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4 왜 일용할 양식인가 / 마 6:11

20200614 왜 일용할 양식인가 / 마 6:11

마 6:11/왜 일용할 양식인가

200614 주일설교 산상설교20
더 많이 잡아라
지중해 연안은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합니다. 겨울이면 추운 북유럽에서 지중해의 이런 기후를 즐기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남유럽을 찾습니다. 눈부신 햇살이 부서지는 스페인의 한 해안에서 어느 어부가 자신의 작은 배에 비스듬히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었답니다. 지나가던 북유럽의 관광객이 그를 보고 말을 걸었습니다. ‘이보시오, 뭘 하고 있소?’ ‘아, 보시면 모르겠소? 오늘 잡을 물고기를 다 잡아서 쉬고 있답니다.’ 의아하다는 듯 관광객이 말합니다. ‘아니, 해가 중천인데 벌써 일을 마친단 말이오? 널린 게 물고기인데 더 잡지 않고?’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물고기를 더 잡으면 돈을 더 벌지 않습니까?’ ‘더 벌면요?’ ‘그러면 배를 사고 사람들을 고용해서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지 않소?’ ‘더 많이 잡으면요?’ ‘그러면 공장을 세워서 물고기 통조림을 만들어 더 많은 돈을 버는 거요.’ ‘더 벌면요?’ ‘그러면 당신은 더 이상 고기잡이를 하지 않고 이런 바닷가에 누워서 편히 쉴 수 있는 거요.’ ‘이보쇼.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요? 난 이미 바닷가에 누워서 쉬고 있어요! 그런데 바닷가에 누워서 쉬기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니 제 정신이요?’
놀 줄 모르는 북유럽사람과 낙천적인 남유럽사람들의 모습을 풍자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이 이야기는 오늘날 현대문명이 사람들을 쉬지 못 하도록 몰아부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을 고발합니다. 세상은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고 행복하기 위해 쉬지않고 일해야 한다고 밀어부칩니다. 욕망을 무한히 추구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우격다짐합니다. 그 압박을 거부하는 이들을 패배자, 부적응자라고 조롱합니다. 이 거짓말에 속은 우리들은 우리가 패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더 큰 집, 좋은 차, 성공과 지위를 얻으려 몸부림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영혼은 병들고 지쳐갑니다. 우리를 구원할 신비한 주문은 어디 없을까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주님의 기도문의 한 구절입니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왜 일용할 양식인가
주님의 기도문은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한 후 후반부에서 우리의 필요를 구합니다. 우리의 필요는 다시 육의 필요와 영의 필요로 나뉘는데 육의 필요는 딱 한 가지 기도문으로 요약됩니다. 인류 대부분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이 기도문을 이해하는데 가장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 미국인들과 미국을 모델로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인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앞서 어부에게 왜 더 고기를 잡지 않느냐고 물었던 관광객처럼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일용할 양식인가? 일 년 살 양식을, 아니 기왕이면 10년 살 양식을 구하거나 평생 살고도 남아서 자식에게 물려줄 양식을 구하지 않고 왜 일용할 양식만 구한단 말인가? 하나님이 인색하셔서 하루치 밖에는 주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인가?
미국과 한국처럼 무한욕망추구를 찬양하고 보장해주는 사회에 살기에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이의 기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이해하지 못 한다면 우리는 이 기도문의 앞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도 없으려니와 이 기도문의 뒤에 나오는 영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 역시 드릴 수 없습니다. 무한한 욕망을 구하는 기도가 다른 모든 기도를 우리의 기도와 삶에서 밀어내 버리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더 많은 양식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기에
첫째 이유는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의 문제는 늘 밥을 남기는 것입니다. 엄마는 더 먹으라고 밥이고 반찬이고 잔뜩 담아주면 늘 아이들은 다 못 먹는다고 남깁니다. 오빠나 동생밥을 뺏어먹는 일도 없고 남은 밥이나 반찬을 아까워하는 법이 없고 몰래 자기 방으로 가져가 내일 아침에 먹어야지 하고 숨겨두는 법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단 한 번도 엄마가 쌀 떨어졌으니 오늘은 굶어야 한다고 해 본 적이 없고 늘 밥, 반찬을 주되 부족함 없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라면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겠지요. 늘 배가 고프고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기에 보이는 대로 먹을 것을 끌어모아 쌓아두어야 할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풍요롭고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이들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라 늘 부족함 없이 채우시는 아버지의 아들, 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하여 먹을 것을 쌓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고아처럼 살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쌓아두며 살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6장 후반부에서 이 점을 예수님이 지적하십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교훈을 출애굽 후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배웠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그 날 먹을 만큼의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다음 날 먹을 것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다음 날에 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부족함 없이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출 16장입니다. 
(출 16: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다음 날) 아침까지 그것(만나)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출 16: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왜 사람들이 모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까지 만나를 쌓아두었을까요? 노예근성이 남아있어서입니다. 늘 배고픈 노예는 내일도 먹을 것이 생길지 확신하지 못 하니 쌓아두어야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부족함없이 먹이시는 신실하신 아버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웃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니까
