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3 반석 위의 집 / 마 7:24~27

20200913 반석 위의 집 / 마 7:24~27

마 7:24-27/반석 위의 집

200913 산상설교29
행위인가 믿음인가
지난 여름에 ‘비유를 통해 방문하는 하나님 나라’란 제목의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공부 내용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처럼 선한 행위를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왔습니다. 그러자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선한 행위를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믿음을 가져도 선한 삶이 없다면 구원을 얻지 못 하는 것입니까?’
‘믿음을 가져도 선한 삶이 없다면 구원을 얻지 못 하는 것인가요?’
아마 이것은 개신교 목사가 가장 많이 반복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여러 번 질문을 받았고 설명을 해왔습니다만 여전히 받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입니다. 왜 이 문제는 늘 알듯 모를듯 알쏭달쏭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설명하는 저나 듣는 교우들이나 그 때마다 이해가 새로워질 만큼 이 구원의 문제가 깊은 신비인데 반해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충분히 깊지 못 하기 때문일 겁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를 위해 오늘 조금 더 깊이 구원의 신비라는 우물을 파보고자 합니다.
믿음의 바울과 순종의 예수님?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성도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서 의로움에 이른다는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과 중세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등을 통해 오늘까지 개신교의 핵심 가르침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정작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표현이 거의 없습니다. 반면 선한 행위를 얼마나 강조하시는지 모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의 길을 묻자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켜행했냐고 되물으셨고 다 지켰다고 답하자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한 율법사가 역시 영생의 길에 대해 묻자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가르침 어디에도 ‘영생의 길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표현은 없고 ‘선한 행위를 실천하라, 율법의 가르침을 순종하라’는 말씀만 반복하십니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반복하시는데 그 중 하나가 오늘 읽은 본문말씀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
본문은 산상설교의 결론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면 마태복음 5-7장에 이르는 본문을 30주에 걸쳐 전한 산상설교의 시리즈 설교가 마침내 끝납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마치시며 마지막으로 건축자의 비유를 들어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잘 이해하면 순종과 믿음, 행위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귀한 통찰을 얻습니다.
암석지대가 많은 팔레스틴에서는 집을 지을 때 당연히 암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시온산 위에 지은 예루살렘 성전도 암석지대 위에 세웠습니다. 건축의 첫 단계가 바위를 파서 기초를 단단하게 박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집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지만 대신 수고와 시간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작은 집의 경우 암석지대 대신 요단강가나 갈릴리 바닷가 같은 곳에서 물이 실어온 흙이 쌓인 곳에 땅을 파고 기초를 놓아 집을 짓기도 합니다. 이 경우 돌을 깎지 않아도 되니 수고와 시간이 당연히 적게 듭니다. 문제는 요단강물이 범람하거나 갈릴리 바다의 태풍이 해변을 치는 경우입니다. 흙에 기초를 세운 집은 금방 기울어지고 허물어집니다. 반면 암반 위에 기초를 놓은 집은 당연히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례를 인요하셨습니다. 24절입니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믿음과 순종
반석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모래는 당연히 불손종입니다. 비바람은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 지키는 이라야 심판을 견디고 그렇지 못 하면 심판을 피하지 못 하고 무너져 내린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앞서 했던 질문이 또 떠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종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은 여기서도 순종을 해야 심판을 견디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네요.’ 이 의문은 비유 속의 집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바로 풀립니다. 집이 바로 믿음을 가리킵니다. 순종의 반석 위에 세운 믿음은 심판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불순종의 모래 위에 세운 믿음은 심판 앞에 무너져 내립니다. 순종은 믿음이란 집의 기초입니다. 순종은 믿음이란 나무의 양분입니다. 동시에 순종은 믿음이란 나무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순종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허상이고 믿음 없는 순종은 위선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모두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바른 태도를 묘사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해 믿음, 순종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사용하셨습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요 21:15) …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믿음, 순종 그리고 사랑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바른 태도를 가리키는 다른 용어일 뿐 같은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믿음으로 구원받고 순종으로 축복받는다’고 설교하신 기억이 납니다. 이것은 믿음과 순종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는 오해입니다. 순종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만 받고 순종까지 하면 축복도 받는다는 식의 순종 없는 믿음이 가능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실천 없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듯 말입니다.
이신칭의의 의미
그럼 사도 바울은 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그렇게 강조했습니까? 그것은 초대교회의 선교방향을 놓고 사도들과 대립하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주장 때문입니다. 이들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과거 그들이 집착하던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 하였고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율법을 다 지켜야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했습니다. 이 갈등이 사도행전 15장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교육되어 익숙하지만 이방인에게는 낯설기만한 율법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거운 짐일 뿐 아니라 복음의 정신과도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요구하지 못 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 후에도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고 바울이 세운 이방인 지역 교회를 방문하여 율법준수를 요구하고 바울과 그의 가르침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반박으로 기록된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입니다. 정확히 말해 바울이 공격한 것은 선한 행실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이데올로기 즉 율법주의였습니다. 어거스틴과 마틴 루터는 바울의 이 이신칭의를 해석하기를 율법주의처럼 모든 종류의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가르침을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바울도 어거스틴도 루터도 선한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지 선한 행위 자체의 중요성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서신은 항상 전반부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찬양하고 후반부는 그 은혜를 입은 성도의 순종을 강조합니다. 선한 행위는 은혜를 입은 자들의 삶에 열리는 열매입니다. 믿음은 순종의 반석 위에 세워지는 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는 동시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실재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여전한 영지주의
오늘날 현대교회에 믿음을 순종과 별개의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팽배한 것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믿음을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정, 개념, 결단으로만 이해하고 순종, 행위는 그와 별개의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초대교회부터 이단으로 정죄된 영지주의의 영향입니다. 그들은 헬라어 그노시스(γνῶσις) 즉 신령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구원의 길이라 여기고 일상에서의 삶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도덕적 삶은 아무 상관없이 신령한 지식만 습득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노시스(γνῶσις) : 신비한 지식, 깨달음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무슨 신비하고 오묘한 지식을 가르치십니까? 선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 결과로 온통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살도록 가르치지 않으십니까?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배우자에게 정결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사회 속에서 빛이 되고 돈을 거룩하게 쓰라고 가르치지 않으십니까? 믿음은 곧 순종의 삶 그 자체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을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때문에 그를 의롭다 여기셨습니까?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믿음 때문이지요. 그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였더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 증명된 믿음입니다. 그냥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고 행함은 없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의 사도 바울이라 불리는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한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선한 행위 없이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이를 좀 더 풀어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참된 믿음 없이) 선한 행위로만은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선한 행위 없는 (거짓 믿음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순종의 반석 위 믿음의 집
믿음은 순종의 반석 위에 세운 집입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잘 듣고 순종하는 자의 믿음이라야 심판의 태풍을 이겨내고 견고히 섭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무리 화려한 미사여구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들 심판을 견디지 못 하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믿음의 집을 세우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집은 모두 심판의 풍파를 거뜬히 이겨내는 순종의 반석 위에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