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왜 기독교인가 / 행 4:12

20211031 왜 기독교인가 / 행 4:12

행 4:12/왜 기독교인가

211031 기독교변증
1. 왜 기독교인가
얼마 전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이 있다는 것은 믿겠는데 그 신이 왜 기독교의 하나님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을 못 얻겠다. 모든 종교가 다 자신들의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기독교의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 오늘은 이 답을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2주 전 두 주 동안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이는 21세기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두 관문 중 첫째였습니다. 둘째는 ‘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인가’입니다. 첫째 관문은 넘었지만 여전히 둘째 관문을 넘지 못 한 이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왜 기독교만 진리라고 하느냐, 다른 종교도 다 자신들의 신이 참 신이라고 하지 않느냐, 기독교는 왜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관용하지 않고 배타적이냐’하고 비난합니다. 이런 비난이 과연 정당한지, 기독교는 왜 배타적으로 보이는지 생각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2. 왜 관용하지 않는가
먼저 기독교를 향한 비난이 정당한지를 생각해 봅니다. 여기 누군가가 기독교가 배타적이며 비관용적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비난의 근거는 ‘마땅히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겠지요. 이런 믿음을  상대주의라 부릅니다. ‘절대적 기준이란 없으며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믿음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여서 모든 종교는 상대적으로 옳으니 서로에 대해 관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기독교를 비난하는 그에게 똑같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타종교를 관용해야 한다는 당신은 왜 기독교만은 관용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하지 말라는 비난을 당신이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자신의 주장으로 자신이 모순에 빠지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상대적 진리일 뿐이고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면 이 상대주의 역시 상대적 진리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다른 믿음인 기독교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3. 왜 진리라 주장하는가
다음으로 기독교는 왜 자신이 믿는 바를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인이 타종교인에게 무례하면 당연히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믿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인가요? 앞서 언급했듯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 아닌가요? 만약 우리가 이슬람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무슬림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상대주의가 적용되는 영역이 있고 절대주의가 적용되는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문화를 평가할 때는 상대주의가 정당합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때로 무례하게 비칠지라도 솔직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동양에서는 조금 덜 솔직하더라도 무례를 범치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어느 것이 옳습니까? 모두 옳습니다. 상대적입니다. 서양인이 볼 때 동양인은 비정직해 보이고 동양인이 볼 때 서양인은 무례해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지,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더 옳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절대주의가 적용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생명과 인권의 영역이 그렇습니다. 지금도 인도에서 여성이 다른 계급의 남자와 결혼하거나 중동에서 여성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판단하면 가족과 동네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는 등의 잔인한 방법의 명예살인을 행합니다. 매년 5천 명이 넘는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이런 행위를 존중해야할 다른 문화일 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살인, 인신매매, 폭력, 학살, 납치, 성폭행 등 생명과 인권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판단할 때 우리는 상대적 평가를 하지 않고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슬람국가에 태어났으면 무슬림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슬람이 진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조폭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폭력범죄를 저지르며 자라난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럴 만한 상황이라고 해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도 절대주의가 적용됩니다. 2 더하기 2는 4이지 결코 5가 아닙니다. 우주왕복선의 궤도를 계산하는 과학자가 답이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으니 아무 거나 넣으세요. 둘 다 생각하기따라 옳은 것 아니겠어요? 그랬다가는 우주선 조종사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 하고 우주의 미아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수학의 공리는 입장에 따라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답일 수밖에 없고 그 믿음 위에서 과학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들은 상대적일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는 영역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서로 다른 상대적 영역이 있고, 옳고 틀린 절대적 영역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구원은 상대적 영역일까요, 절대적 영역일까요? 이것이야말로 가장 절대적 영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존중은 절대적 영역인데 생명구원은 상대적 영역일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다루는 신앙영역에서 ‘모든 믿음이 상대적이니 모두 존중하자’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치판단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로 보지만 이슬람은 결코 신이 아니라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봅니다. 예수님을 신으로 보는 믿음과 한 인간일 뿐이라고 보는 믿음이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2 더하기 2는 4인 것도 맞고 5인 것도 맞다는 주장과 같은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신앙을 비교해 보고 그 중 어느 것이 진리인지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전제군주제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였고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신분제도와 노예제도를 거부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믿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계속해서 무엇이 더 진리에 가까운지 탐구하고 발견해 가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어느 신앙이 더 진리에 가까운지를 판단하지 못 한단 말입니까?
