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9:19-21/일꾼의 준비
190428 주일설교
소명의 길
신대원 1학년 때 전도사들이 만나면 서로를 소개한 후 왜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 때 자주 듣던 레퍼토리 중 하나가 ‘하나님이 다른 길을 다 막으시고 막다른 길로 몰아서 목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흥회 오신 강사님에게서도 자주 듣던 이 표현은 당시에는 아주 바람직한 목회자의 소명처럼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리로 몰아가셨다는데 거부할 방법이 어디 있으며 또 이보다 더 확실한 목회의 소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신학교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는 신학생이 있으면 곱게 보지 않습니다. 저라도 어떤 전도사님이 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혹시 그 말씀이 이것 저것 다 해봤는데 실패해서 목회밖에 할 것이 없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셔요. 목회는 뭘해도 실패만 하는 사람들의 도피처가 아닙니다. 그러면 목회도 실패해요. 교인들은 아주 죽어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려는 이라면 목회자든 평신도든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소명을 감당할 때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종려주일과 부활주일을 보내고 다시 엘리야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무너지지 않는 바알의 세력을 보고 큰 낙심에 빠져 광야로 도망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그를 격려하시고 호렙산으로 불러 새 비전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세 명의 지도자를 세우라는 것인데 곧 엘리야를 이어 거룩한 싸움을 감당할 다음 세대를 준비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다음 세대의 지도자 중 하나가 될 선지자 엘리사를 세우는 장면입니다.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앞서 언급하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인 중 한 명이 분명합니다. 또 이 장면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것과 여러 면에서 겹쳐집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꾼,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의인,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추어야할 준비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장로선거를 앞둔 우리 교회에 더욱 큰 울림으로 들리리라 생각됩니다.
충성됨
첫째 준비는 충성됨입니다. 본문 19절은 엘리야가 찾아갔을 때 엘리사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왕상 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겨리는 두 마리의 소를 묶어 함께 밭을 갈 수 있도록 만든 기구이니 모두 24마리를 앞세우고 농사를 했다는 말입니다. 21절에서 그가 이중 두 마리 소를 잡아 잔치를 한 것으로 보아 이 소들은 엘리사의 소가 분명합니다. 소가 24마리였다면 밭은 얼마나 컸을까요? 또 각 겨리마다 한 사람씩은 붙어야 했을테니 그가 부리는 일꾼들이 그 자리에서만 11명 이상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엘리사는 오늘날로 치자면 적지않은 규모의 회사를 경영하는 오너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위치에 있으면 일꾼을 부리기만 해도 됩니다만 그 자신도 열두째 겨릿소를 직접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보여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의 일에 충성된 일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장면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 물고기를 잡고 있든지 세금을 걷고 있든지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 역시 비록 교회를 탄압하는 일이었지만 충성되게 감당했다는 점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반해 거라사 광인이 치유받은 후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주님은 그를 당신을 따르기보다 가족들에게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눅 8: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눅 8: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를 보내신 데는 그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주님을 따르려는 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험한 길을 잘 감당할 만큼 준비되어 있는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오랜 투병생활에서 막 회복된 이를 공수부대에 보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맡길 일꾼을 세울 때 또 다음 세대의 일꾼을 훈련시킬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도 바로 충성됨입니다. 주님은 충성된 일꾼을 쓰시고 또 일꾼에게는 충성됨을 기대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보십시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계 2:10)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는 고용주일수도 있고 고용인일수도 있습니다. 큰 비지니스를 할수도 있고 자그마한 가게를 할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충성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충성되어야 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충성되지 못 하면 하나님 나라를 맡기도 어렵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충성되다고 칭찬받는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도리
둘째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해야할 도리는 좀 소홀히 해도 괜찮거나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이해가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짐으로써 그를 제자로 부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0절입니다.
(왕상 19: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그는 부모에게 할 도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엘리야는 그렇게 하라고 답합니다. 부모에게 할 도리는 인간이 인간에게 해야하는 도리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 자녀와 이웃에게 해야할 도리가 모두 중요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이 인간된 도리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부모에게 할 도리를 하라고 허락하는데 예수님은 허락치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가까이 임박했는지,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사명인지를 강조하는 메시지이지 결코 인간된 도리를 기독교인들은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성전에 드리는 헌금을 핑계로 부모를 돌보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고 바울 사도도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까지 꾸짖습니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부모, 배우자, 자녀, 가족 친지, 이웃에게 마땅한 도리를 다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잘 못 하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배우자에게 잘 못 하면서 다른 교우들에게 친절하고 자녀에게 너그럽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너그러운 것, 이웃에게 할 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서 교회 와서 헌금 많이 하는 것은 모두 위선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장로선거가 끝나고 피택된 분의 아들에게 ‘네 아버지께서 장로에 피택되셨다’고 했더니 ‘목사님, 장난하세요, 우리 아버지가요? 전 교회 안 나갈래요.’ 하더랍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인정받기 전에 가족과 동료와 고객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도리를 다 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이들은 비방거리를 세상에 제공해서 오히려 교회의 선교를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도리를 다하는 일꾼들 되시기를 빕니다.
헌신
마지막으로 일꾼으로 갖추어야할 준비는 헌신입니다. 헌신과 충성이 같은 뜻이 아닌가요?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릅니다. 충성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태도를 가리킨다면 헌신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엘리야의 부름에 엘리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통해 헌신의 의미를 살펴보십시오. 20-21절입니다.
(왕상 19: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 (왕상 19: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그는 소를 버렸습니다. 또 소를 잡아 잔치를 벌여 나누어주고 기구를 불사릅니다. 이 모든 것은 부름받기 전의 삶, 과거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부르심 앞에서 비슷하게 반응합니다.
(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부르심의 소명을 위해 과거의 삶을 모두 버리고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과거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모두 직업을 버리고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물론 그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으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가정과 일터와 인생은 더 이상 과거의 것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가정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기회이거나 때가 되어서 남들 다 가니까 결혼한 결과이거나 심지어 신분해결이나 신분상승의 기회였지만 부름받은 이에게는 사랑과 섬김의 소명을 이루는 곳입니다. 과거의 일터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곳이고 생계해결의 도구였지만 부름받은 이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선교지입니다. 과거의 인생이란 내 뜻과 욕망의 실현이 목적이었지만 부름받은 이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거저 받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제는 변화된 가정과 일터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모든 힘을 다 쏟는다는 의미에서 헌신입니다.
이렇게 과거의 삶과 단절한 엘리사는 엘리야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사가 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엘리야를 섬길까요? 왜냐하면 엘리야를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기에 사람을 섬기는 것을 곧 당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섬기는 것, 고통받는 이웃의 곁에 서는 것, 눈물 흘리는 자와 함께 우는 것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요,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꾼,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인, 그리스도의 제자와 교회의 일꾼으로 준비된 이들은 누구입니까? 맡은 일에 충성되고 인간의 도리를 잊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이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준비된 일꾼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