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19-24/어디서 예배하는가
200322 주일설교 코로나사태3
온라인예배도 괜찮은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지금 우리 교회는 48년 역사에 처음으로, 아마 대부분의 교회가 그러하겠습니다만은, 오직 온라인라이브로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팔팍 2부 시간인 8:30과 오클 4부 시간인 11:30에 각각 팔팍과 오클랜드에서 라이브로 온라인예배를 드립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이 시간에 교회홈피링크와 유투브를 통해 라이브로 온라인예배에 참여하실 수 있고, 부득이하게 이 시간에 맞추지 못 하시는 분들은 10시 이후에 올라가는 예배전체영상을 언제든 플레이하셔서 예배영상을 보시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온라인라이브예배를 드리는 것이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렇게 드리는 것이 제대로 된 예배인가, 예배드린 것 같지가 않다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온라인예배기간이 길어지면 교회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염려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면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이 일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아시게 될 겁니다.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시다가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납니다. 그녀를 전도하시던 중에 예배장소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요 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우리 조상(사마리아인)들은 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유대인)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시온산)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서로 자신들의 종교적 성지인 세겜의 그리심산과 예루살렘의 시온산이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는 예배의 자리라고 주장하며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주장 모두가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요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장소는 참된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질은 예배의 때라는 말입니다. 그 때는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님이 오셔서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임하실 때입니다. 그 때가 되면 비로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 참된 예배란 어떤 것입니까?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성령님과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구약시대에 그토록 중요하던 예배의 장소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예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참된 예배자는 두 가지 구속에서 해방을 얻습니다. 성도는 무엇으로부터 해방을 얻습니까?
교회란 무엇인가
그 첫째는 건물입니다. 참된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라 여기는 생각에는 예배당이 교회라는 등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건물은 말 그대로 예배드리는 장소일 뿐 교회 그 자체가 아닙니다. 흔히 교회 간다고 하면 예배당 건물에 가는 것으로 압니다만 이는 편의상 쓰는 표현일 뿐 본질적으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약의 사람들은 성전이라는 제사장소 그 건물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성전을 지었고 사마리아인들은 세겜의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어 각각 하나님을 모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가 시작되며 교회는 이런 믿음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이 깨달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행 7: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느니라.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이사야) 선지자의 말한바 (행 7: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온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데 어떻게 그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연합, 성도들의 공동체 곧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성령님은 성도 안에 거하시므로 성도 개개인이 곧 성전입니다. 우리가 흩어져 각각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예배당에 모여 교제하며 예배하는 데에는 말할 수 없는 큰 유익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매주 모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부득이한 사태를 직면하여 이렇게 온라인예배를 한시적으로 드린다고 하여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예배를 도우시고 받으십니다.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성도가 곧 교회이고, 성도의 연합이 곧 교회입니다. 온라인예배를 드리시면서도 참된 성도의 연합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연합을 지키려 애써야 합니다. 건물을 세울 것이 아니라 성도의 연합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건물을 세우기 힘쓰는 만큼 교회의 연합을 세우려 애쓰지 않습니다. 교회성장연구소에서는 새가족이 교우들 5명만 친구가 되면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새가족들이 교회에 왔다가 그 다섯 명의 친구가 없어서 다시 교회를 떠나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존 교우들의 무관심도 큰 몫을 하지 않을까요? 옆자리에 누가 앉든 관심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 가든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가족이 예배에 좀 와서 뭐가뭔지 몰라 아무 자리에나 앉았는데 누군가 와서 톡톡 두드리며 여기 내 자리니 비켜주세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누군가 또 와서 또 비켜주세요 해서 옆으로 옆으로 옮기다보니 제일 뒷자리 밖에 앉을 데가 없더랍니다. 다음 주에는 교회 나오고 싶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한국 대구에서 코로나사태가 불어지면서 신천지가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신천지의 교세가 24만 명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큰 개신교단이 몇 개 없습니다. 어떻게 이들은 이렇게 성장했는가? 그들의 전도방식을 여러 언론에서 취재해 보도했는데 기가막힌 방법이 많았습니다. 불교신자 한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전도자와 바람잡이 그리고 가짜 스님 역할을 하는 멤버 등 예닐곱 명이 팀이 되어 몇 달을 작전을 짜고 실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옳지 않은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제가 놀란 것은 한 사람을 전도하고 그들을 훈련시켜 신천지 교인이 되기 위해 그들이 기울이는 노력입니다. 과연 우리는 죽어가는 영혼 전도에 이런 관심이 있는지,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지 돌아볼 때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심산이냐 시온산이냐가 무의미한 것처럼 예배당이냐 온라인이냐도 진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성도의 연합이며 성령 안의 예배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하나됨을 지켜나가며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어떤 환경에서 예배하는가
둘째로 환경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사실 한 곳에 모이지 못 하고 이렇게 흩어져 예배하는 것이 초대교회 예배의 원형에 더욱 가깝습니다. 2천 년 전 교회가 예루살렘의 어느 집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을 때 당연히 교회건물, 예배당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고 그런 상태가 거의 3백 년 가까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렸을까요? 사도행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들은 초기에 안식일 즉 토요일엔 성전에, 안식 후 첫날 즉 주일과 평일에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의 박해와 AD 70년 성전파괴로 더 이상 성전에 모일 수 없게 되자 주일에 집에서만 모였습니다. 수 천명이 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초대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다 집에 모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소그룹으로 나뉘어 집집마다 모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4세기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건물의 유무, 편리함의 유무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참된 신앙은 가장 극심한 상태에서까지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만듭니다. 빌립보에 선교하러 간 사도 바울은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 박해와 고난도 그들의 예배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행 16:23) (바울과 실라를)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인권이라곤 없는 시대답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무지막지한 매질을 당해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됩니다. 횃불을 들지 않으면 눈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둡고 인분 악취가 진동하고 흉악범과 쥐와 벌레가 버글버글하는 깊은 지하감옥에 그것도 두 발을 나무로 된 기구에 단단히 묶인 채 갇힙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 터진 상처를 치료받는 것,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는 것… 꿈도 못 꾸는 사치가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인간이 예배할 수 있을까요? 에어컨만 제대로 안 나와도 땀이 나서 예배에 집중을 못 하겠고 파킹만 좀 불편해도, 옆자리 앉은 이가 조금 무례하기만 해도,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왠지 짜증이 나서 예배드리기가 싫어지는 우리라면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무엇을 합니까?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고 그 분을 높이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맞다면 바울과 실라는 지금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잘 조직된 찬양대가 없어도,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의 설교가 없어도, 에어컨과 히터가 적절한 온도를 조절해주고 좋은 음향시스템과 스크린이 없어도 그 깊고 캄캄한 어둠 속의 감옥은 로마의 그 어떤 으리으리한 성당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예배당이 됩니다. 천군천사의 찬양대가 노래하고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고 그리스도의 성령이 예배를 받으시는 곳, 참된 교회가 됩니다.
참된 예배는 장소나 환경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을 바울과 실라의 예배는 보여줍니다. 오늘 코로나 사태로 인한 이 불편한 예배환경은 어쩌면 그 동안 우리가 드려온 예배가 참된 것인지, 우리의 신앙이 진짜였는지를 확인해주는 계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이런 불편을 이겨내지 못 한다면 바울과 실라가 이겨낸 핍박을 이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할 것이 틀림없고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저 교양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가짜였음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바울과 실라처럼 참된 믿음으로 이겨내시고 참된 예배를 올려드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