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0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 누가복음 23:44~46 / 김도완 목사

20190420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 누가복음 23:44~46 / 김도완 목사

눅 23:44-46/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찢어진 휘장
가상칠언의 마지막 일곱 째 말씀을 묵상합니다. 고난주간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시간인 동시에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설렘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은 우울하게 지내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감사하고 주님의 부활을 기대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분에게 이런 감사와 기대가 충만하기를 축복드립니다. 
(눅 23:44-45)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누가복음의 이 말씀도 전 장에서 이야기 했듯 낮 12시부터 시작되어 3시까지 계속 된 어둠을 배경으로 합니다.(44절) 이 때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집니다.(45절)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면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가서 죽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이 휘장을 넘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찢어진 휘장은 찢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심으로 휘장도 찢어져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지고 하나님께로 나갈 길이 열렸습니다. 누구나 몸이 찢기신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의미를 이렇게 씁니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선택받은 선민도 아닌 이방인이요, 영원히 멸망받을 죄인인 우리가 대제사장도 정결예식을 마치고서 일년에 한 번 밖에 들어갈 수 없었던 하나님 앞으로 매 순간 나가 담대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 분과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은 거저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주님의 몸이 찢기고서야 얻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고백은 How are you, Good bye처럼 만남을 열고 닫는 의례적 인사가 아닙니다. ‘주님의 찢기심 덕분에 저는 이렇게 담대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은혜로 주신 기도의 특권을 사용도 하지 않으면 찢기신 주님은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우리 어릴 때 많은 아빠들이 중동에 가서 돈을 벌어 조국에 송금했습니다. 그 때 건설현장에서 일하셨던 분 이야기를 들으니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아내랑 아이들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더라는 겁니다. 매일 비행기가 머리 위로 지나갈 때마다 때려치우고 저거 타고 돌아가고 싶은데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서 그 돈으로 생활기반도 마련하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녀들 학교에 보냈는데 만약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빈둥빈둥 놀고 자고 공부는 안 하면 아빠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주님의 몸이 찢기면서 열어놓으신 이 길로 우리가 나아가 아버지 하나님과 담대히 또 즐겁게 교제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주님의 마음은 얼마다 또 찢기실까요? 이 은혜를 힘입어 매일 주님과 교제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불러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숨지십니다. 이 문맥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뉴마’는 육체와 대비되는 영이란 의미가 아니라 생명을 의미합니다. 내 생명을 아버지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 고백은 생명의 주관자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로마의 총독이나 군인들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욥 12: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이것은 유대인과 로마제국의 생명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유대인과 로마제국이 너희들의 몸은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희들의 참 생명은 그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를 의지해야겠느냐는 경고입니다. 오늘날 박해의 위협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은 없으니 이 고백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이 고백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박해가 사라졌지만 대신 재물을 통해 우리 생명의 안전을 지키라는 마귀의, 더 컸으면 컸지 작지않은 유혹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또 형과 유산상속을 놓고 다투다가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이를 보고 무리에게 이렇게 훈계하십니다. 
(눅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의 참 생명은 재물을 아무리 쌓아도 지키지 못 하고 오히려 재물 쌓느라 생명을 돌보지 않다가 정작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거두시고 재물은 남의 것이 되고 마는 일이 일어날 것이란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우리 생명의 안전과 복됨이 재물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음을 늘 기억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셨듯이 자신들도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오늘 우리는 우리 생명과 안전과 행복과 풍요가 어디에 달려 있다고 고백하고 있나요?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는 재물입니까, 참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께 우리 생명을 부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