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6 I’m Christian / 마 5:33~37

20200216 I’m Christian / 마 5:33~37

마 5:33-37/I’m a Christian

200216 주일설교 산상설교
I’m a Japanese
오래 전 한 기독교인 유명인사가 일본에 출장 차 갔다가 머문 호텔에서 중요한 편지를 써서 보내려고 호텔직원에게 건내주고 부탁을 했답니다. 돌아서 오려다 보니 ‘중요한 편지인데 이 직원이 제대로 보내지 않으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 들어 다시 돌아서서는 메모해 두려고 직원의 이름을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 직원이 조금 언잖은 표정으로  이름 대신 ‘I’m a Japanese.’라고 딱 한 마디를 하더랍니다. 이 말 속에는, 일본인은 믿어도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합니다 하는 자부심이 들어있는 말이었겠지요. 그 순간 의심한 것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는 동시에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하더랍니다.
요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고 일본경제도 오랜 침체를 겪고 있어서 이 에피소드가 공감이 안 되는 분들도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중국에 밀려 3위로 추락했지만 일본은 오랫 동안 국가경제규모에서 미국에 이어 부동의 2위 자리를 지켜왔고 그런 성공은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본인들의 성실, 근면, 정직의 덕목들이 한 몫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앞서 소개한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I’m a Christian.’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혹은 중요한 거래를 하는 자리에서 I’m a christian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을 듣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그리스도이라면 믿을 수 있지, 라며 돌아설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언행은 믿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복음이 진짜인지를 사람들이 판단하는 첫 번째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드름 치료제를 판매하는 직원의 얼굴이 온통 여드름 투성이라면 누가 그의 말을 듣고 치료제를 사겠습니까? 갤럭시 셀폰을 홍보하는 직원이 아이폰을 쓰고 있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고 아이폰을 버리고 갤럭시를 사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누가 복음이 진리라고 믿겠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좇는 이들의 삶에 걸맞는 언행을 가지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산상설교의 본문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흔히 하던 맹세의 관습을 예로 드셨습니다. 본문 33절입니다.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오늘날의 약속 혹은 계약에 해당하는 것이 당시에는 맹세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맹세를 통해 집과 가축과 양식을 거래하고 이런저런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맹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습니다. 예나지금이나 신뢰는 공동체의 안녕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신뢰가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맹세를 신중히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헛 맹세를 하지 말아라 즉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맹세한 것을 지키라 즉 약속은 꼭 지켜라. 그 가르침은 흠 잡을 데 없이 유익한 것입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 가르침의 본래 의미를 왜곡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저지르던 잘못을 꼬집으시며 율법의 본래 의미를 다시 해석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의 제자 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언행의 바른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한결같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들의 언행에 꼭 필요한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실함입니다. 이는 어디에서나 한결같다는 의미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예수님의 첫 가르침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 아미시 같은 메노나이트 교단, 퀘이커교도, 여호와의증인 같은 이들은 법정에서의 증인선서 등 일체의 선서, 맹세 등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맹세금지’라는 새로운 율법을 이 구절에서 제정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맹세하지 말라 하시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의도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고대 근동사람들은 자신이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점을 상대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어길 경우 신께서 자신을 벌할 것이라는 단서를 붙여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보면, 이렇게 맹세해 놓고 어기면 결국 맹세의 보증자가 되신 하나님까지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니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레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아닌 그러나 하나님 못지않은 권위를 가진 대상을 찾아내어 맹세를 하곤 했습니다. 그 대상 중 하나가 34-35절에 등장하는 하늘, 땅, 예루살렘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대상을 마구잡이로 가져와 맹세를 하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그 모든 대상이 하나님을 대신할 권위가 있느냐는 논쟁이 나왔습니다. 어떤 것은 하나님을 대신할 권위가 있지만 다른 어떤 것은 그런 권위가 없다는 해석이 나왔고 그러자 권위없는 대상을 가져와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해석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논쟁을 마 23장이 소개합니다. 
(마 23: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 (마 23: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이렇게 지켜야 하는 맹세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맹세를 구분하는 이유는 그들이 맹세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피할 구멍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즉 어떤 약속은 지켜야 하지만 어떤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삶의 영역을 둘로 나눔으로써 약속에 성실하지 않은 자신을 합리화시킨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본문34-35절입니다. 하늘이든 땅이든 예루살렘이든 구분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맹세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맹세든 구분없이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종 발견됩니다. 가장 흔한 것이 신앙의 영역과 일상의 영역을 나누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거짓말하지 않는데 직장에서는 별 죄책감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교회에서는 절대 화내지 않는 좋은 사람이 가족들에게는 화를 참지 못 합니다. 십일조는 절대 빼먹지 않는데 세금은 빼먹지 않으면 바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이보다 더 젠틀맨이 없는데 혼자 있는 곳에서는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움 없이 행합니다. 이렇게 삶을 둘로 나눈 이들에게 예수님은 한결같아야 함을 즉 항상 성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진짜 누구입니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가 바로 진짜 나입니다. 
 
