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1 하나님은 잔인하신가 / 신 18:9~13

20190721 하나님은 잔인하신가 / 신 18:9~13

신 18:9-13/하나님은 잔인하신가

190721 주일설교 엘리야15
잔혹한 하나님이신가 
지난 화요일 구역일꾼모임에서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완전히 진멸시키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신 7:1-2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 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신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이 구절을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마치 가나안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인종청소를 하라는 표현으로 드립니다. 신앙의 여부를 떠나 인간본성을 거스르는 잔혹한 행위를 사랑의 신이라는 성경의 하나님이 명령하시다니요,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 이 질문은 이 교우분 뿐 아니라 구약을 읽어온 기독교인들에게 오래된 의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의문 중 그 어느 것도 장담하건대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교인들이 던져오지않은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방금 이 질문에도 초대교회 교부들마다 이런저런 답을 내놓았습니다.
 
교부들의 해답 
초대영지주의 일파인 마르시온파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둘로 나눔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자비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요, 신약에 계시되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과 전혀 다른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정경에서 빼고 신약만 읽어야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구약에 계시된 율법도 부정하는 도덕폐기론의 오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주장은 당연히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은 이 진멸명령을 축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진멸의 대상인 7부족은 인간 안에 뿌리박은 7가지 죄악을 제거하라는 영적인 명령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알레고리적 해석을 제시합니다. 이런 해석은 역사성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반면 어거스틴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명령은 인간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느냐에 상관없이 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수용하기 어렵지 않은 이해입니다만 합리적인 답을 원하는 경계선에 선 이들이나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믿으라는 식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현대신학자들은 진멸명령이 수사학적인 것이지 실제로는 가나안인들을 진멸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과 섞여 살았다는 사사기 등 후대의 기록을 근거로 듭니다. 이런 해석들은 진멸명령이 주는 불편한 정서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누그러뜨려 줍니다.
 
성경과 시대의 맥락
이 본문은 모든 다른 본문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맥락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맥락과 시대의 맥락입니다. 먼저 성경 전체의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즉 구약에 등장하는 공의의 하나님 뿐 아니라 신약에 등장하는 사랑의 하나님까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모습까지를 모두 펼쳐놓고 그 안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과 공의가 충돌없이 조화되신 분입니다. 이 진멸명령 하나만 놓고 하나님은 가혹한 분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둘째로는 시대의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은 기록된 시대 즉 고대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벌어진 것입니다. 예를들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고대근동에서는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명령은 따르기 쉽지않았지만 그 의미나 요구를 전혀 이해못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하나님이 그 누구를 시험하기 위해서도 이런 명령을 하시지 않을 겁니다. 현대인에게 그런 요구는 낯설뿐 아니라 이해조차 안 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인이 겪은 하나님 명령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은 종종 오해를 가져옵니다. 
이 진멸의 명령도 그런 고대의 상황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제네바협약에 의거 전쟁포로의 인권까지 고려해야 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대전쟁에서 적군을 노예로 삼거나 심지어 학살하는 일까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옳거나 괜찮다는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무서운 대가 
자, 그러면 잔혹하지 않으신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런 명령을 내리신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진멸의 대상이 된 가나안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이 진멸은 그들의 누적된 죄악에 대한 부득이한 심판이었습니다. 가나안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살 곳을 만들어주기 위해 쫓겨나거나 운 나쁘게 마침 거기에 살았기에 학살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질러온 죄악에 대한 대가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점을 성경은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창 15:16) 네(아브라함)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가나안)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신 18: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신 18: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신 18: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신 18: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죄의 결과로 받는 심판인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의 진멸은 사실 노아의홍수, 소돔과고모라, 이스라엘의 멸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진멸이라는 방식이 더 잔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심판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가 된 이스라엘도 그들처럼 죄악을 버리지 않자 6백 년 후에 앗수르와 바벨론의 칼날로 멸망합니다. 본문을 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진멸이라는 방식의 잔혹함이 아니라 그런 무서운 심판을 초래한 죄악의 무서움입니다. 우리라도 이 죄악을 멀리 하지 않으면 심판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바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유대인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이방인)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죄악의 대가는 정말 얼마나 무섭고 참혹한 것인지요. 저와 여러분은 모든 죄를 그 모양이라도 버리고 주님의 법을 좇아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순결한 공동체를 위해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이 진멸은 가나안인들의 죄악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염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부터 탈출시켜 가나안으로 이끄신 것은 단순히 고생하는 백성들을 좀 편하게 살게 해주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에게 모델이 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너와 네 자손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나안인들의 죄악의 가치관관 세계관, 풍습과 악행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며들지 못 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순결한 하나님의 법을 좇아 살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는 다음의 말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신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신 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신 7: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신 20: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모든 부모는 자녀들이 건강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기를 원합니다. 아들의 학교에 마약을 파는 아이들이 있고 자신의 자녀에게 지속적으로 그것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라면 어떤 행동을 할까요? 아마 즉시 학교로 가서 그 아이들을 고발하고 아들을 마약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아이들도 남의 귀한 집 자녀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하실 분들이 있을까요? 옆집에 아동성범죄자가 있고 그가 내 딸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즉시 그를 쫓아내든지 우리가 이사를 가든지 딸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도 인권이 있는데 창피를 주면 됩니까, 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까요? 진멸이라는 잔혹한 방식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순결하게 지키기를 원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제자공동체가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경계하셨습니다. 
(막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 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살전 5:22)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
바리새인의 위선과 세상의 허영, 악의 풍습이 제자공동체에 침투하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초대교회도 위선이 공동체에 침투하는 것을 막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산을 팔아 일부만 내놓으면서 전부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경건한지 자랑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치심으로 즉사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읽으면서 거짓말 좀 했기로서는 그것이 죽을 죄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지도자였던 그들의 위선이 묵인되면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경고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 위선이 삽시간에 퍼져버려 두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그처럼 멸망할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그 위선의 죄가 무서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진멸명령이 얼마나 참혹한 방식인가를 넘어서서 이토록 참혹한 방식으로 심판하실 수 밖에 없을 정도 죄의 대가는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진멸이라는 방식이 죄를 철저히 깨닫고 버리고 정결하게 지키도록 하는 은혜로 열매맺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