 베드로의 죄책감과 절망감만 더 할 뿐이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하나님이 엘리야를 깨워 떡과 물을 먹이고 호렙산으로 불러 다시 사명을 주시듯 베드로를 불러 생선을 구워서 잘 먹이시고 사랑의 말로 그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엘리야처럼 또 베드로처럼 낙심하고 탈진하고 실패하고 넘어질 때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어루만져 주십니다. 주님의 만지시는 손길을 경험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먹이시는 하나님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배불리 먹이십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엘리야를 어루만져 깨워서는 그를 먹이십니다.
(왕상 19:5) …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 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왕상 19:7) … ‘일어나 먹으라…’ (왕상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광야를 걸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요? 천사는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먹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역시 엘리야처럼 낙심해 있는 제자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먹이셨지요.
(요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요 21:13) 예수게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엘리야가 한국 사람이었으면 천사가 국밥을 한 그릇 잘 말아줬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이 떡과 물은 주린 자녀를 먹이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마다 자녀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대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일 점식식사봉사로, 교육부 자녀들을 위한 음식봉사로, 양육과 성경공부, 찬양대와 각 부서들을 위해 음식을 봉사할 때, 아가페 사역으로 히스패닉 형제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 이는 모두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탄생부터 이런 식탁의 교제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예배의 핵심요소인 성찬식도 주님과 제자들의 공동식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의 귀한 섬김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임을 알고 식탁의 풍성한 사랑나눔이 더욱 넘쳐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하늘의 양식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이 음식을 천사가 들고왔다는 것입니다. 왕상 17장을 보면 이전에도 엘리야가 주릴 때에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 먹이셨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왜 천사가 음식을 들고 올까요? 광야에 까마귀가 없고 사르밧 과부집도 너무 멀어서였을까요? 천사가 이것저것 방법을 찾아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에라, 내가 직접 들고가자.’ 해서 온 것일까요? 천사가 들고왔다는 점에서 이 음식은 보통 음식과 다릅니다. 더구나 엘리야는 이 음식을 먹고 사십 주 사십 야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호렙산까지 갑니다. 8절을 보십시오.
(왕상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했다는 말은 다른 음식 없이 그 음식만으로 40일을 달려갈 힘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어떤 수퍼푸드를 먹으면 40일 동안 아무 것도 안 먹고도 달릴 힘을 얻습니까? 이 음식은 까마귀가 물고 온 자연으로부터 온 음식이거나 사르밧 과부가 대접하는 사람이 준비한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들고 온 하늘로부터 온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양식이야말로 지친 성도를 정말 살리고 새 힘을 얻고 사십일을 달려갈 힘을 얻게 하는 진짜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좇아오는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6:26) …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32) …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지친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늘의 양식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우리의 주린 배가 부르고 사십일을 밤낮으로 달려가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의 머리맡에도 천사가 들고온 하늘 양식이 놓여있지 않습니까? 성경책 말입니다. 엘리야가 그 양식을 거듭해 먹고 힘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이 하늘 양식을 먹고 또 먹으면 주린 영혼이 비로소 배부릅니다. 힘을 얻습니다. 살아납니다. 하늘양식을 먹고 살아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십니까? 바로 사명을 주십니다. 8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왕상 19:8) …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보내십니까? 호렙산은 모세가 사명을 받은 곳입니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였습니다. 출애굽 후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사명을 주셨듯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해 그를 보내십니다. 새롭게 부여된 이 사명으로 말미암아 엘리야는 힘을 얻습니다. 마치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가 내 양을 먹이라는 새 사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엘리야에게 새 사명을 주시기 위해 그를 먹이신 것이지만 동시에 그에게 새 사명을 주심으로 그를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사명에 대해 우리는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사명이 우리를 회복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흔히 하는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격언입니다. 왜 그 약하디 약한 여자가 엄마가 되면 그토록 강해지는 것일까요? (왜 아줌마들은 세상에 무서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없어지는 것일까요?) 엄마가 강한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이 강하기에 엄마가 된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된 순간 그들은 강해집니다. 자녀를 향한 강렬한 사랑, 자녀를 지켜야 한다는 꺾을 수 없는 의지이 그녀들을 강하게 만듭니다. 못질도 하나 못 하던 여자가 불 속에 뛰어들어 자식을 안고 나오는 엄마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사명이 우리를 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합니다. 사명이 없었다면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가 기도를 하겠습니까, 봉사를 하겠습니까, 헌신을 하겠습니까? 교회에서 직분을 맡기는 것을 그러므로 짐으로 여기지 마시고 은혜로 여기십시오. 그 직분 때문에 우리 믿음이 자랍니다. 힘겨운 직업 때문에 원망하지 마시고 은혜로 여기십시오. 그 일 때문에 우리는 게으르지 않고 술과 도박과 마약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힘겨운 자녀양육을 짐으로 여기지 마시고 은혜로 여기셔야 합니다. 그 자녀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타적인 삶을 살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명 중 하나가 바로 자녀 양육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치있는 일입니까?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생명을 세상에 낳는 일은 얼마나 더 가치있는 일일까요? 그 생명이 잘 자라 이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존재가 되도록 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도록 양육하는 일은 얼마나 더 고귀한 일일까요? 그것은 잠깐 몸을 던짐으로 할 수 있는 구조활동보다 더 오랜 시간 인내와 사랑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기에 더 고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런 사명들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사명은 은혜이며 축복이며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하늘양식으로 먹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그 손길과 양식과 사명을 의지하여 다시 일어나 사십주 사십야를 달려가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