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7 이렇게 기도하지 마라 / 마 6:5~8

20200517 이렇게 기도하지 마라 / 마 6:5~8

마 6:5-15/이렇게 기도하지 마라

200517 산상설교18
40일 금식기도 2회
오래 전에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한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분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는 부자연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이 불편함의 정체가 뭘까 의아하던 참에 그 분이 주신 명함을 받아보고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명함 뒷면에는 그 목사님이 몸담고 계시는 여러 단체에서 맡은 직함이, 무슨 모임 회장, 무슨 모임 고문 등으로 빼곡이 적혀 있었는데 거기에 굵은 글씨체로 40일 금식기도 2회라는 문구가 눈에 확 띄었습니다. 일단 4일도 어려운 금식기도를 40일씩이나,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하셨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 할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걸 보란듯이 명함에 적어놓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말그대로 보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오 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적어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가 아닙니다. 기도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위선자의 기도를 피하라
우리는 다시 산상설교로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 6장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경건훈련인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을 차례로 언급하십니다. 이런 의로운 실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2주 전에는 이 중 먼저 구제를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두 번째인 기도에 관해 가르치시는데 오늘은 피해야할 잘못된 기도, 다음 주는 드려야할 모범적 기도를 각각 살펴봅니다. 잘못된 기도의 예로 두 가지를 제시하시는데요, 그 첫째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외식한다는 단어의 원뜻은 연극을 한다는 것입니다. 연극은 실제가 아니라 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기도는 실제 기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 정오 그리고 저녁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회당을 방문하여 기도하였고 기도의 자세는 서서 손을 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을 방문할 사정이 안 되면 있는 장소에서 기도하도록 하였기에 다른 일을 하다가 시간이 되면 멈추고 그 자리에서 서서 기도하였던 것인데요,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그 시간에 큰 거리를 서성이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읊으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잘 지키지 못 하는 서민들은 바리새인들을 보며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보실 때는 연극일 뿐 실제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실 상, 기도의 응답과 영적 성숙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자신의 만족감으로 이미 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앞서 그 고통스러운 40일 금식기도를 두 번이나 해내신 목사님이 만약 명함에 적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한 것이라면 죄송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아, 배고파… 하지만 내가 견뎌내면 경건한 목사라는 훈장을 달겠지… 한번도 아닌 두번이면 어지간한 목사는 흉내도 못 낼 경지가 아닌가…’ 생각만 해도 저도 배가 고파오고 국밥이라도 한 그릇 얼른 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기독교인이 그 분만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교훈을 주신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얼마나 자주 그런 외식에 빠지는지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 모임에서 공개적 기도를 할 때 얼마나 자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의식하는지요! 우리의 봉사, 헌금, 배려, 희생이 얼마나 자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는지요! 밤하늘의 빛나는 찬란한 별들도 보잘것없는 빛이지만 눈앞에서 번쩍이는 네온사인 아래서는 보이지 않듯 전능하신 하나님도 곁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요! 연약한 인간인 이상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의식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은밀한 기도를 드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6절입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은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참된 기도는 오직 하나님만 계시는 은밀한 곳에서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공중기도가 잘못되었거나 필요가 없단 뜻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영적 허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참된 기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갚으십니다. 기도에 응답하시고 영적 성숙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동거하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시야에서 사람들을 치워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은밀한 기도, 참된 기도를 드리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신을 지치게 만드는 기도
두 번째로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경계하십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방식입니다. 7절입니다.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이 뭘까요? 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기도를 보십시오. 
(마 26: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게셋마네의 이 기도를 보건대 그건 아님이 확실합니다. 그럼 길게 기도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역시 예수님입니다.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무조건 짧게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중언부언으로 번역된 헬라어 ‘밧톨로게오’는 더듬는다는 밧토스와 말이라는 로고스의 합성어입니다. 말을 더듬다, 반복하다는 뜻인데 나중에는 ‘주문처럼 의미없고 쓸데없는 말을 반복해서 많이 하다’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중언부언의 좋은 예가 왕상 18장의 갈멜산 대결에 나옵니다. 엘리야 와 맞선 두로와 시돈에서 온 바알의 선지자들은 어떤 식으로 기도합니까? 
(왕상 18:26) 그들(바알의 제사장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 (왕상 18: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왕상 18: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말을 소리지르고 반복하고 춤추고 안 되니까 자해까지 합니다. 에베소에서 바울 일행이 만난 이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행 19:34) 그들(에베소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메가스 에페시오스 아르테미스!’ 이 문장을 주문처럼 2시간이나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주문이나 문장을 쉬지않고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신께 기도하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들의 기도를 가리켜 ‘신들을 지치도록 만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왜 이렇게 중언부언을 길게 하는 것일까요? 7절은 그 이유를 ‘말을 많이 하여야 신이 들으실 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 여러분이 보험업 세일즈맨이라고 합시다. 여러분을 신뢰하고 좋아하고 호의적인 고객과 여러분에게 무관심하고 의심하고 심지어 싫어하는 고객 중 누구에게 더 말을 많이 해야 합니까? 전자는 몇 마디 할 필요가 없겠지요. ‘아, 김과장이 추천하는 상품이면 무조건 들어야지.’ 후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많은 말을 해야 합니다. ‘글쎄요, 선듯 마음이 내키지 않네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래도 그가 계약을 해줄지 말지 확신할 수 없지요. 
자, 이방인들은 왜 신들에게 말을 많이 해야 들을 것이라고 믿는지 이해되시죠? 그들이 아는 신들은 모두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신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그들을 좋아하지 않고 때로 화가 나있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신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달래고 자신의 필요를 이해시키고 호의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을 많이 하고 설득하고 얼르고 달래고 큰 희생을 드려서 거래라도 하고 안 되면 자해해서 협박이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이란 반복하거나 길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도, 바른 믿음도 없어서 신을 달래고 협박하고 거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믿음없는 기도 일체를 가리킵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
그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8절입니다.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성도들은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어떤 스토커보다 더 큰 관심으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마 7:11입니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성도는 우리의 필요를 속속들이 아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들입니다. 이렇게 전지하시고 참으로 선하고 너그러우신 하나님을 알고 믿는 이들은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지치고 질리게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기도는 담대하고 간결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꾸며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실수가 없으시고…’ ‘야, 다 안다. 짧게 해라, 짧게…’ 쉴새없이 반복해서 하나님을 윽박지르거나 질리도록 떼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렇게 무한반복하면 방언이 터집니다~ 따라하세요~ ‘야, 숨넘어가겠다. 나, 어디 안 간다.’ 무언가를 약속해서 하나님과 거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에만 살려주시면 이제 딴 짓 안 하고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겠습니다.’ ‘십일조 받고 응답 콜?’ 하나님을 협박할 필요도 정말 없습니다. ‘안 들어주시면 저 죽어요. 정말 죽어요.’ ‘내 아들아, 정말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겠니? 널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준 내 사랑을 못 믿겠니?’ 
하나님을 바로 알고 신뢰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점점 예수님의 그것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바로 뒤에서 당신을 본받아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기도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사람에게 보이려는 위선자의 기도, 믿음 없이 두려움으로 드리는 이방인의 기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만 바라보는 은밀한 기도,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기도입니까? 은밀한 기도, 믿음의 기도를 드리시는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