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2 감사가 없는 추수감사절 / 시 119:65~72

20201122 감사가 없는 추수감사절 / 시 119:65~72

시 119:65-72/감사가 없는 추수감사절

201122 추수감사주일
모든 것보다 귀하신 주님
중 3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브라이언이란 학생이 있었습니다. 오직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대를 졸업하고 뉴욕 유명증권사에 입사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연봉이 나날이 올라가더니 26세에 세계적 증권회사의 부사장이 되고 매년 수백 만 불을 벌었습니다. 대저택을 사고 수퍼카를 10대씩 수집해서 차고에 넣어놓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퇴사하고 투자회사를 차려서도 승승장구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고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한편 교만이 하늘을 찌른 그는 돈 버는 것이 제일 쉽다고 여겼습니다. 가난한 기독교인 친구를 만나면 조롱하고 설득하여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정작 내면은 점점 더 깊이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미국 오자마자 배우기 시작한 술과 담배, 마약을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즐기느라 그의 몸은 점점 병들어 갔습니다. 타고난 건강체질이었지만 20년을 넘게 술, 담배, 마약을 몸에 우겨넣었으니 만성피부염, 소화불량, 위산역류, 원형탈모, 종양 등으로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진통제를 20살씩 삼키고 담배를 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몸이 아프니 점점 짜증이 늘어 폭행사건을 감옥을 9번이나 드나들었습니다. 한 해에 교통사고를 19번이나 낸 적도 있었습니다. 우울증이 점점 심해져 자살충동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35세가 된 1994년 6월 17일 금요일 오후 차를 편의점 앞에 세우고 앉아있었습니다. 한 미국인 남성이 그에게 다가와 노방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No, 안 믿어요.’ ‘그럼 내가 당신의 손을 잡고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그 상황이 너무 싫었는데 이상하게도 입에서는 ‘Yes’란 답이 튀어나왔습니다. 그 전도자가 자신을 따라하라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보혈로 나의 죄를 씻어주시고 성령님이 저에게 임하게 해 주세요.’ 그가 떠나고나자 잠시 후에 이유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몇 시간 동안 울다 그치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몸에서 악한 영이 떠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놀랍게도 그 날로 그는 술과 담배, 마약을 깨끗이 끊었습니다.
그 주일부터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소명을 받고 신학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 후 그의 투자회사가 IMF로 부도가 나 전 재산을 다 날렸지만 그는 더 이상 돈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그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전하는 삶만을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몰랐을 때가 가장 불행한 때였고 모든 것을 잃었지만 예수님을 만났을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고백하는 브라이언 박 목사입니다. 그의 고백은 우리가 드려야 할 진정한 감사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돈과 성공과 건강과 명성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 믿습니다.
고난 중의 추수감사절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날의 의미는 가을추수기를 맞아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인데 올해 추수감사절은 많은 교우들께서 감사할 거리가 없다 여기지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판데믹을 맞아 매일 우울한 소식만 들려옵니다. 미국에서 매일 확진자가 20만 명에 육박합니다. 경제는 말로 할 수 없게 어렵습니다. 많은 이들이 실직하고 비지니스문을 닫고 수입은 반토막이 나고 가족, 이웃들이 코로나로 고통을 겪고 문 밖도 마음대로 못 나가고 사람들도 못 만나고 코로나 걸리기 전에 우울증이 걸려죽고 먹을 것이 없어 죽게 생겼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도 못 가고 친구도 못 만나고 불쌍합니다. 도무지 눈 씻고 찾아봐도 감사할 거리라곤 없는데 뭘 가지고 감사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탄식하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감사의 제목이 있다고 알려주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오늘 본문 시편의 기록자 시인입니다. 그는 무엇을 감사합니까? 71절입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앞뒤 문맥을 보면 고난으로 그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잃은 것 뿐입니다. 아마 돈과 건강과 사람과 명성을 다 잃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고난이 유익했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율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율례는 율법과 규례의 줄임말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영광과 성품과 구원역사를 아는 것이야말로 참된 감사의 제목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를 생명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를 때 그는 죄악의 길인 줄도 모르고 그리로 갔습니다. 고난을 통해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말씀을 보고 자신을 보고 그제서야 멸망의 길 위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멸망의 길을 떠나 생명의 길로 돌이켜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생명을 얻었기에 모든 것을 앗아간 고난이 오히려 유익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코로나 판데믹의 고난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진짜 감사의 제목입니다.
주님을 발견한 사람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세리장이란 높은 지위와 권력, 많은 돈으로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영혼의 큰 구멍이 나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채울 수 없는 구멍을 예수님을 만나서 채웠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발적인 손실을 경험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로마제국 치하의 세리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적지 않은 수탈을 해왔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것은 네 배로 갚겠다는 것은 그의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 잡겠다는 말입니다. 그는 회개하고 그 증거로 자신이 목숨 걸고 모아온 재산으로 뺏은 것을 갚고 또 구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단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고 뺏은 것을 네 배로 갚으면 남은 절반도 모르긴 해도 절반이상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림잡아 그는 재산의 4분의 3을 잃고 4분의 1만 남습니다. 여러분이 재산의 4분의 3을 한 순간에 잃는 일을 만난다면 얼마나 상심하겠으며 얼마나 큰 고난이겠습니까? 그런데 삭개오는 스스로 그런 고난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창세 전부터 계셨던 말씀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스도를 얻으면 다 얻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얻어도 그리스도를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고의 감사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
예수님을 얻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추수감사절에 우리가 바라는대로 돈을 번다면 그것도 감사할 일이고 건강하다면 그것도 감사할 일이고 자녀들이 성공한다면 그것 역시 감사할 일이지만 이 모든 것은 영원히 지속될 감사의 제목이 아닙니다. 돈은 얼마 지나지않아 사라질테고 건강 역시 마찬가지이고 자녀들에게 언제까지 좋은 일만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생명의 길을 가게된다면 이것은 영원히 지속될 감사의 제목이며,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감사의 제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힘든 고난의 시기에 맞는 추수감사절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면 참된 감사가 터져나올 수 있습니다.
최초의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던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1620년 9월 6일 102명의 영국의 청교도들은 혹독한 종교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목숨을 건 항해를 시작합니다. 두 달여 만에 그들은 지금의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닻을 내리고 신대륙에서의 척박한 삶을 시작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눈보라와 강풍을 동반한 혹독한 추위, 풍토병과 식량부족, 들짐승의 공격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이었습니다. 첫 겨울을 넘기지 못 하고 그들 중 절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신히 겨울을 넘기고 살아남은 이들은 봄을 맞아 거친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렸고 그 해 가을 자유의 땅에서 첫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결코 풍성하다 할 수없는 보잘 것 없는 수확물이었지만 그들은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며 하루 종일 찬양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을 도와준 원주민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어 먹었는데 원주민들이 들고온 칠면조는 이후 이 날을 기념한 추수감사절을 대표하는 요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예배하고 섬기는 신앙의 삶을 위해 영국에서의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신대륙의 가장 척박한 삶을 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소중한 분이 맞다면 비록 오늘의 추수감사절이 힘들고 지친 고난의 시간 중에 맞은 것이라 할지라도 감사의 이유를 찾기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여전히 감사의 이유가 차고 넘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말입니다.
“(찬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 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