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7 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 / 마 5:3

20191027 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 / 마 5:3

마 5:3/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

191027 주일설교 산상설교2
아빠의 마음
오늘은 먼저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예술의 길이 너무 중요해 가정을 돌보지 못 하던 전처가 이혼하고 프랑스로 떠난 후 정호연 씨는 어린 아들 다움이를 제 생명보다 더 사랑하며 홀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백혈병을 앓고 있는 다움이는 골수이식을 하지 않으면 얼마 살지 못 할 것이라는 의사의 선고를 받습니다. 간신히 일본에서 다움이와 골수와 일치하는 기증자를 찾았지만 수술비가 문제였습니다. 가난한 시인인데다 IMF로 간간히 들어오던 일거리마저 끊겨버려 생계유지도 힘들었던 그는 다움이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불법장기매매에 신장을 떼어 팔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건강검진 결과 자신이 간암말기이며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있어서 신장도 팔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대신 그는 각막을 팔기로 하는데 한 쪽을 팔면 남은 한 쪽도 곧 시력을 잃는다며 말리는 병원직원들의 만류에도 그는 결국 각막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다움이를 수술을 시키고 다행히 골수가 잘  적응하여 다움이는 서서이 건강을 회복합니다. 그러나 남은 눈의 시력이 점점 떨어져가고 암의 통증으로 자신의 몸도 가눌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자신이 다움이를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소설가로 성공한 전처에게 자존심도 버리고 간절히 빌어서 다움이를 돌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전처가 다움이를 데려가기로 한 날 영문도 모르는 다움이는 아빠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는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로 ‘널 키우기 힘들어서 보내는 것이니 엄마에게 가버리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릅니다. 펑펑 울면서 돌아서는 다움이를 보낸 그는 다움이와 추억이 가득한 시골집으로 내려가 다움이가 만든 나무조각상을 끌어안고 울며 그리워하다 조용히 생을 마감합니다.
이 슬픈 이야기는 2000년 조창인 작가가 발표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소설 가시고기의 줄거리입니다. 다움이를 살리기 위해 또 다움이의 미래를 위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아빠 정호연은 무정한 의사에게, 이혼한 전처에게 그리고 불법장기매매업자들에게조차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호소합니다. 그에게는 체면도, 자존심도, 죄책감도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을 살릴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생명까지 다 내어주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정호연의 마음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어디서 찾을 수 없을까요? 저는 ‘가난한 마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오늘부터 산상설교의 서론 팔복선언을 살펴 봅니다. 팔복선언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무엇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후렴구가 아홉 번 반복되기에 어떤 이는 9복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가 내용이 같기에 8복이라고 부릅니다.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공통점은 행복의 조건이 모두 소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마음의 상태 혹은 생활방식을 가리킵니다. 팔복선언의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어떤 상태일까요? 많은 이들이 가난이라는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소유를 거부한 자발적 청빈을 택한 자의 마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전 재산을 빈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청빈의 삶을 살았던 중세의 수도사 프란체스코나 지난 주에 소개드린 최춘선 목사같은 사람의 마음 상태로 설명을 했습니다. 또 심령이라는 단어에 주목한 이들은 마음의 교만과 욕심을 모두 비운 상태 즉 겸손과 자족의 상태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심령에 주목할 때는 가난이 마치 낙담이나 공허와 같은 내면의 결핍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해석들은 모두 일견 타당하나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조금 더 명료하게 이해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누가복음 6장에도 평지설교라는 형식으로 소개됩니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 (눅 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누가복음은 심령의 가난이 아니라 정확히 경제적 풍요와 대비되는 빈곤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 중 대부분을 차지한 빈곤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것이기에 행복하고 그 자리에 거의 없는 부요한 자는 하나님에게 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불행합니다. 그런데 왜 누가복음의 ‘경제적 빈곤’이 마태복음에는 ‘심령의 빈곤’으로 바뀌었을까요?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3년 동안 비슷한 설교를 북부 갈릴리와 남부 유대와 이방지역까지 여러 곳에서 반복해서 하셨다는 것과 누가복음보다 늦게 기록되었을 마태복음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설교 중 심령을 강조한 말씀을 택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복주심을 받을 만한 심령의 상태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심령은 그 복을 누릴 상태가 되지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를 지적하는 성경구절을 보십시오. 잠언 28장입니다. 
(잠 28:3)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가난하지만 오히려 자신보다 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속된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비열한 인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이를 식량을 남김없이 쓸어가버리는 홍수에 비유합니다. 잠언 30장도 보십시오. 
(잠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가난 때문에 도둑질을 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는 마태복음에 이르러 가난 때문에 형성되는,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라는 개념으로 좁혀집니다. 다시말해 가난 때문에 도둑질을 할 수도 있지만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도 있는데 후자가 가지게 되는 마음의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럼 그것은 어떤 마음의 상태입니까? 
 
