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7 참 믿음의 유사품 / 살전 5:16~18

20200927 참 믿음의 유사품 / 살전 5:16~18

살전 5:16-18/참 믿음의 유사품

200927 주일설교 코로나8
데이빗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46세의 데이빗 폰더는 대학졸업 후 회사중역이 되기까지 23년 동안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회사가 적대적 인수합병되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실직자가 됩니다. 1년이 넘도록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 했고 통장의 돈이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집모기지를 낼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실직 후 보험혜택을 잃어 희귀병을 앓던 딸아이의 치료비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집을 저당잡히고 차를 팔고 어느 고등학생이 몰던 중고차를 사서 새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겨우 동네 철물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어느 날 차에 짐을 싣는 일을 하는 도중 딸 제니를 데리고 병원에 들른 아내 엘렌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딸의 상태가 너무 위험해 당장 수술할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돈이 어디 있느냐며 아내와 다툰 후 전화를 끊고 나자 철물점 사장이 근무 도중 사적인 전화를 하는 직원은 필요없다며 해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길에 데이빗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실망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면 생명보험금으로 아내와 딸아이는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있는 힘껏 엑셀레이터를 밟았습니다. 그 순간 차가 길을 벗어나더니 거대한 참나무를 들이받았고 그의 의식은 거대한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듯 꺼져갔습니다.
소설가이자 방송인인 앤디 앤드루스가 쓴 ‘데이빗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The Traveler’s gift)’란 판타지소설의 앞부분입니다. 여러분이 코로나로 실직, 부도, 우울증을 겪고 계신다면 그의 이야기가 공감이 되실 겁니다. 요즘 인기있는 판타지 형식을 빌린 이 소설이 17주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이 주는 구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 애독자들 목록에는 기독교인도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도 이런 책을 좋아하고 또 이런 책의 메시지는 비슷한 형태로 개신교회 설교에 상당 부분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먼저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들어보십시오.
데이빗은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동안 시간의 블랙홀을 통과하여 아브라함 링컨, 안네 프랑크, 콜롬부스 등 역사 속 7명의 위인들을 만납니다. 각각의 위인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고난을 극복할 지혜를 하나씩 모두 7가지를 전합니다. 그 7가지 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 책임을 지라, 지혜를 얻으라, 행동하라, 운명을 개척하라, 행복을 선택하라, 용서하라, 물러서지 마라. 병원에서 깨어난 데이빗은 이 일곱 가지 지혜를 곱씹으며 자신이 처한 고난을 극복하리라 다짐합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이 7가지 지혜는 미국과 한국에서 쏟아지는 자기계발서의 주된 메시지인 긍정주의 혹은 긍정신학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계발서도 많이 읽고 설교에서도 이런 메시지를 많이 들어온 우리는 언뜻 이 가르침들이 성경적인 고난극복의 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많은 절박한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이런 책, 설교를 읽고 들으며 그런 처방을 붙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사실 이런 긍정주의는 고난극복에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기독교인에게는 오히려 큰 해가 되는 비성경적 메시지입니다. 언듯 들으면 하나같이 좋은 말인데 왜 해가 된다는 것일까요?
오늘 설교는 다음 주까지 2주에 이어하는 설교의 전편입니다. 오늘은 왜 긍정주의가 고난극복을 위한 성경적 메시지가 아닌지를, 다음 주에는 그렇다면 긍정주의가 흉내내고 있는 진짜 기독교적 구원의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설교합니다.
긍정주의, 사실 별 도움이 안 된다

