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8 내가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29 / 김도완 목사

20190418 내가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29 / 김도완 목사

요 19:28-29/내가 목마르다-대신 당하시는 고난

190418 고난주간특새 가상칠언5
예언의 성취
오늘은 가상칠언의 다섯 째 말씀인 ‘내가 목마르다’를 살펴본다. 십자가 위에서 오후 3시에 목마르다고 외치신 것은 전날 밤 제자들과의 최후의만찬 이후 어떤 물과 음식도 입에 대지 못 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심문과 채찍으로 고문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매어달리시기까지 하신 분에게 일어날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임에 틀림없다. 그 결과 병사들이 주는 신포도주를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사도는 이 예수님의 탄식에는 예언의 성취라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시편에 소개된 예언의 성취이다.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요한이 지적한 이 예언의 성취 외에도 주님의 목마름이 주는 메시지를 요한 사도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 강조한다. 
 
목마름의 종결자
그것은 예수님은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돈과 쾌락과 명성을 다 가져도 해결할 수 없는 영혼의 목마름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누린 솔로몬왕의 고백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목마름을 누가 해결하는가? 예수님 당신이 해결하신다.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당신에게 오는 이들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겠다 하신 예수님은 정작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목마름으로 고통당하신다. 어떻게 된 일인가? 무지한 자들에게 이 역설은 조롱거리가 된다. 
(막 15: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죄도, 구원의 원리도 ‘일(1)도 모르는’ 전혀 모르는 이들의 막말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죄인들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해 당신이 대신 그 모든 목마름을 당하셔야 했던 것이다.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목마름을 당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해서이다. 한국의 G.O.D라는 그룹의 짜장면이란 노래가 한 때 감동적인 가사로 큰 인기를 끌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남들 다 먹는 짜장면 한 번 먹고싶다고 아이가 투정을 부리니까 어머니는 숨겨둔 비상금으로 짜장면을 한 그릇 시켜주셨는데 아들이 먹으면서 엄마는 왜 안 먹냐고 하니까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내용의 노래다. 어머니인들 왜 배가 안 고프면 짜장면이 먹기 싫었을까? 한 그릇밖에 못 사먹는 형편에 아이에게 먹이려니까 엄마는 짜장면을 싫어해야만 했던 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목마름을 해결받게 하시려니까 주님이 그 목마름을 대신 감당하셔야 했던 것이다. 
 
값진 포도주의 제공자
주님이 마신 신포도주도 이런 역설을 보여준다. 주님은 요 2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에 가장 값진 포도주를 주신 분이시다.
(요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요 2:9) …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요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저급한 포도주를 드셨다. 29절을 다시 보라. 십자가 처형장에 있는 포도주는 어떤 것이겠는가? 십자가를 세우고 막일을 하는 노동자들이나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술기운에 할 수 있도록 가져와 마시는 저급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옛날에 농부들이 논에서 일하다가 힘이 들면 술을 마시고 그 기운에 농사를 지었고 사람을 목을 치는 망나니들이 아무리 법집행이지만 제정신으로 할 수 없으니 술을 마시고 그 힘으로 칼을 휘두르곤 했다. 얼마나 저급한 포도주인지 시기까지 했다고 하지 않는가? 
잔치집에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 주님은 천국잔치에서 죄인 된 우리들이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은 저급한 신포도주같은 쓰디쓴 고난의 잔을 마시었다. 누구 때문에 바로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이 목마르셔서 우리가 목마름을 해결했고 예수님이 신포도주를 드셔서 우리는 값진 포도주로 만족케 되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은혜와 평안과 기쁨이 모두 주님의 이 고귀하고도 쓰라린 고통의 열매가 아닌가! 주님이 피값을 주고 사신 참 평안과 기쁨을 매순간 누리시기를 축복드린다. 이로인해 매순간 주님께 감사하기를 축복드린다. 이로인해 형제, 자매들의 아픔과 연약함을 기꺼이 대신 감당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