가난한 마음
가난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되던가요? 부유할 때와 대비해서 생각하면 쉽습니다. 보통 부유한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항상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베푸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미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요도 없는 도움을 받고 마음의 빚을 지기가 싫습니다. 차라리 자기가 베풀고 채권자의 마음이 되는 것이 편합니다. 좋게 말하면 항상 당당합니다만 나쁘게 보면 기고만장합니다. 내 주머니에 넘치니까요. 자기만족과 자기신뢰, 자기긍정… 이것이 부유한 이의 심령입니다.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반면 가난한 이는 항상 결핍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외부에게서 오기 때문에 의존적입니다. 자신을 신뢰해서는 생존할 수 없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도움 받는 것을 자존심 상해할 여력이 없습니다. 도움 요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빈곤으로 고통받아보지 못 한 이의 사치입니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누군가의 선의요, 긍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의 마음입니다. 
(시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현대 문화는 부유한 마음을 격려하고 가난한 마음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인관관계에서 이런 경향은 일부 긍정적이기도 하고 일부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현대인을 고대 왕족이나 귀족 못지않게 교만하게 만들고 공동체와 자연의 고마움을 잊게 만드는 부정적인 측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마음가짐입니다. 부유한 이는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만족과 자기신뢰를 내려놓지 못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살고자 합니다. 교만한 자기신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 이 마음의 상태가 바로 가난한 이의 심령 즉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했던 그들
성경에서 가난한 심령을 갖고 살았던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르셨을 때에 딸이 병든 가나안 여인 하나가 예수님께 나와서 호소했습니다. 마 15장입니다. 
(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이스라엘)의 떡을 취하여 개들(이방인)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아니, 그녀는 자존심도 없단 말입니까? 개라는 소리를 듣고도 간청하고 싶을까요? 우리 같으면 더럽고 치사해서 더 이상 부탁 안 한다고 소리치며 나와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지금 딸을 살려야 하는 엄마입니다. 세상에 자식을 구하려는 엄마보다 더 절박하고 더 간절하고 더 겸손한 이는 없습니다. 자식의 생명이 달려있는데 무슨 자존심이고 무슨 체면입니까?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더한 모욕과 수치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엄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전적으로 의존적이고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의 상태야말로 그 분의 은총을 힘입는 가난한 심령입니다. 
가난한 심령은 그러나 실제로 가난하고 절박해야만 가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부유하고 부족함이 없는 이들도 가난한 심령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초청해 설교를 들었던 고넬료가 그 예입니다. 그는 부와 권력, 지위를 모두 가진 이였지만 그로인해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고 정말 중요한 것에는 자신이 빈곤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십시오. 
(행 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행 10: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행 10:33) …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는 부유했지만 하나님의 은총에서는 가난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누리는 복은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내세를 말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지난 주에도 설명드렸듯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상태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구원의 공사를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집을 수리할 때 건축업자에게 키를 넘기면 그가 들어와 낡은 곳을 부수고 뜯어내고 고치고 인테리어를 완전히 새 것으로 바꾸어 새 집처럼 만들어놓듯이 성령님은 우리 영혼에서 공사를 시작합니다. 타락한 생각, 병든 감정, 중독된 의지를 뜯어내고 성령으로 감화된 새로운 가치관, 행복관, 삶의 목적을 부여하시고 병들고 상한 감정을 성령으로 치유하시고 죄를 짓기에 익숙한 중독된 의지를 새롭게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에게 기쁘게 순종하는 새로운 의지를 만드십니다. 그 공사가 얼마나 탁월한지 완전히 새 집이 된 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에는 듣도보도못한 멋진 인테리어가 자리잡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구원의 공사가 시작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자기에게 만족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교만한 마음을 내어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가난한 심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의사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환자만큼 치료하기 힘든 이가 없습니다. 자기가 건축업자보다 더 잘 안다고 여기는 집주인의 집은 고치기가 몹시 힘듭니다. 자기가 코치보다 더 실력이 좋다고 여기는 선수를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에게 만족하는 이의 심령은 성령님도 고치시지 못 하고 하나님도 다스리지 못 하십니다. 오직 겸손하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심령에게만 하나님의 다스림은 시작됩니다. 그런 영혼에는 천국이 들어섭니다. 그런 영혼에는 하늘의 행복이 가득 찹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니 천국을 누리게 될 것이란 말씀이 맞는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의 심령은 하나님 앞에서 부유합니까, 가난합니까? 가난한 심령으로 천국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