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7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 마태복음 27:45~47 / 김도완 목사

20190417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 마태복음 27:45~47 / 김도완 목사

마 27:45-47/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주님의 외로움

190417 고난주간특새 가상칠언4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오늘의 예수님의 네 번째 십자가상의 말씀으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부르짖음이다. 이 장면의 시작은 45절, 제 6시 약 낮 12시 즈음에 어둠이 내리는 것이고 9시 즉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계속된다. 46절, 9시 쯤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시는데 당신의 고통과 절망은 드러낸다. 아람어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을 헬라어로 번역한다.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부르짖음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 것이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버림받은 고통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이 고백은 예수님의 느낌인가, 아니면 실제 사건을 묘사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필립 얀시의 책 제목처럼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단절된 느낌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도 살아가고 심지어 하나님을 저주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않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것이 그렇게 절망스러운 일인가? 그럼 예수님은 왜 이토록 절망적인 목소리로 ‘크게 소리 질러’ 부르짖으셨는가? 
먼저 예수님이 당하신 일을 비유적으로 보여준 것이 45절의 온 땅에 임한 어둠이다. 온 땅에 비치던 햇살이 사라져서 어둠이 임한 것처럼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님 위에 비추시던 하나님의 은혜의 햇살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왜 예수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인가?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 가운데서 사셨다. 예수님의 기도가 이 사실을 보여준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1:41) …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성부님은 성자님 안에, 성자님은 성부님 안에 거하셔서 성령님과 더불어 완전한 연합을 이루셨다. 이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연합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델로 삼아야할 참된 연합이다. 이것을 성도들이 사랑으로 이루기를 기도하셨다. 이런 상태의 연합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이시기에 아버지와의 단절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여행을 할 때 물갈이를 조심하라고 한다. 특히 제 3세계 여행을 할 때는 꼭 밀봉된 물병을 사서 마시지 수도꼭지나 가게에서 주는 물을 그냥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깨끗치 못 한 물로 인해 배탈이 나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은 그 수돗물 매일 마시며 사는데도 아무 탈이 없는데 여행객들은 왜 탈이 생기나? 정수된 물을 마시던 선진국 사람들의 장은 병균이 득실대는 물에 면역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3세계 사람들은 늘 그런 물을 마시느라 이미 장이 단련이 되어 있다.
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이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사는 것이 더 편한 이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은혜를 애초부터 모르는 이들에게 하나님과의 단절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인생이란 늘 이렇게 외롭고 힘들고 낛이 없는 것이라 체념하고 살며 술과 쾌락, 돈을 유일한 위안으로 여기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은혜의 빛을 쬐지 않고는 살아보지 않으셨던 분,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의 기쁨을 누리며 천국의 평화 가운데 살던 주님에게 찾아온 이 단절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래서 절망 가운데 부르짖으셨던 것이다.
 
왜 버리셨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순간 예수님을 버리셨는가? 그것은 이 순간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진 속죄제의 어린양이 되셨기 때문이다. 속죄제를 위해 쓰이는 제물이 마주하는 두 가지 운명이 있다. 하나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하나는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레 16장에 이 예가 나온다. 
(레 16: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레 16: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레 16: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레 16:10 )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아사셀에 대한 해석은 좀 어렵지만 학자들은 광야에 거주하는 마귀로 이해한다.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속죄제의 제물이 된 두 마리 염소의 운명은 한 마리는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고 한 마리는 광야에 버려져 들짐승 혹은 마귀의 밥이 된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죄의 대가가 무엇이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인 동시에 죄의 삯은 유기 즉 버려짐이다. 로마서에서도 심판을 유기 즉 내버림으로 묘사한다.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롬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롬 1:28) …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내어버리심은 심판의 또 다른 형태이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당신의 어깨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제단에 올려지셨다. 당신은 죽임을 당하셔야 하고 또 버림받으셔야 했다. 우리가 당할 죽임, 우리가 당할 버림받음을 대신 당하신 것이다. 
버림받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부모에게 버림받고 믿었던 친구와 동료와 동업자에게 버림받고 사회에 버림받은 이들이 겪는 고통만도 견디기 힘들다. 하물며 하나님에게 진짜 버림받는다면 그 절망과 괴로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리라. 우리가 겪어야 할 그 버림받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 주님 덕분에 우리는 버림받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천국백성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 은혜에 감사감격하며 승리하는 한 주가 되시길 축복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