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6 생명을 살리는 사회 / 마 5:21~26

20200126 생명을 살리는 사회 / 마 5:21~26

마 5:21-26/생명을 살리는 사회

200126 주일설교 산상설교12
인격살인
지난 2014년 12월 5일 한국의 땅콩이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가디언지가 ‘미친 땅콩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는, 그 유명한 땅콩회항사건입니다. 이 일은 JFK를 출발하여 인천공항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대항항공 여객기에 탑승한 대한항공 부사장이, 승무원이 땅콩봉지를 뜯지 않고 서비스를 했다고 격분하여 벌인 사건입니다. 그녀는 승객들 앞에서 승무원을 밀치고 땅콩을 집어던지고 무릎을 꿇리게 하고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심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사무장이 와서 땅콩알러지를 가진 승객들 때문에 규정상 땅콩봉지를 뜯지 않고 서비스한다고 설명하자 그에게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객식서비스매뉴얼로 그를 때렸습니다. 결국 그녀는 활주로를 떠나려던 비행기를 회항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로 대한항공 사주일가의 갑질행태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으며 그녀의 언니 대한항공 전무가 직원에게 물잔을 집어던지며 폭언을 퍼부은 사건, 어머니가 직원들에게 고성과 폭언, 손찌검을 한 사건 등의 영상도 연일 TV뉴스를 장식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한국사회 힘있는 자들의 ‘갑질’행태가 사회문제로 떠올랐으며 뉴욕타임스는 ‘갑질’이란 단어를 발음 그대로 소개하며 ‘중세 영주처럼 부하직원이나 하도급업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갑질을 당한 이들은 심한 모멸감을 느낀 나머지 퇴사하거나 우울증, 대인기피증을 겪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런 갑질을 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법적 처벌을 받는 예가 거의 없지만 이는 칼만 들지 않았지 칼보다 더 날카로운 폭언과 분노로 사람의 영혼을 찔러 죽이는 인격살인에 다름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바입니다. 
 
살인이란
우리는 산상설교의 본론인 예수님의 율법해석을 본격적으로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바로 잡고 그 본래의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섯 개의 대립명제를 소개하시는데 그 첫째 예가 살인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는 모세가 그 옛날 출애굽 때 시내산에서 받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달한 십계명의 제 오계명입니다. 
(출 20:13) 살인하지 말찌니라.
이 간단명료한 율법에 의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살인자가 분명 아닙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심판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고쳐주십니다. 22절입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이 말씀으로 당신이 모세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 권위있는 선포에 의하면 형제에게 분노를 쏟아놓는 것만으로도 살인과 같아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형제를 라가, 멍충이라고 부르고 미련하다고 욕하는 것 즉 무시와 멸시의 언어 역시 살인과 같아서 지옥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분노와 무시는 살인과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분노와 무시가 나란히 놓인 것은 이 둘이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그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감히 대통령에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딸을 무시하고 깔보는 분 있습니까?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능력이나 지위나 인종이나 성별이나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를 향한 존중과 사랑이 결여된 무시에서 비롯된 분노를 꾸짖으십니다.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성내는 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칼로 찌르지 않아도 미움의 눈, 멸시의 태도, 분노의 말로 대하는 것만으로도 그 영혼을 죽이는 살인입니다. 
 
