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5 광풍에 대처하는 자세 / 눅 13:1~5

20200315 광풍에 대처하는 자세 / 눅 13:1~5

눅 13:1-5/광풍에 대처하는 자세 

200315 주일설교 코로나사태2
광풍을 마주한 성도
교우 여러분, 오늘도 코로나19 사태로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십니까? 현재 1,200여 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한 미국은 뉴저지주를 포함하여 23개주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습니다. 세계보건기구 WHO는 세계적 대유행 판데믹을 선언하였습니다. 뉴저지주에도 15명의 확진자가 발생하여서 교우 여러분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줄 압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이 위기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지난 주에 우리는 광풍을 잠잠케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광풍을 맞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광풍 속에서도 두려움이 아닌 믿음과 평안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도 코로나의 광풍을 맞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광풍을 직면하여 우리가 가지기 쉬운 그릇된 태도와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각각 살펴봅니다. 
 
희생자를 품는 강함
먼저 위기의 때에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그릇된 태도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로마총독 빌라도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을 학살한 사건과 예루살렘의 실로암 연못에 있던 망대가 붕괴되어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은 두 재난을 소재로 합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이 사건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지내러 온 순례객들을 빌라도 총독이 학살한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런 재앙에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그 재앙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 갈릴리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불행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어느 시각장애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이런 태도는 두 가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불행은 죄로 인한 것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입니다. 둘째는 이 불행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왜 책임질 죄인을 찾으려는 것일까요? 죄인을 찾아 비난함으로써 누군가를 원망하고픈 욕구를 채우는 것이 첫째이고, 또 이를 통해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안도감을 느끼기 위함이 둘째입니다.  
바로 이것이 위기의 때에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가장 나쁜 태도입니다. 그것은 바로 탓하는 것입니다. ‘불행의 탓을 돌릴 희생자를 찾는 것’입니다. 가정에 위기가 찾아오면 화목하던 부부가 서로를 비난합니다. 직장이 어려워지면 사장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직원들이 원망스럽고 직원들은 대우를 충분히 해주지않는 사장을 욕합니다. 스포츠팀이 지면 감독이든 선수든 누군가를 향해서 날선 비난이 쏟아집니다.
냉정하게 위기를 분석하고 극복의 길을 찾는 것과 탓할 희생자를 찾는 것은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전자는 이성적이라면 후자는 야만적입니다. 전자는 문제를 해결하지만 후자는 문제를 더 키울 뿐입니다. 전자는 모두를 살리지만 후자는 모두를 죽입니다. 무엇보다 후자는 혐오와 차별, 멸시를 낳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목요일에 맨하탄에서 20대 한인 여성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피해자 오모씨는 맨하탄 34번가 한인타운의 한 건물에 들어서려는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흑인 여성들 중 한 명이 왜 마스크를 쓰지 않았냐며 욕을 하고 주먹으로 얼굴과 어깨 등을 가격하였습니다. 오모씨는 턱이 탈골되어서 병원치료를 받고 가해자는 경찰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 후 동양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울 희생자를 찾는 태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 죄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죄와 불행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기에 무조건 불행의 원인을 죄와 죄인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않아도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나 괴로운 당사자나 그 부모를 죄인으로 만들어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폭력인지를 꼬집으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에서도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눅 13: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불행을 당한 것이 다른 이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불행을 당한 것만으로도 그 자신이나 가족들은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정죄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도려냅니다. 죽기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이런 혐오와 멸시의 시선입니다. 
이번 사태 초기에 전 세계 사람들이 중국을 향해 비난을 쏟아놓았습니다. 야생동물을 먹는 식습관을 거론하며 멸시를 퍼부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진정되던 확산세를 다시 키운 대구사람들과 신천지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쏟아졌습니다. 신천지의 그릇된 행태는 바로 잡아야 하고 잘못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면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짐승보듯 혐오하고 욕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인이 동참해서는 안 되는 태도입니다. 그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있음을 믿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비이성적 행동도 재앙과 불행, 위기를 만나면 할 수 있는 것이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잃고 혐오와 멸시가 시작되고 폭력과 무질서가 위기의 때에는 발생하는 것입니다. 독재자들은 대중의 이런 두려움과 혐오를 이용해서 희생자를 만들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이란 바로 이런 위기의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빠져 이성을 잃고 비난할 희생자를 찾을 때 믿음과 평안을 잃지 않고 희생자들을 오히려 감싸고 돕는 것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힘입니다. 이런 믿음의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세상을 치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겸허함