겸손한 그리스도인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언행에 필요한 요소는 겸손함입니다. 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머리로 맹세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은 지킬 거야.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해.’ 이렇게 장담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목숨은커녕 머리카락 하나도 마음대로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큰소리를 많이 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무기력함을 모르거나 혹은 알면서도 숨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의 무력함을 알면알수록 장담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할 뿐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하지 않지요. 
자신의 무기력을 철저히 인식하는 사람들은 중독치료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알콜중독치료모임에서는 술을 끊었다고 말하지 못 하게 한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상담을 시작한다는데요, ‘저는 술을 마시지 않은지 1년 하고 5개월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언제든 다시 술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그런 이들일수록 더 유혹을 잘 이긴다는 것입니다. 반면 술을 끊었노라고 혹은 끊겠노라고 쉽게 장담하는 이들은 오히려 유혹에 훨씬 취약해서 이겨내기가 어렵다는 것은 오랜 경험을 통해 치료자들은 잘 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쉽게 장담하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타이릅니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약 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것이 가수 유승준 씨입니다. 폭발적인 인기로 한국가요계에서 탑스타의 자리에 오른 그는 한 기자가 집에 찾아와 ‘나이가 찼으니 군에 가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무심코 ‘군에 갈 때가 되면 가야죠’, ‘해병대는 어떠냐’고 하자 ‘해병대도 좋죠.’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부터 ‘유승준해병대자원입대선언’이란 기사가 쏟아졌고 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군대를 가지 않자 한국인들에게 괘씸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한국연예계에서 퇴출된 것은 물론 공공의 적이 되어 지금까지 한국입국허가조차 나지 않고 있습니다. 언론의 무책임한 행태에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군입대에 대해 신중하게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았을까요?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각종 가요제에서 상을 받을 때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칭찬을 받아왔었다는 점입니다. 덩달아 그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었을까요? 그의 신앙도, 군입대를 장담할 때의 순수성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를 곤경에 빠뜨린 것은 우리가 얼마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를 몰랐다는 점입니다. 
미숙할수록, 경험이 적을수록 장담을 많이 합니다. 경험과 지혜가 쌓이고 성숙할수록 함부로 결과를 장담할 수 없고 인간은 그저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임을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언행에 꼭 필요한 요소는 진실함입니다. 37절입니다.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나 목숨을 건 맹세와 같이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과한 장담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태도로 말해야 합니까? 그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틀린 것은 아니라 하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과장하거나 왜곡하거나 거짓으로 꾸미지 말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함에 있어서 이익이나 불리함을 고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면 내가 무엇을 얻겠나, 무엇을 잃겠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 고려를 하면 과장, 왜곡, 거짓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 말하는 이의 진실성을 듣는 이가 의심할 이유가 없도록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 사람이 이렇다고 했으면 이런 거야, 이런 믿음을 줄 수 있도록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많은 거짓이 있습니다. 논문표절, 노래표절, 상표도용, 디자인도용, 거짓뉴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만드는 논문, 노래, 상품, 뉴스에는 표절과 도용과 거짓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여러 교우들이 카톡으로 저에게 보내주는 많은 가짜뉴스를 볼 때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 공식뉴스를 잠시만 검색해 보아도 알 수 있는 거짓뉴스에 속아넘어가서는 또 다른 이들에게 거짓을 퍼뜨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학부전공이 신문방송학입니다. 신문기사의 행간을 읽는 법을 배웁니다. 기사의 행간에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읽기를 말합니다. 거짓뉴스에 속고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거짓뉴스가 숨기고 있는 행간을 읽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실하려면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얼마 전 한 타교회 교우가 전화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오랫동안 비지니스 때문에 주일예배를 못 드리다가 최근에 사업을 접고 어느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도 은혜롭고 매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주일 설교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그 목사님의 설교가 인터넷에 올라오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한두 주 간격으로 토시까지 베껴서 그대로 읽다시피 하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큰 배신감과 충격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던 그 교우님은 나중에는 엉엉 통곡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프면서 동시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목사의 진실치 못 함이 이렇게 교우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좀 하자면 전도사 시절 늘 설교준비가 토요일 하루 종일을 쓰고도 주일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몇 시간 못 자고 교회를 가곤 했습니다. 요즘도 주일 설교는 대개 토요일 밤 10시를 전후해서 끝났습니다. 주중에 틈틈이 해놓아도 토요일을 꼬박 책상에 앉아 보내고 나면 피곤해서 늘 유혹에 빠집니다. 좀 대강하고 말까, 좀 쉽게 준비하는 방법 없나… 그렇게 준비해서도 설교가 그것 밖에 안 되냐고 하시는 분께는 정말 죄송합니다만 적어도 부실한 설교는 되지 않으려고 나름 애를 씁니다. 진실하려면 수고가 요구됩니다. 표절하지 않은 논문, 노래, 상품, 디자인을 생산하려면 당연히 수고가 요구됩니다. 정직한 뉴스를 찾아내려면 당연히 지적 수고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그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면 세상에 좋은 논문, 감동적인 노래, 유용한 상품, 멋진 디자인, 정직한 뉴스가 생산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진실을 위해 이렇게 수고를 마다 않을 때 I’m a christian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장애물도 사라질 것입니다. 진실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들,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날을 다시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