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9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30 / 김도완 목사

20190419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30 / 김도완 목사

요한복음 19:30/다 이루었다 (사명을 이루는 삶)

 
사명을 이루신 주님
가상칠언의 여섯 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말씀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라고 기억하는데 누가복음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고 기록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요? 
첫째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마 1:21-22)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마 21:3-4)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막 14: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복음서에서 예수님에 관한 기록마다 선지자의 말씀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을 모두 성취하셨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둘째는 사명의 성취입니다.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 10:10)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2:47) …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으로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공생애를 통해 전파하고 가르치고 고치신 것,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모두 이 구원역사의 완성을 위한 당신의 수고였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어주신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절망케 하고 우리가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을 가져옵니다. 오직 주님이 이루셨고 이루실 수 있음을 알 때 소망과 겸손을 갖게 합니다. 
 
사명이 없는 삶
또한 우리에게는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성도의 삶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에도 이 사명을 이루기 전에는 답답함이 늘 남아있었습니다.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세례는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이 마지막 말씀에는 안도와 후련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숙제를 마치고 노는 아이와 놀고 숙제를 하는 아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전자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후자는 묵직한 부담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생의 목적을 부정합니다. 20세기의 소위 실존주의라는 철학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실존이란 현재 지금 이 곳에서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 즉 느낌, 욕구, 경험, 생각 등이 본질 즉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 목적, 사명 따위보다 더 중요하다는 철학입니다. 한 마디로 전통적, 종교적 가르침이 강조해온 삶의 의미, 목적, 사명 등에 반기를 들고 삶에 보편적 목적, 의미 따위는 없다, 그저 오늘 이 곳에서 내가 느끼고 욕망하는 대로 살테니 뭐라 하지 말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비유하자면 숙제 안 해도 된다, 아니 숙제 따위는 없다, 그저 네가 지금 놀고 싶은 대로 놀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라는 태도입니다. 
현대인들에게 큰 인기를 끈 이유는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가르침 아래 갇혀서 느끼는 답답함을 벗어버리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화석화된 종교의 굴레를 벗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일견 긍정적 요소가 없지 않지만 인생의 의미와 목적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는 큰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목적이 주는 부담을 벗어버리려 목적 없는 삶의 허무와 절망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사명을 마주하는 삶
반면 그리스도의 삶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이루는 삶에는 평안과 자유가 있습니다. 
어느 교우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이 내외분 말씀이 인생의 황금기는 69세라는 것입니다. 왜인지 여쭈었더니 두 분 연배인 그 나이가 되어보니 아이들도 다 출가시켰고 일도 은퇴를 했고 돈도 많지는 않지만 두 내외 그저 검소하게 살 정도는 되고 이제 뭘 해도 마음이 너무 편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도 이런 평안이 있습니다. 한 때 크게 인기를 끌었던 ‘목적이 있는 삶’이란 책 제목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목적 곧 사명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 맡기신 사명을 이루며 사는 삶에는 평안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외면하고 사는 삶에는 늘 숙제 안 하고 노는 아이처럼 묵직한 부담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마치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예수님께 왔다가 부름에 응답하지 못 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부를 놓지 못 하지만 영생의 길도 외면할 수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여 근심이 가득한 삶입니다. 나가 놀고 싶어도 숙제를 마친 아이가 더 편하고 재미있게 노는 것처럼 사명을 외면하고 사는 삶보다 사명을 이루며 사는 삶이 더 복됩니다. 물론 사명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명을 감당하느라 겪는 부담이 사명을 회피하느라 겪는 부담보다 훨씬 적습니다. 
스카팩이 ‘아직도 가야 할 길’이란 책에서 강조하듯이 인생은 마주치지 않으면 안 되는 도전이 있는데 그 도전이 부담스러워 회피하면 마주할 때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더 오랫동안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소위 신경증이라는 각종 증세입니다. 노이로제, 강박, 피해의식, 낮은 자존감 등이 대부분 마땅히 마주쳐야 할 도전을 회피하는 데서 온다는 말입니다. 반면 그 도전을 정면으로 마주 하면 그 부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는 삶의 목적이 이런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사명을 받으셨듯이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사명을 부지런히 감당하시고 주님 앞에 설 때에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을 듣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