분노와 멸시
이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얼마나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온 것인지요! 우리는 형제, 이웃, 가족에게 얼마나 많이 분노하고 또 얼마나 많이 무시하고 멸시하며 살아왔습니까? 강자는 그 힘으로 약자 앞에서 거침없이 분노와 무시를 쏟아놓습니다. 약자는 강자 뒤에서 욕설과 저주로 분노와 멸시를 쏟아놓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보이지 않는 말의 칼, 분노의 칼, 멸시의 칼로 이웃의 영혼을 찔러 난도질하며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최근에 어느 영성수련회에 참가한 이의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4박5일 일정에 22명의 남녀참가자들의 한 그룹이 되었는데 첫 날 둥글게 둘러앉아 인도자가 질문지를 나누어 주고 답을 하는 시간이 있었답니다. 질문 중 하나가 ‘지금껏 인생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였습니다. 한 중년여인이 한참을 머뭇머뭇거리며 답을 못 하다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추스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준 답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그 사람, 그 인간이라고 불린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에게 가한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한참을 쏟아놓는데 평생 그 증오심을 안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말과 행동의 칼로 딸의 영혼을 난도질하여 평생 아물지않는 상처를 안고 신음하며 살도록 만든 것입니다. 참가자들의 답을 정리해보니 5명이 헤어진 연인, 돈 떼어먹은 사기꾼 등 남이었고 나머지 17명이 놀랍게도 가족이었습니다. 어머니 1명, 아내 2명, 남편 4명 그리고 가장 많은 10명이 아버지였습니다.
저도 슬그머니 진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진리야, 아빠 좋아, 싫어?’ ‘응, 좋아.’ ‘왜?’ ‘몰라, 좋으니까 저리 가. 게임하는 데 방해돼.’ ‘왜 좋은지만 말해 봐.’ ‘계속 이러면 싫어할거야.’ ‘음. 알았어. 갈 게. 싫어하지 마.’ 이 자리를 빌어 진리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부모, 상사 등 권위를 가진 자들은 감정을 다스리는 것, 말하는 것에 더욱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멸시와 분노가 집단화된 것이 인종차별입니다. 미국역사는 원죄를 지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원주민 학살과 흑인노예제도 그리고 뿌리깊은 인종차별이 그것입니다. 이런 악행에는 백인들의 우월의식과 타인종에 대한 멸시와 무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멸시와 분노가 아리안족 우월주의와 유대인 차별과 학살로 표출된 것이 2차대전을 일으킨 나찌의 악행이었습니다. 사실상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기민족을 높이고 타민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사회 역시 단일민족의 신화로 포장된 인종차별이 뿌리깊습니다. 오늘날 단인민족이라는 허상을 주장하고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없습니다만 타인종 멸시의 악습은 쉽게 뿌리뽑히지 않습니다. 이런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는 집단적으로 인격살인을 저지르는 살인사회나 다름없습니다. 
 
화목하라
우리에게 이런 분노와 멸시의 태도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즉시 그 태도를 버리고 무시하고 분노하던 이웃과 화해하라고 명하십니다. 본문 23-24절입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은 속죄제사에서 드리는 희생제물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 용서받기 원하여 제사를 드리려다가 혹은 예배를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다면 즉 무시하고 분노하는 이웃이 있다면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그런 태도를 버리고 이웃과 화해하고 와야만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원망들을 일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이웃을 무시하고 분노해 온 것들입니다. 그런 무시와 분노는 하나님 앞에 모두 고발됩니다. 마 18장을 보십시오.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아무리 작은 자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수호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겪는 상처와 고통을 천사들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은 그 호소를 들으십니다. 그런 살인죄를 저지라는 자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와 기도를 들으시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원한다면 우리가 이웃에게 저지른 인격살인을 회개하고 이웃과 화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셀 수 없는 죄
나는 이웃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회개할 것도 없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진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지 못 합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25-26절입니다. 
(마 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우리를 고소하는 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빚을 갚지 못 하면 우리가 옥에서 나올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사실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이 있다는 사실과 그 빚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빚이 있는지를 일깨워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요 16:8) 그(성령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을 때에라야 우리의 죄에 대해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갑자기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교만으로 형제를 무시하고 오만으로 자매에게 분노하고 위선으로 이웃을 비난하던 우리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원하는 이들은 성령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분노하던 이웃에게 나아가 화해를 하도록 이끄십니다. 이 과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눈물로 기도하고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태도와 삶을 돌이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시와 분노를 버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사랑으로 화해하는 삶을 시작할 때 우리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살인하는 사회는 생명을 살리는 사회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병원을 더 짓고 의사를 더 많이 배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과 이웃의 영혼을 살리는 사람입니까, 죽이는 사람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