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7 바람이 부는 것처럼 / 요 3:13~21

20201227 바람이 부는 것처럼 / 요 3:13~21

요 3:13-21/바람이 부는 것처럼

201227 주일설교/요한8/거듭남2
바람의 신
제주도에 가면 이른 봄에 하는 칠머리당굿이 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71호로 지정된 이 굿은 음력 2월 1일에는 바람의 신인 영등할미를 맞이하기 위해, 14일에는 송별하기 위해 각각 하루 종일 합니다. 이 굿에 참여하는 어업관계자, 해녀들이 바람의 신 영등할미를 영접도 하고 송별도 하며 달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주도 삶의 특성상 바람이 그들의 안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데 이 바람이라는 것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갈지, 얼마나 강하게 불지 고대인들에게 바람은 그야말로 신비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고대의 신화든 예외없이 바람의 신이 등장합니다. 그리스신화에는 서사시 오딧세이아에 등장해서 오데세우스 일행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준 모든 바람의 주인 아이올로스, 북풍의 신인 보레아스, 서풍의 신인 제피로스, 남풍의 신인 노토스, 동풍의 신인 에우로스 그리고 태풍을 의미하는 영어 타이푼(Typhoon)의 어원이 된 파괴적 바람의 신 티폰 등이 등장합니다. 다른 신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의 신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바람이 그만큼 신비롭고 예측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측불가능성
바람의 예측불가능성은 기독교의 구원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비유로 쓰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신비를 설명하시기 위해 바로 이 비유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읽었던 요한복음 3장 8절을 새번역으로 보십시오.
(요 3: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새번역)
바람의 임의성 즉 자신이 불고 싶은 대로 불기에 도무지 예측할 수 없음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세상에서는 행운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되 은혜로 베푸십니다. 이번에 신입사원 10명이 필요합니다, 공정한 시험을 봐서 커트라인을 넘는 사람들을 뽑겠습니다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여기서 저기까지 10분만 들어오세요, 다른 분들은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하는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순전히 사장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받는 사람이 아니라 베푸시는 주님의 뜻에 달린 문제입니다. 누가 받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받을 수 있을지 분류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도 받을 자격이 있다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율법을 지키며 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혹독한 꾸중을 듣고 평생 나쁜 짓만 하다가 사형당하는 우편 강도는 낙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먼저 태어난 에서가 아니라 발뒷꿈치 잡고 나온 야곱이 장자의 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선민이 유대인들이 버림받고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천국백성 된 것은 순전히 은혜요, 기적이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우리가 받은 선물을 이해하면 더더욱 이것이 은혜요, 기적이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생
지난 주에 우리는 거듭남이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 혹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얻은 생명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육체의 생명과 어떻게 다릅니까? 본문 15절은 그 생명을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영생의 헬라어 ζωὴν αἰώνιον(조엔 아이오니온)는 ‘시작과 끝이 없는’을 의미하는 아오니스와 ‘영적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가 어근입니다.
영적 생명이란 육체의 생명과 대비되는 것인데 흔히 사람들은 떠올리는, 몸이 없이 영체로 둥둥 떠다니며 살아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입고 있느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연합한 생명은 영적 생명이요, 하나님과 분리된 생명은 육의 생명입니다. 육의 상태에 있기에 영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이해하기 힘든 우리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생명현상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돌과 달리 나무가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움직이지 않는데 무엇이 다른가요? 돌은 부서질지언정 자라거나 영양분을 섭취하거나 배설하거나 자손을 낳거나 열매를 맺는 생명현상이 없습니다. 죽어있는 무생물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나무는 양분을 섭취하고 광합성을 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등 생명현상이 나타나기에 살아있는 생물로 분류합니다. 이런 생명현상이 영적 생명 조에에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입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영적 생명 조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영적 생명 조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런 열매가 없다면 그에게는 육의 생명 뿐입니다.
다음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혹은 영원한이란 의미의 아이오니스는 무슨 뜻입니까? 시작도 끝도 모두 시간을 설명할 때 씁니다. 현대과학은 시간도 공간처럼 하나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시간의 시작도 끝도 없다는 말은 이 시간이란 차원 밖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3차원의 공간, 4차원의 시간 너머 존재하는 상태를 아이오니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영생, 조엔 아이오니온은 어떤 생명을 의미합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거듭난 성도는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지만 이미 영적 생명 조에를 살기 시작하고 그 증거로 이런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삶은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에도 다른 차원에서 지속되고 마침내 새하늘과새땅에서 부활의 새 육체를 입을 때까지 계속 됩니다. 이런 생명을 하나님이 주시되 은혜로 거저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탄이라고 누가 나를 잊지않고 작은 카드 한 장만 보내주어도 고맙고 감사한데 온 우주의 주인께서 바닷가의 모래알갱이만도 못 한 나를 선택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이렇게 놀라운 생명, 영생, 조엔 아이오니온을 주시니 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은혜입니까!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하며 사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들으라 