4. 왜 기독교가 진리인가
자, 그럼 우리는 지금부터 너무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독교와 타종교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비교종교학자가 아니고 이 짧은 시간에 수많은 종교의 장단점을 다 비교해볼 수는 없으니 세계 4대 종교 중에서만 기독교와 타종교를 비교해 봅니다. 이 사이에는 비교불가한 수준의 차이점이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마치 어둠 속에 빛나는 별처럼 모든 종교 중에서도 그 진리됨이 찬란히 빛납니다. 그 중 가장 밝게 빛나는 가르침은 바로 구원에 대한 가르침 복음입니다.
타종교의 창시자들은 한결같이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가르쳤습니다. 이 말은 창시자들이 보여주는 구원의 길을 따라 신자들이 그 길을 가야했다는 말입니다. 이슬람은 마호메트가 가르친 대로 알라의 인정을 받도록 계명에 철저히 복종해야 합니다. 불교는 깨달은 자 부처가 가르친 대로 평생 수행을 통해 윤회의 굴레를 벗고 열반에 도달해야 합니다. 힌두교는 창시자가 없지만 불교와 유사하게 깨달음과 선행을 통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업을 쌓아야 합니다. 한결같이 인간인 창시자가 보여주는 대로 신자가 부지런히 노력하여 공을 쌓음으로 구원받은 만한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신자가 자력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에서 이를 묶어 자력구원종교라고 부릅니다.
반면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님은 당신이 구원의 길 그 자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십자가로 구원의 문을 직접 여셨습니다. 인간은 수행이든 선행이든 계명준수든 무엇을 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그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죄인인 인간에게 거저 주어집니다. 인간은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는데 거저 받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유일하게 타력구원종교라고 부릅니다.
5. 죄인마저도 구원하는 복음
이처럼 타종교와 기독교는 구원의 주체가 다릅니다. 타종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어내야 합니다. 신자의 헌신, 노력, 수준, 경력이 중요합니다. 그 요구를 충족하는 이들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그 은총으로 거저 주십니다. 신자의 헌신, 노력, 수준, 경력이 구원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능력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타종교에서 감히 구원을 꿈도 꾸지 못 할 우편강도, 창녀, 세리, 간음하다 잡힌 여인 같은 이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우편강도의 예를 봅시다. 온갖 악행만 저지르다 이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그는 이슬람에서건 불교에서건 혹은 힌두교에서건 심판의 대상일 뿐 구원 근처에도 가지 못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씻고 수행을 하거나 계명을 지키거나 선을 행할 기회가 없습니다. 창녀, 세리, 간음하다 잡힌 여인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면 구원을 감히 꿈도 꾸지 못 할 이들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가장 실패한 인생마저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인종도 국경도 성별도 빈부도 없고 우편강도같은 죄인조차도 가리지 않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죄 속에 살던 이들에게 복음처럼 구원을 주시는 메시지가 그 어느 종교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오늘날 전세계로 퍼져나가 진정 세계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6. 모든 이를 위한 복음
흔히 세계 4대 종교를 꼽을 때 가장 많은 기독교로부터 이슬람, 힌두교 그리고 불교를 꼽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분포한 지역을 보면 모두 지역종교입니다. 힌두교신자의 94%가 인도에 삽니다. 불교신자의 대부분은 중국과 인접국에 삽니다. 이슬람신자가 그마나 조금 퍼져있어서 중동과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와 인도네시아에 걸쳐 삽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슬람과 불교국가를 제외한 전 세계에 퍼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불교국가로 분류된 중국조차도 사실상 현재 기독교인이 1억명이 넘었으며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2030년에는 3억 명이 넘어 세계 최대의 기독교인구를 가진 나라가 될 것으로 봅니다. 가장 힘들다는 이슬람 국가에서조차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왜 기독교는 전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인종, 모든 지역에 전파되고 수용되고 있습니까? 복음이 가진 위대한 능력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신자들에게 신을 만족케 하여서 구원을 받으라고 가르치는데 오직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땅에 내려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사랑하셨고 마침내 구원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신의 아들이 부활하여 수많은 증인들에게 보이고 당신이 곧 구원이 되셨고 죄인들에게 그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오실 약속으로 죄와 악과 고난으로 신음하는 세상에 승리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그의 삶을 보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분이 약속한 성령님의 강림을 경험함으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 분을 통해 자신들의 삶에서 죄와 죽음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을 겪었고 우편강도처럼 영원히 멸망받은 죄인도, 사울처럼 그 분을 핍박하던 원수도 그 분의 이름 앞에서 죄와 악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경험이 그들에게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성경의 기록도, 사도들의 체험도, 복음전파의 역사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은 세상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이 전한 가르침과 비교할 수 없는, 보석처럼 빛나는 진리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이 증언을 듣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체험하고 나면 ‘기독교도 다른 모든 종교와 같지 않은가’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다른 종교와 같지 않습니다. 복음은 직접 체험되는 진리입니다. 복음은 직접 경험되는 구원입니다. 이 복음을 체험하셨습니까? 이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얻는 천국백성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