위기의 때에 피해야 하는 것이 남탓하는 태도라면 위기의 때에 가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겸허함입니다. 예수님은 재앙을 만난 것이 누구의 죄냐는 질문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은 재앙을 만나거든 다른 이들을 탓할 생각을 버리고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겸허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늘 품어야 하는 자세입니다. 성숙은 늘 자신을 돌아보는 겸허함의 결과입니다. 자신은 늘 높이고 타인은 늘 탓하는 교만은 미성숙 그 자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감당할 사명에 대해 알려주시자 베드로는 요한의 사명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뭐라 답하셨습니까?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요한)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요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타인을 탓하는 것도, 시기하는 것도 모두 미성숙의 증거일 뿐입니다. 성도는 그저 자신이 누린 복으로도 감사감격할 뿐이요, 자신의 정결함만 구하기에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 이들이라야 비로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코로나의 광풍은 우리에게 남탓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외치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의 무엇을 돌아보아야 합니까? 
첫째는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마치 신이라도 된 듯 기고만장합니다. 우주선 몇 개 쏘아올렸다고 마치 우주를 정복이나 한 듯 여기지만 인간이 흔적이라도 묻힌 곳은 전 우주에 비한다면 태평양 전체이 비해 한쪽 해변의 모래안 하나 만큼도 미치지 못 합니다. 과학을 발전시켜 못하는 것이 없는 초인이 된 듯 여기지만 우주의 신비, 생명의 신비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의학이 발전하여 영원히 살 것처럼 두려움이 없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하나에 전 세계가 패닉에 빠져버리지 않습니까?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입김이 한 번 훅 불어온다면 우리의 생명도, 문명도, 이 우주도 햇살 앞의 아침안개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얼마나 무절제하게 살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발병초기 과학자들은 왜 박쥐가 갖고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들에게 퍼지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과 떨어져 깊은 숲속에 살던 박쥐들이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갈 곳이 없어서 인간들의 마을에 출몰하면서 바이러스가 전파될 기회가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서식지 파괴로 인한 야생동식물과 인간의 충돌이 가져오는 재앙은 사실 이것 뿐 아닙니다. 이런 재앙은 우리 인간이 지구를 얼마나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있는지, 한마디로 약탈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1996년 캐나다의 경제학자들이 개발한 생태발자국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 얼마만한 자원을 사용해야 하는가를 계량화한 것입니다. 이 지수로 계산해 보면 전 세계인이 한국인처럼 살려면 지구가 3.5개 필요합니다. 미국인처럼 살려면 4.8개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인이나 미국인처럼 살게 되면 지구는 진작에 자원이 바닥나 폐허가 되고 자원이 있던 풍요롭고 아름답던 땅은 하늘 높이 쌓인 쓰레기장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자원을 쓰고 쓰레기를 만들어내는가를 고발합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e.f.슈마허라는 경제학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작을 남겼습니다. 현재와 같은 성장지상주의 경제는 환경파괴와 인간성파괴라는 파국을 피할 수 없기에 재생가능한 경제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의 주장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작지 않게 울려옵니다. 
한국과 미국 모두 더 많이 벌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소유하는 삶을 성공적이라 여깁니다. 슈마허같은 선각자의 주장을 모르더라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런 삶은 한정된 자원을 가진 지구를 더 빨리 고갈시켜 파괴하는 방식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첫인간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지구를 무분별하게 착취하고 파괴하는 삶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지구를 모두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평화로운 공존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삶, 절제와 자족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난 주에 저는 여러분에게 광풍을 보지 말고 주님을 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타인을 보지말고 자신을 보라고 말씀드립니다. 코로나의 광풍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결국 고요하고 잠잠해질 것입니다. 문제는 이 광풍의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남탓과 혐오와 비난을 버리고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아 한걸음 더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이들은 이 광풍마저도 선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보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