그럼 하나님은 이 영생을 받아누릴 사람들에게 감나무 아래 누워 언젠가 떨어질 감을 기다리듯 구원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한 이들에게 이 은혜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선물을 줄지, 말지는 주는 이의 마음입니다. 받는 이가 선물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물을 준다면 그것은 순전히 호의에 의한 것이지 의무나 강요일 수 없습니다. 그 경우는 이미 선물이 아니라 대가가 됩니다. 반면 받는 이에게도 선택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물을 받을지, 거부할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선물을 거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순전히 은혜로 주시는 이 선물을 교만하게 거부하지 말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첫째는 들음입니다. 듣는 것! 11절을 보십시오.
(요 3:11) 진실로 진실로 네(니고데모)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이 구절에서 ‘우리’란 예수님 당신과 이후에 그 뒤를 따르게 될 제자들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증언을 바리새인들이 듣지 않고 있다고 고발하십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12-13절입니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즉 하늘 일 즉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영생과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증언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증언하였습니다. 교회는 그 증언을 받아 다음 세대에게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성탄선물로 리모콘으로 가는 조그만 자동차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잠시 가지고 놀더니 짜증을 냅니다. 이거 안 돼! 제가 보니까 리모콘의 버튼마다 기능이 있는데 얘가 막무가내로 누르니까 차가 제대로 안 움직이는 겁니다. 진리야, 메뉴얼 읽어봤니? 읽기가 싫으면 아빠 말을 잘 들어. 배터리를 넣어야 움직여, 이 버튼을 눌러야 전원이 들어와, 이걸 누르면 앞으로 가고 이걸 돌리면 방향을 바꿔. 짜증만 내지 말고 이 버튼들의 기능을 잘 알아야 이 장난감을 즐길 수 있어. 조그만 장난감 하나도 메뉴얼을 읽든 조작법을 듣든 배워야 하는데 하물며 육의 사람이 듣도보도못한 영생의 삶을 선물로 받는다면 그 삶의 원리에 대해 듣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어떤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는지, 어떤 희생을 치르고 그 길을 열어주셨는지 그리고 어떤 섭리로 그 영생을 우리에게 베푸시는지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믿으라
영생의 길에 대해 들었다면 다음으로 믿으라고 명하셨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늘의 일, 구원역사의 정수는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위에 매달아 그것을 바라본 독사에게 물린 백성들을 살린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매달아 그것을 바라보는 죄인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16절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이 구원방법에는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드러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고 시험을 치르는 것은 학생들을 괴롭히고 낙제를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실력을 쌓고 다음 학년으로 진학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과 같습니다. 아들을 매어다신 십자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흔히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의 메시지를 비판하기를, 착한 사람들을 예수 안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지옥에 보낸다면 그것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시험을 망치고 낙제하는 것이 스스로 초래한 일이듯 지옥도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그들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18-19절입니다.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그 정죄(심판)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 심판의 길에 머물기를 택한 것이며, 그가 심판의 길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는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불신의 어둠 속에 계속 머무는 것이 곧 심판의 길에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곧 믿음이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며 불신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했다는 증거입니다. 겸손히 은총을 받아들인 자는 영생을 누릴 것이며 교만하게 그 은총을 뿌리치는 자는 스스로 택한 멸망의 길을 벗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은총을 베푸시는 자에게 이 거듭남의 구원역사를 듣고 믿기를 명하셨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거듭난 사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예정하신 거듭남 곧 영생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이 영생에 대해 철저히 무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믿어서 거듭난 생명, 영생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그의 이후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 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말하되 (요 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그는 후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이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찾아옵니다.
(요 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초대교회 전승은 그가 초대교회의 중요한 일원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겸손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가 한이없으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혹 여러분은 오늘 어두운 밤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으셨는지요? 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남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