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8 코로나의 광풍이 불때 / 막 4:35~41

20200308 코로나의 광풍이 불때 / 막 4:35~41

막 4:35-41/코로나의 광풍이 불 때

200308 주일설교 코로나사태
코로나 광풍
오늘날 세상은 이전에 겪어보지 못 한 새로운 형태의 광풍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입니다. 과거에도 바이러스는 여러 번 인류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만 대개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 제한적인 피해만 끼쳤습니다. 오늘날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 세계화의 영향으로 지구 구석구석으로 사람과 물자가 쉴새없이 순식간에 이동하는 시대이고 바이러스의 전파 또한 그러합니다. 지난 해 말 12월 31일 중국 우한에서 발병이 확인된 이래 두 달여 만에 전 세계에서 10만 여명 이상이 감염되고 3,400명 이상이 사망하였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판데믹상황 즉 전 세계에 이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바이러스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우리 교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자의반타의반으로 주일예배를 집에서 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만나면 코로나 이야기입니다. 가정에선 가족들 염려로, 일터에선 얼어붙은 경기로 죽을 지경입니다. 한 마디로 코로나 광풍이라고 해도 조금도 과하지 않다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자주 씻고 사람들을 피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입니까?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자세는 어떤 것인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저물어가는 어두운 갈릴리 바다를 건넙니다. 석양이 만드는 하늘색을 보며 왠지 불길한 마음이 드는 베드로는 그냥 가버나움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거라사로 건너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배에 먼저 오르셔서는 제자들을 재촉하는데 말릴 엄두가 안 납니다. ‘아, 빨리 안 가? 나 혼자라도 간다.’ ‘쳇, 노도 안 젓는 분이 혼자 어떻게 가실라고…’ 투덜대며 띄운 배가 바다 중간쯤 지날 때 어둠 속에 물결을 일으키던 선선한 바람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기어이 광풍으로 바뀝니다. 덜컥 겁이 난 베드로는 단호하게 외칩니다. ‘요한, 돛을 접어, 야고보, 닻을 내리고. 안드레, 물 퍼내!’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거친 바람소리, 파도소리에 이어 배가 추풍낙엽처럼 흔들립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열 명도 넉넉히 못 앉을 작은 배바닥에 쏟아져 들어와 허리춤까지 출렁입니다. 배가 가라앉는 것은 시간문제인 게 분명해지자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 얼굴에도 공포가 서립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이 이 배에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하고 돌아본 순간 마치 세상풍경이 아닌 듯한 장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슬로우비디오를 보다가 정지버튼을 누른 것 같은 그 장면은 예수님이 고물을 베고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딱딱한 갑판을 베고 조용한 바다에서 자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그 광풍으로 놀이공원 점핑기구처럼 요동치는 중에 주무실 수 있었을까요? 이 장면이 주는 메시지는 너무나 크고 심오해서 다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광풍 속의 평안
잠은 쉼입니다. 쉼은 평안입니다. 평안하지 않은 영혼은 쉴 수 없습니다. 수만 불 짜리 고급 매트리스에 누워도 도무지 쉴 수가 없습니다. 반면 평안한 영혼은 돌처럼 딱딱한 갑판에 누워도 넉넉히 쉴 수 있습니다. 잘 수 있습니다. 광풍조차도 그 쉼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완전한 평안 속에 계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제자들은 주님의 이런 평안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엄마 잃은 아기처럼 그저 겁에 질려 예수님을 깨웁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니이까?’ 베드로의 절박한 외침에는 짙은 원망과 비난이 서려있습니다. ‘주님이 이 밤에 바다를 건너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혼자 주무시다니오? 정신이 있는 겁니까? 왜 우리를 구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부들부들 떠는 제자들을 한 번 보시고 입벌린 검은 사자처럼 포효하며 달려드는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리시고는 한 손을 드시더니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응, 이게 무슨 상황이지? 예수님이 잠이 덜 깨신 건가? 누구를 보고 뭐라시는 거야? 지금 허공을 향해 명령하신 건가? 그 순간 거짓말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토록 거칠게 포효하던 바다가 순한 양처럼 몸을 웅클이더니 배부른 아기처럼 옹알거리며 잠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바다 위에서 바다와 웃고 울며 살아왔지만 결단코 단 한 번도 보지 못 한,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적막이 수면을 잔잔히 쓰다듬었습니다. 마치 태초에 갓 창조된 아기 우주가 그랬을까, 주님은 바다에 하늘에서 내려온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평안없는 세상에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은 평안없는 죄인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 평안을 누리는 자는 참된 쉼을 누립니다. 시 3편을 보십시오. 
(시 3:5) 내가 (평안히)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 3: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어안이 벙벙하고 넋이 나간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주님은 안타까이 혀를 차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내가 너희의 생명 뿐 아니라 자연만물을 주관하는 이인 것을 모르느냐? 아직도 이것을 믿지 못 하겠느냐?
주님의 말씀은 세상에 없는 평안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두려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겁에 질려 사는 인생은 주님이 디자인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들새 하나도 들풀 하나도 잊지 않고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돌보고 지키지 않으시겠느냐는 이 단순하지만 위대한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이것을 가지면 그는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를 얻습니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성도는 어떤 인생의 광풍을 만나도 두려워할 필요도, 놀랄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그 배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인생의 광풍마저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들새도 먹이고 들풀도 입히시듯 성도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강하고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놀라고 두렵게 만드는 것은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합니다. 주님은 작다 하고 광풍은 크다 합니다. 하나님을 잊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서로 비난하게 만듭니다. 용기를 잃게 만듭니다. 도망치게 만듭니다. 믿음을 빼앗아 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세상이 코로나 광풍 앞에 보이는 모습입니다. 근거없는 유언비어들이 사람들을 더 두렵게 만듭니다. 동양인을 향해 혐오를 쏟아놓습니다. 희생양을 찾으려고 매사에 비난부터 하고 봅니다. 모두 코로나 이야기만 하지 주님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원망과 괴로움만 말하지 믿음과 용기와 소망과 진실을 보지 못 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세상에 교회가 희망을 주는 지점입니다. 