첫째, 이런 긍정주의는 실제 고난을 극복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세포면역학 박사이면서 저널리스트, 사회비평가인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긍정의 배신’이란 책에서 그녀 자신이 유방암 투병을 하며 겪은 일과 연구자료를 소개합니다. 암은 축복이라고 외치며 유방암을 긍정적으로 극복하려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암 완치율을 비교한 결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뉴욕대학과 함부르크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가브리엘 외팅턴은 ‘긍정적 사고를 다시 생각한다’는 그의 책에서 20년간의 실험을 통해 ‘미래를 낙관하고 긍정적 태도를 고수하려는 사람일수록 통과해야 할 난관을 실제와 달리 이미 통과한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그래서 난관을 극복할 에너지를 얻지 못 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해 보아도 데이빗 폰더씨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면 어디선가 딸아이의 치료비가 나오고 연봉 높은 새 직장을 구하고 밀린 집 모기지가 해결될까요? 우리도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면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물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당장은 안 되어도 긍정적 태도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삶의 모든 면이 점점 개선되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상당히 마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습니다. 긍정적 태도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결국 모든 문제가 개선된다는 논리는 마치 온 마음을 다 하여 그것을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럼 긍정적 태도는 아무 소용이 없는 가짜란 말입니까? 저는 힘들 때 긍정적 태도로 용기를 얻은 적이 많습니다. 최악의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를 보며 격려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요.’ 네, 분명 긍정적 태도는 우리의 기분과 태도를 개선시켜 우울함과 걱정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바로 딱 여기까지가 긍정적 태도의 효과입니다.
비유하자면 긍정적 태도는 진통제와 같습니다. 암투병 중일 때 진통제는 고통을 줄여주는 고마운 약이지요. 하지만 진통제 때문에 암을 물리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수술이나 치료약 덕분입니다. 진통제의 효과가 좋다고 그것을 필요이상으로 의지하다가는 수술이나 키모시기를 놓쳐서 파국을 맞이합니다. 또 마약성 진통제 중독이라는 더 불행한 결과를 마주합니다. 긍정주의를 맹신하면 지금 미국과 한국사회가 처한 긍정주의 중독에 빠집니다. 진통제는 딱 진통제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써야 하듯 긍정적 태도는 의욕을 북돋우는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 긍정적 태도는 치어리더와 같습니다. 스포츠 시합에서 치어리더의 춤과 노래, 관중들의 열광은 분명 선수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동기부여를 더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단장과 코치가 새시즌을 준비하면서 예산을 선수들의 경기력보다 치어리딩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쓸까요? 아무리 치어리딩을 잘 해도 그것이 팀의 경기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공을 던치고 치고 공을 차고 달리는 연습을 게을리하며 치어리딩을 열심히 보고 동기부여를 받으면 이긴다는 주장이 얼토당토 않다면 고난극복을 위해 할 일과 개선할 문제들보다 긍정적 태도에 더 집중하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아닐까요?
긍정적 태도는 분명 유익합니다. 분명 때로 진통제가 되고 때로 치어리더가 되어 힘든 싸움의 고통을 견디게도 하고 격려도 해줍니다. 그러나 진통제를 과다하게 쓰면 마약중독에 이르듯 긍정적 태도를 절대화하면 긍정주의에 폐단을 겪습니다. 그 폐단 중 한가지가 이제 살펴볼 두 번째 문제입니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긍정주의의 두 번째 문제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도 돌려서 진짜 문제를 못 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데이빗 폰더가 시간의 블랙홀을 통과하여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가 폰더씨에게 말합니다. ‘자네는 지금까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하지 않았나? 내 말을 잘 듣게. 자네가 오늘날 이 상황에 내몰린 것은 모두 자네의 사고방식 때문이야. 자네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선택이 오늘날의 자네를 만든 걸세. 그러니 왜 하필 나에게냐고 하지 말게나.’
여러분이 코로나에 걸리고 실직을 하고 부도가 나는 것이 모두 여러분이 긍정적 태도를 가지고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의 허구성은 다음의 예만 생각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발생한 1만 명의 연합군 사상자를 생각해 봅시다. 장군들은 작전을 수립하는 단계에서부터 발생할 사상자를 계산하고 있었으며 그 대부분이 1차 상륙을 시도하는 해병대원들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바다 위 구축함에서 포를 쏘는 해군들은 희생된 이들이 없습니다. 그럼 해병대원들은 바다 위에 떠있던 해군들보다 더 부정적이어서 희생된 것입니까? 해군들은 긍정적 태도를 지녔기에 아무도 희생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의 잘못은 아닙니까? 평화와 조국을 지키기 위한 희생의 의미는 어디 간 것일까요?
고난은 인생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한 사람의 고난은 헤아리기 힘든 수백 수천가지 변수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그 고난의 책임을 긍정적이지 못 한 태도 때문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무지도 이런 무지가 없으며 희생자들에게 가하는 폭력도 이런 폭력이 없습니다.
가상의 트루먼의 입을 통해 저자 앤드루스가 하는 말이 오늘날 수많은 기업주들이 평소에도 또 특별히 대량해고를 하기 전후 동기부여강사들을 불러다가 직원들을 교육시키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당신이 해고당한 것은 모두 당신 자신의 책임이니 회사를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업주가 욕심을 부리다가 잘못된 투자를 하였거나 거액의 공금을 빼돌렸거나 직원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인수합병을 통해 큰 돈을 만지려했다거나 하는 것 따위를 문제삼지 말고 모두 자기 책임으로 여기고 곱게 나가고 살아남은 직원들도 입다물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긍정주의는 이런 폭력을 피해자에게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에 걸려 가족을 잃었어? 실직했어? 부도났어? 가정이 깨졌어? 방역에 실패한 정부 탓하지마, 주식은 치솟는데 약자들만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불평등한 구조를 탓하지마, 그런 불의를 바로 잡으려고 애쓰지마. 그냥 모든 게 네 부정적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일이나 해.’ 이것은 불의한 구조를 존속시키는데 총칼과 군대보다 더 효과적인 억압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참된 믿음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셋째로 긍정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해당됩니다. 그것은 긍정주의가 참된 믿음으로부터 성도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긍정주의가 표면적으로 믿음과 유사해 보이기에 교회의 가르침에 대단히 많이 섞여 들어와 있고 심지어 어떤 교회는 일년 내내 설교가 오로지 긍정주의 가르침으로 도배되다시피 합니다. 그러나 긍정주의는 믿음의 짝퉁이며 유사품이지 결코 진품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 언뜻 보면 긍정주의의 가르침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도대체 뭐가 다릅니까? 긍정주의도 행복을 택하라, 행동하라, 용기를 가지라… 또 기쁨과 기도, 감사도 가르칩니다. 뭐가 다를까요? 추구하는 바 목적이 다릅니다.
긍정주의의 목적은 고난극복 다시말해 고통, 슬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슬퍼서 견딜 수가 없어요. 너무 고통스러워요. 우울해요.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나요? 그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해. 그러면 그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거야.’ 이것이 정확히 긍정주의의 입장입니다. 긍정주의는 인간 자신을 위해 인간 안에 있는 태도와 용기, 결심이라는 인간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세속주의 가치관입니다.
반면 믿음의 목적은 고난극복, 고통해방이 아닙니다. 성도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슬픔을 벗기 위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아니며 우울함을 이기기 위해 감사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 과정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도가 힘이 되고 감사가 열매로 맺힙니다. 그 결과로 고난도 극복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 성령을 의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신앙입니다.
겉보기는 비슷해보이지만 바라보는 곳이 다르고 힘의 원천도 다릅니다. 성도가 세속적 긍정주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것은 참된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것이요, 생명의 길에서 그만큼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구원의 길은 긍정주의보다 훨씬 깊고 크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 구원의 길이 어떤 것인지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짝퉁이자 유사품인 긍정주의를 더 이상 좇지 않고 참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