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0 놀랍고 놀라운 분 / 마 7:28~29

20200920 놀랍고 놀라운 분 / 마 7:28~29

마 7:28-29/놀랍고 놀라운 분

200920 산상설교30
파스칼의 하나님

162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블레이즈 파스칼은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작가 그리고 발명가 등 한계가 어디인지 모르는 그의 천재성은 어린 시절부터 빛을 발했습니다. 11살 때 ‘음향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첫 논문을 쓴 그는 12살 때 삼각형의 내각의 총합은 180도라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제를 증명합니다. 16세 때 쓴 논문 ‘원추곡선론’은 파스칼의 정리라는 이름으로 수학교과서에도 실려있습니다. 18세에는 회계사인 아버지를 돕기 위해 톱니바퀴를 이용한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를 만들었습니다. 23세에는 대기의 압력의 실체를 증명하였습니다. 이런 천재를 타고 났으니 일반인이 경험하지 못 한 놀라운 발견과 발명의 경험이 분명 많았을 테지만 그 스스로 인생의 가장 놀라운 경험으로 꼽는 것은 다름 아닌 성령세례였습니다.

31세 때인 1654년 11월 23일 저녁 10시 30분부터 다음날 새벽 0시 30분까지 약 두 시간 동안 그는 뜨거운 성령세례를 경험합니다. 그 경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는 너무 놀라고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놀라움과 감격을 종이에 적어두었다가 후에 양피지에 옮겨적고 그것을 자주 입던 옷 안쪽에 바늘로 꿰매어 두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후 발견되어 지금은 프랑스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의 글을 모아 사후에 팡세, 생각이란 뜻의 제목으로 발간한 책을 통해 그의 경험과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파스칼이 그 날 남긴 메모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과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확신, 감격, 평화,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놀라는 신앙
파스칼은 신실한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나 그 이전에도 신앙 속에서 살았지만 세속적 욕망도 놓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날 밤 성령세례를 통해 마음으로만 알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충격과 확신 중에 경험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헌신하는 삶으로 돌아섭니다. 주님의 존재와 섭리와 가르침을 말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함으로써 마음에 큰 확신을 가지는 것은 주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에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를 말로만 듣다가 직접 그 폭포 아래서서 막대한 수량과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웅장함 앞에서 서서 경이로움에 할 말을 잊는 것과 같습니다. 곰의 위험을 말로만 듣다가 막상 숲 속에서 곰을 딱 맞닦드렸을 때의 그 공포와 긴장과도 같습니다. 혹은 말로만 듣던 북극의 오로라가 눈 앞에 황홀한 장관으로 펼쳐진 것을 보았을 때 흥분과 행복감과 같습니다. 구구절절 아무리 말을 많이 들어도 그 앞에 직접 서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자동차 수리를 이론으로만 배우고 한 번도 분해, 조립해보지 않은 자동차정비사, 수술을 책으로만 배우고 해부 한 번 해보지 않은 외과의사, 아마존숲을 책으로만 읽고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아마존생태전문가를 누가 신뢰하겠습니까?
진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우는 과정에서 그 분의 임재와 능력을 실제 마주하는 경험을 하기 마련이고 또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때마다 놀라고 감격하고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인가
30주를 달려온 산상설교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설교를 마치시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마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니
그들이 놀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29절을 공동번역과 톰 라이트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마 7:29)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공동번역)
(마 7:29)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들의 서기관들이 하던 것과 달리 자기 자신의 권위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톰 라이트)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을 전한 모세와 그 율법을 해석했던 유명 학자들의 권위를 빌려서 가르쳤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고 어느 유명 랍비는 이렇게 말했고 또 어느 유명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는 식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들 자신에게는 그런 권위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느 유명 학자의 말도 빌어오지 않으시고 심지어 모세의 권위도 빌어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세보다 더 큰 권위를 인용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산상설교를 다시 돌아봅니다.
(마 5:21) (모세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마 5:27) (랍비들이)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모세가 이렇게 가르치고 유명 랍비가 이렇게 가르쳤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른다고 하심으로 당신을 최종적 권위로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리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자신을 유명 랍비들보다 심지어 모세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로 내세운단 말인가?’ 예수님의 이런 태도는 자칫하면 당시의 엄격한 유대교도들에 의해 신성모독으로 몰려 큰 해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무리들로부터 웃음거리로 조롱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을 저렇게 높인담? 정신 나간 인간 아니야?’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무리들은 그 지혜로 인해 감히 예수님을 조롱할 생각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알기로 하나님 외에 가장 권위있는 존재인 모세와 유명 랍비들을 능가하는 권위로 당신을 내세우는 예수님에 대해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토록 당당하게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지 놀라고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놀라우신 분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몰려든 무리들도 초기에는 예수님을 뛰어난 젊은 랍비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랬기에 지혜로운 스승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분의 가르침, 사역, 능력을 마주할 때마다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분은 뛰어난 지혜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없어. 그건 마치 바다를 물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것과 같아.’ 이런 일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막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막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막 6: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막 7: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귀신을 다스리고 장애인을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리고 지혜로 가르치고 바람마저 다스리시는 예수님에게 끊임없이 놀라던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마침내 그 분의 정체에 대해 결론을 내립니다.
(마 16: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는 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양을 똑바로 보고 눈이 부셔 피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없고 저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없고 저 끝없는 우주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며 덧없는 인생과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없듯이 비교대상이 없는 압도적인 예수님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놀라고 두렵고 또 감격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존귀하심 때문에 놀랍니다.
(히 3: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창조주)가 그 집(피조물)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우리는 또 그 분의 능력 때문에 놀랍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우리는 그 분의 지혜로운 가르침 때문에 놀랍니다.
(막 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무엇보다 이런 분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놀랍니다.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으로 인해 놀라는가
오늘 이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존재입니까? 그렇다면 30주 동안 살펴본 주님의 가르침을 결코 가볍게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에 놀라고 전능하심과 존귀하심으로 인해 놀라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인해 놀라서 그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의 돌비에 새기고 전심으로 순종하며 좇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러분은 놀라우신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신 적이 있는지요? 주님을 보고 놀라고 그 주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순종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