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5 모름을 아는 지혜 / 요 1:29~34

20201115 모름을 아는 지혜 / 요 1:29~34

요 1:29-34/모름을 아는 지혜

201115 주일설교
모름을 아는 지혜
도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철학자 노자가 남긴 글을 ‘도덕경’이라고 부릅니다. 도를 다룬 도편, 덕을 다룬 덕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도덕경이라고 부르는 이 책은 총 81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71장의 제목이 ‘모르는 것을 앎’입니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知不知上(지불지상) 不知知病(부지지병)’
해석하면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로 아는 것이요, 알지 못 하는데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병이다’ 정도가 됩니다. 노자는 인간이 가장 현명할 때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닫는 순간이라고 강조합니다. 동양의 현자들만 이 지혜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서양철학의 아버지라 할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역시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As for me, all I know is that I know nothing.’
즉 ‘나로 말하자면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알 뿐이네.’ 이들 뿐 아니라 인류의 스승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늘 강조했습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진짜 지혜요,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진짜 무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무지한 사람입니까? 이 질문의 답은 제가 아니라 오늘 본문의 주인공 세례 요한이 해드릴 겁니다.
모름을 아는 세례 요한
오늘 본문의 시점은 지난 주에 읽었던,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조사단을 만난 다음 날입니다.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장소로 오시는데 성령이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봅니다. 그는 즉시 제자들과 대중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나보다 먼저 계시는 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 소개내용입니다. 자신이 세례운동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알지못했던 메시야에 관한 이 모든 놀라운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사람들은 얼마나 우러러 보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그 전날 조사단에게 보여주었던 겸손한 태도로 진실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사실 자신도 그 분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다는 것입니다. 31절과 33절을 보십시오.
(요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요한은 원래부터 진리를 아는 사람인양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지를 숨기려 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랬기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자신의 무지를 포장하지 않으려 할 때 정직해집니다.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이는 교만해집니다. 자신이 아는 척 하려는 이들은 진실되지 못 합니다. 교만하고 부정직한 사람은 주장하고 떠벌리고 과장하느라 길을 잃고 멸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자, 그럼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무지한 사람입니까? 아직도 잘 답을 모르시겠다면 요한이 진리에 이르게 된 과정을 들여다 보십시오.
참된 앎에 이르는 길
세례 요한은 세 단계를 거쳐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33절입니다.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하나님이 요한에게 메시야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계시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 단계는 31절입니다.
(요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그는 계시에 순종하여 세례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의 거친 삶과 종교지도자들의 감시와 저항을 직면하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32절입니다.
(요 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한은 계시받은 대로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실제로 봤습니다. 이 마지막 단계는 체험입니다. 요한은 첫째 예수님에 관한 계시를 받았고 둘째 순종하여 세례운동을 하자 셋째 실제로 성령의 임재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이 계시, 순종 그리고 체험이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구원자이시고 그 분의 말씀이 생명의 길인 것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안 것이 진짜 앎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앎은 그저 지식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용되지 않은 물감이요, 연주되지 않은 악보입니다. 물감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굳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악보라도 연주되지 않으면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부스러진 먼지가 될 뿐입니다.
모르는데 안다는 사람들
많은 이들이 세례 요한이 경험한 참된 지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고 착각을 합니다. 먼저 계시의 단계를 거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공부하고 배우지 않고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교회생활 삼십년에 주워들은 지식으로 자기만의 성경을 씁니다. 회 몇 조각 올리면 회덮밥이 되는 것처럼 자기 생각, 경험, 주관, 고집을 모두 섞어넣고 성경구절 몇 개 올리고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릅니다.
다음으로 순종의 단계를 거치지 않습니다. 계시의 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않으니 순종의 단계를 거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노래를 어떻게 부릅니까? 보지도 못 한 풍경을 어떻게 그립니까? 설계도가 없는 건물을 어떻게 짓습니까? 기독교인이라 자부하는 많은 이들이 악보도 없는 찬양을 부르고 보지도 못 한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설계도도 없이 생명의 집을 짓습니다. 하나님의 참뜻을 모르니 참된 순종이 될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체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할 고백이 없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의 영광 앞에 쓰러지든지 그 영광을 거부하고 원수가 되었습니다. 누가 물어도 지지하든 반대하든 예수님에 대해 확실히 할 말이 그들에게는 생겼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속에 계시는 분, 설교에 등장하시는 분 혹은 간증에 등장하시는 분이지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을 만지고서 멀쩡한 사람이 없듯이 성령의 불을 경험했다면 불타서 정결하게 되든지, 그 불에 타죽든지 둘 중 하나는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모신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이들이 타기는커녕 그을름조차도 영혼에 묻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 그럼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까, 모르는 사람입니까? 아직도 답을 못 찾으셨다면 세례 요한의 목소리를 좀 더 들어보십시오.
세사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선언합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성경은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되는 어린 양에 관한 풍부한 이미지를 들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심판의 천사를 피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은 대대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 유월절이 되면 어린 양을 잡아 만찬을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하시며 당신이 그 어린 양과 같이 희생되어 세상만민이 심판을 피하게 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직접 십자가란 제단에 올린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불의와 거짓을 버리고 참되고 진실한 회개의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피흘리기까지 죄와 악과 싸우는 거룩한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탐욕과 허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삼고 그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회개와 거룩과 제자의 삶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
또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이 그 위에 머무시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32-33절입니다.
(요 1:32) …성령이 …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3) …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번이나 반복되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다는 표현입니다. 구약의 왕, 선지자, 제사장들에게도 성령님이 때때로 임하셨지만 머물지는 않으시고 맡기신 사역이 끝나면 떠나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성령님은 오셔서 머물러 계셨고 떠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그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33절입니다.
(요 1:33)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예수님으로 인해 성령님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임하셔서 머물다 떠나가지 않으시고 항상 머물러 함께 계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그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말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명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임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할 때까지 성령 안에서 행하며 천국백성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이 기도와 전도와 순종의 삶이 없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이들입니까, 모르는 이들입니까?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주님은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는 분이요, 모든 자녀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우리의 무지를 겸손하고 정직하게 고백하고 세례 요한처럼 계시와 순종, 체험을 통해 참 그리스도를 아는 구원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