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4 이렇게 기도하라 / 마 6:9~15

20200524 이렇게 기도하라 / 마 6:9~15

마 6:9-15/이렇게 기도하라

200524 산상설교19
기도하는 사람들
벌써 20년 전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어느 섬을 방문할 일이 있어서 시골마을의 전통가옥을 개조한 여인숙 같은 숙소에 머물렀습니다. 매일 아침 꽤 이른 시간인데 여주인이 나와서 방방마다 문 앞에 손바닥만한 풀을 깔고 음식을 조금 올려놓고는 그 앞에서 손을 모아 진지하게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로 치자면 새벽기도 같은 시간일텐데 아마도 토속신에게 그 날의 안녕을 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경건해 보이던지 저도 같이 합장하고 기도할 뻔 했습니다. 며칠 머무는 동안 본 바로는 힌두교 지역인 그 동네가 얼마나 종교적이든지 가는 곳마다 사원이 있고 항상 지나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의 열정으로 치자면 우리 기독교인이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모두 기도를 합니다. 전 세계 인구 중 단 14%만이 자신을 무종교인이라고 생각하니 종교를 가진 86%는 그 어느 신인가에게 기도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서구 무종교인 중에서 빠르게 늘고 있는 뉴에이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의 기운을 흡수한다는데 넓게 보면 이것도 기도나 다름없다고 생각됩니다. 전혀 기도를 하지 않던 이들도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신에게 호소하거나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하곤 합니다. 저도 믿지않는 친구들로부터 기도부탁을 자주 받곤 했습니다. 
 
뜨거운 기도와 바른 기도
이렇게 다들 기도를 하는데 그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빠짐없이 다 들으실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정성은 헛수고가 아닙니까? 참 하나님이 아닌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도 헛일일테고 참 하나님을 향하였더라도 바르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도 헛 일이 되고 맙니다. 기도의 열정이나 진실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셀폰을 열거나 잠긴 현관문을 열려면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느냐가 아니라 정확한 번호를 눌렀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가 하늘문을 여는 것이기에 셀폰이나 현관문을 여는 것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기에 앞서 바른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바른 것보다 정성이 더 중요하다면 지난 주에 살펴본 이방인들의 기도야말로 쉬지않고 부르짖고 춤을 추고 자해까지 하는 기도이니 하나님이 들으셔야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기도를 피하고 바른 기도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주기도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으로서 우리 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 거의 모든 교회가 고백합니다. 주기도문은 위치로도 마태복음 5, 6, 7장으로 구성된 산상설교의 한 가운데인 6장에 있지만 내용으로도 산상설교 전체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주시는 이유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의미인 동시에 이것을 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성도의 기도의 모범이자 뼈대입니다. 우리가 이 기도문의 정신을 이해하고 기도하고 구하며 살 때 우리의 기도와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산상설교에 순종하게 됩니다. 저도 개인기도를 시작할 때 주기도문을 제일 먼저 고백하고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벌써 8년 전인 2012년에 6주에 걸쳐 주기도문의 각각의 기도문을 한 주씩 다루는 연속설교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2주에 걸쳐 좀 더 포괄적으로 주기도문의 정신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은 두 가지 피해야 할 기도방식에 대해 가르치신 후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를 이어서 가르치십니다. 9절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첫 구절은 예수님이 앞문맥에서 가르치신 피해야 할 기도와 정확히 반대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위선자의 기도와 달리 제자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이방인과 달리 제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다 아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선하신 아버지이심을 믿으며 기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했으나 예수님처럼 그 분을 친밀한 분으로 여기지는 못 했습니다. 감히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두려운데 아버지라고 부르다니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십시오.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은 당신이 경험하고 계시는 그 친밀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제자들도 그들의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나에게 선하신 이 아버지 하나님은 너희에게도 선하신 아버지가 되신다. 그것을 믿고 그 자비로우신 분께 나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친밀하신 아버지께 나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시간에 이런 아버지를 만나고 계신지요? 기도시간마다 이런 아버지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경험하고 고백하시게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럼 간구의 내용을 도표로 살펴봅니다. 먼저 세 가지 간구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네 가지 간구가 이어지는데 모두 우리의 필요입니다. 이 기도문의 배열이 가르치는 것은 제자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6장 결론부에서 다시 강조하십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구하시리라.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필요만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일지언정 제자의 그것은 아닙니다. 제자의 기도도, 제자의 삶도 하나님의 영광이 더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세 가지 기도문을 살펴 봅시다. 첫째입니다. 
(마 6:9)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원주이십니다. 주님의 창조의 능력과 구원의 은총을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그 가치에 합당한 대우 즉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장악한 세상에서 반역과 불순종의 죄인들에 의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오히려 모욕을 받았습니다. 
(겔 36:23) 여러 나라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일로 가슴이 아프고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님이 모욕을 받아도 견딜 수 없이 아픈데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무시당하고 교회가 조롱당하고 거룩한 진리가 발에 밟히는데 내 몸이 편하고 내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니 잠이 잘 온다면 정말 우리가 그 분의 자녀일까요? 자녀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가장 먼저, 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기도문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마 6:10)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이 땅은 죄와 악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법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고통을 당하듯 죄와 악의 바이러스가 온 세상에 퍼진 판데믹의 무법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착취와 억압과 폭력과 미움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법이 지켜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다스리는 나라가 서고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셋째 기도문 역시 같은 간구입니다. 
(마 6:10)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교만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이 정말 화가 나고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너져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잠이 안 오고 괴로워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오기를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죄와 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워 구원받기를 기도하며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천국 백성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돈 벌고 집 사고 건강하고 행복하고 소원을 이루는 모든 것보다 우선순위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합니까? 그렇지않다면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우선순위가 아니라면 우리의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바른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 대구사람들은 가까운 경산에 있는 유명한 갓바위부처님께 기도하러 가곤 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는 한 시간 버스를 타고 가서 산을 올라 부처상 아래서 기도하고 또 한 시간을 버스를 타고 오는데 아침 일찍 나서도 점심 나절에야 돌아오신다는 겁니다. 이러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3년 내내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3년이란 시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아들 대학입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간절함과 정성으로 따지자면 그 기도에 비할 기도가 있겠습니까만은 그 기도는 오로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갓바위 부처님의 영광도, 그 분의 법도, 그 분의 뜻도 아니라 오로지 내 자식 잘 되는 것, 우리 집 잘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기도일지언정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기도가 갓바위부처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본질상 그 아주머니의 기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기도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참 자녀의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