일용할 양식만 구하는 둘째 이유는 나 뿐 아니라 이웃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넘어 10년 양식, 100년 양식을 쌓아놓는 동안 우리 곁에서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이웃들이 생깁니다. 
세계기아인구는 지난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했지만 최근 기후변화와 무력분쟁 등으로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메리 로빈슨은 기아인구가 2015년 7억 8천만명에서 2018년 8억 2천만명으로 증가했다고 보고합니다. 아직 지구 위에 사는 인류 열 명 중 한 명 이상은 매일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잠자리에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과 같은 빈곤국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과 미국에서도 배를 곪는 이들은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식량이 부족해서일까요? 프란시스 라페의 책 ‘굶주리는 세계’는 오늘날 전 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 곡물, 육류, 생선, 우유 등을 포함한 일인당 2kg이 넘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식량자원을 생산하고 있다는 통계를 제시합니다. 이는 사람을 순식간에 비만에 걸리게 하고도 남을 만큼은 많은 양입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들조차도 자신들의 국민들을 모두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을 여전히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굶주립니까? 자원이 소수에게 독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 하는 이들은 100년, 1,000년 심지어 10,000년이 지나도 다 못 먹을 만큼의 양식과 자원을 독점하고 여전히 더 끌어모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끌어모으는 동안에, 아니 정확히 말해 빼앗는 동안에 빼앗기는 이들은 굶주림의 늪을 벗어나지 못 합니다. 
남아도는 양식에도 불구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버려두는 구조와 질서는 불의합니다. 불의한 구조와 질서를 바꾸는 일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바로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 하는 한 그들이 만드는 구조와 질서는 결코 굶주리는 이웃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과속을 하면 도로 주변의 집도 나무도 산도 들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내가 달릴 도로만 보게 되지요. 그렇지않으면 사고가 납니다. 규정속도로 달려보십시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볼 여유가 비로소 생깁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이들은 이웃의 배고픔이 눈에 들어옵니다. 만족하지 못 하는 이들은 10년 양식을 모을 때까지 이웃은 보이지 않습니다. 모으고 나면 보일까요? 그 땐 또 여러분 귀에 속삭이는 음성이 들립 겁니다. 100년 양식, 1,000년 양식을 모은 사람도 있는데 겨우 그것 가지고 불안하지 않겠어? 마귀의 음성에 속지 않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해야 하니까
일용할 양식만 구하는 마지막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 년, 만 년의 양식을 쌓아놓으면 이웃은 죽어도 나와 내 자식은 산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왜 일어났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갑자기 생긴 신종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늘 박쥐와 같은 야생동물들 몸에 살았습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계발로 야생동물들의 서식지가 파괴되니까 그들이 인간과 접촉할 기회가 늘어났고 그 결과 밀림 속 깊은 곳에 있어야 할 바이러스가 인간세계로 넘어온 것입니다. 
자연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습니다. 이 거위는 매일 아침 황금알을 하나씩 낳아서 주인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잘 살던 주인이 어느 날 바보천치등신모지리 같은 생각을 합니다. 매일 하나씩으로 만족이 안 되니 거위배를 갈라서 한꺼번에 수십, 수백개를 가져서 더 큰 부자가 되어야겠다. 배를 갈라보니 수십, 수백 개는커녕 한 개도 없었고 거위가 죽어버려 더 이상 하루 한 개의 황금알도 못 얻어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면 자연을 필요이상으로 계발하거나 착취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은 자가회복력으로 다음 날에도 다음 해에도 다음 세기에도 다음 밀레니엄에도 모든 인류가 먹고살기 부족함이 없는 자원을 인간에게 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6년 동안 농사를 짓고 나면 7년째는 땅도 놀리라고 안식년을 법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땅의 지력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바보천치등신모지리같은 주인입니다. 절대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않고 한 번에 백 년, 천 년, 만 년치 양식을 얻어내려 합니다. 안식년은커녕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지구 구석구석 쓸 수 있는 땅은 모조리 파헤치고 뒤집어놓고 벌목하고 착취하고 파괴하여 배를 갈라 죽입니다. 지구의 자연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기후변화입니다. 비교할 수 없이 규모와 횟수가 커지고 늘어난 산불과 지진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농지의 사막화와 밀림의 파괴입니다.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창궐입니다. 지금 인문학자와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대로 가다가는 현 세대가 지구의 마지막 인류가 될 지도 모른다는 담론이 퍼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바이러스가 퍼진 지구가 폐허가 되는 공상과학영화를 보며 저런 세상이 오겠나 했는데 지금 우리 현실이 그 공상과학영화와 뭐가 다릅니까? 과학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앞으로 더 빈발할 것이라 주장합니다. 오늘날 공상과학영화는 자원고갈과 이상기후로 폐허가 된 지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과연 불필요한 기우일까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 하면 결국 인류는 살아남지 못 할 것입니다. 지구는 모든 인류를 먹여살리고도 남을만큼 풍요롭지만 단 한 사람의 욕망도 채우지 못 할 만큼 작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고 이웃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이렇게 오늘도 기도드립니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