참된 성도들은 세상과 다르게 반응합니다. 코로나의 광풍은 작지 않지만 하나님의 강한 손보다 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거역할 수 있는 그 어떤 광풍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세상은 이보다 더 한 위협도 수없이 극복해 왔습니다. 코로나도 결국 극복될 것입니다. 에이즈도, 에볼라도, 사스도, 메르스도 코로나보다 더 위험하면 위험했지 결코 덜 하지 않은 위협이었지만 오늘 에이즈가 무섭고 에볼라와 사스가 걱정되어서 일상생활을 못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코로나의 광풍도 머지않아 잠잠해질 것입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고개 숙이고 무릎 꿇을 때가 금방 올 것입니다. 세상은 보지 못 하는 그 때를 성도들은 미리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코로나가 아니라 주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코로나의 광풍을 맞이한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첫째 태도입니다. 주님이 누리신 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원망을 멀리 하고 믿음과 인내로 세상에 없는 평안을 누리고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주님의 평안이 흘러 넘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광풍 속의 사명
코로나의 광풍을 맞이한 성도들의 두 번째 태도는 사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9.11 테러가 났을 때 쌍둥이빌딩 근처에서 비지니스 하던 교우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빌딩에 비행기가 부딪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빌딩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을 때 놀랍게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히려 무너지고 있는 빌딩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입니다. 그들은 사명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명 없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생존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자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광풍이 불 때야말로 그들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기원후 165년경 시리아에 출병했던 로마군은 천연두를 가지고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안토니우스 전염병이라고 불린 이 역병으로 15년 동안 당시 로마제국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0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방역과 보건, 의료의 개념도 없던 시절 로마인들은 가족이라도 병에 걸리면 내다버리고 죽지도 않은 사람을 매장했습니다. 그래야 남은 가족이라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박해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을 박해하던, 병들어 버려져 죽어가던 로마인들을 데려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극진히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들을 돌보다 병에 걸려도 죽으면 순교라고 믿으며 기쁘게 견뎠습니다. 그들은 진짜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약 100년 후 251년에는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키프리아누스 전염병이 치사율 50%의 기록으로 하루 5,000명씩 사망시키며 로마를 휩쓸 때 대부분의 제국의 관리와 부자들은 감염자들을 피해 도시를 떠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만 남아서 속절없이 쓰러져 죽어갈 때 교회는 역시 죽어가는 로마인들을 돌보고 또 서로를 돌보며 위기를 이겨냈습니다. 
로마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온갖 우상과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염병이 지나간 후 목숨을 건진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들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전도를 받은 이들이 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를 비롯해 온 로마가 기독교인으로 가득하게 되자 콘스탄틴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박해를 중단하고 기독교를 인정하는 313년의 밀라노 칙령을 내립니다. 사실상 로마를 복음화한 것은 전염병의 광풍을 사랑과 믿음으로 맞선 교회의 대처였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코로나 사태로 마스크 품귀현상이 일어나 돈 주고도 구할 수 없게 되자 집에서 직접 마스크를 만들어 쓰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만들 뿐 아니라 동네의 가난하고 연로하여 마스크를 구하러 다닐 수 없는 노인들 가정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직접 제작한 마스크를 전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염의 위험을 줄이려면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 안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중국에서 코로나를 맞서는 의료진들의 사진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집에도 가지 못 하고 사무실 의자와 바닥에서 쪽잠을 자며 환자들을 치료합니다. 흥분한 사망자 가족들로부터 욕설과 폭행을 당하며 그들 자신도 언제 감염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먼 곳에서 우한으로 달려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은퇴한 의사가 자원해서 우한으로 들어가고 주변도시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휴가를 반납하고 코로나 방제작전에 자원하여 들어갔습니다. 한 여간호사는 방호복 입는 시간을 줄이려 삭발을 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마치 무너지는 뉴욕의 빌딩을 향해 달려들어가는 소방관들처럼, 가족들마저 내다버린 병자들을 돌보는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을 때는 다 좋은 친구같지만 어려울 때가 되면 가짜는 떠나가고 진짜만 곁에 남습니다. 고난의 때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좋은 시절에는 다 잘 믿는 것 같지만 고난을 겪어보면 가짜는 흔들리고 의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사명으로 살아가는 진짜 믿음은 인내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견디며 끝까지 남습니다. 
코로나의 광풍으로 두려워 떠는 이웃을 믿음과 평안으로 위로하는 이가 사명자입니다. 고통받는 중국과 한국,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이가 사명자입니다. 거짓뉴스와 비난과 원망을 멀리 하고 정확한 사실에 기반하여 판단하고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사명자입니다.
코로나가 아니라 그보다 더 한 어떤 세상의 광풍도 주님의 평안과 사명으로 무장하고 전진하는 성도를 쓰러뜨리지 못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광풍은 머잖아 주님의 크신 이름 앞에 무릎 꿇고 고요하고 잠잠하게 될 것입니다. 광풍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광풍 가운데서도 주님의 평안을 누리는 사명자가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