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3 위로와 소망이 되는 교회 / 롬 12:15

20210103 위로와 소망이 되는 교회 / 롬 12:15

롬 12:15/위로와 소망이 되는 교회

210103 신년첫주일 표어설교
무지와 광기의 교회
14세기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 혹은 페스트의 전파범위는 코로나보다 못 하지만 그 파괴력은 오늘날의 코로나와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은 보건의료지식이 없던 시절 흑사병에 걸리면 생존이 거의 어려웠습니다. 최소 7,500만 명에서 2억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하는데 당시 유럽인구의 3분의 1에 이릅니다. 유럽이 이 인구수를 회복하는데 200년이 걸렸습니다. 가공할 만한 전염병 재앙을 마주한 이들에게 당황한 중세교회가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교회는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을 진노케한 죄에 대한 심판이며 이 재앙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회개 뿐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부자들은 큰 돈을 헌금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아름다운 미술품으로 교회를 장식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으려 애썼습니다. 가난한 대중들이 택한 방식은 자기학대였습니다. 죄를 슬퍼하고 회개한다는 의미로 금욕과 고행을 택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채찍고행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옷을 갈아입거나 씻지도 않은 채 끼니도 거르고 아무 데나서 자며 사람들 앞에서 행진하며 채찍으로 자신들의 몸을 때리며 죄를 회개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지않아도 만연한 빈곤으로 영양실조상태에 있던 이들이 더 먹지 않아 면역력이 떨어지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생활하며 채찍질로 염증까지 생기니 쉽게 흑사병의 숙주가 되어 결과적으로 병을 더욱 퍼뜨리고야 말았습니다. 한편 교회는 하나님을 진노케한 죄인으로 대중들의 미움을 사던 소수자들을 지목했습니다. 유대인, 마녀,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과 학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무지와 광기가 지배하던 시기에 소수의 선각자들은 교회가 이런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나침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위로와 소망의 개혁자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죄인들이 흑사병을 피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독일의 일부 종교인들에게 반박하며 1527년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가(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라는 소책자를 발간했습니다. 두 명의 동생과 두 딸마저 흑사병으로 잃은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전염병조차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퍼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집에 불이 나면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타죽어야 합니까? 물에 빠지면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합니까? … 만일 누군가 불이나 물이나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는 기꺼이 뛰어들어 그를 구할 것입니다.”
그는 전염병을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날 우리가 들어봐도 대단히 합리적입니다.
“약을 먹고 집과 마당과 거리를 소독하십시오.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감염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400년 전 루터의 가르침을 아직도 이해 못 하는 한국교회가 많다는 사실은 무지와 오만은 정말 깨뜨리기 힘든 것이라는 점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는 고통을 겪는 이웃을 돕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이라고 이렇게 일깨웁니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하면 나는 언제든지 거절하지 않고 달려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신뢰해야 합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주고 죽기 전에 성찬을 베풀어 주는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돌보듯이 병자를 돌보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이러한 섬김은 의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행해야 합니다.”
루터의 주장은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를 무기로 무지와 편견, 두려움과 광기를 퍼뜨려서는 안 되며, 바른 믿음과 건전한 이성에 근거하여 전염병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고통을 겪는 이웃의 곁을 지키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와 같은 믿음을 가졌던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1520년 쮜리히에 흑사병이 돌아서 7천 명이던 인구가 한 달 만에 2천 명으로 줄어들자 가족들이 버리고 간 환자들을 돌보다 그 자신도 흑사병에 걸렸습니다. 두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 기적처럼 치유된 후 그는 역병가라는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먼저 죽음의 고통을 고백합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죽음이 문 앞에 왔습니다. 저를 죽이고 있는 이 화살을 빼주옵소서. 통증과 두려움이 저의 육체와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혀는 움직이지 않고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뜻이라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치유된 기쁨을 찬송합니다.
“하나님, 주님이 저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몸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제 입술을 주님을 찬양합니다. 죽음의 고통을 기억합니다. 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하늘의 상을 기대하며 세상과 싸울 것입니다. 오직 주님이 도우실 때 저는 완전해집니다.”
이 시대 교회의 사명
400년이 지났지만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로 23만 명이 죽는 재앙이 일어나자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휴양지에 몰려든 이들의 동성애와 성적 부도덕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라고 하여 고통받는 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온라인예배를 요청되는 시대에 일부 한국교회는 여전히 대면예배를 고집하며 바이러스 전파에 진원지가 되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을 내세워 두려움과 죄책감을 이용하여 대중을 통제하려 합니다. 일부 교회는 여전히 소수인종, 소수자들, 외국인들을 혐오하는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렇지않아도 재앙으로 고통받는 시대에 교회가 무지와 편견의 바이러스마저 퍼뜨려 더욱 고통을 더해서야 되겠습니까? 코로나 판데믹이 계속되는 2021년 교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까? 로마서의 이 말씀이 그 답을 주십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고통받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역할은 그들 곁에서 함께 울며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서 바닥난 포도주를 채워주셨고 사람들이 초청하는 잔치집에는 빠짐없이 가서 먹고 즐기셨고 바리새인 시몬의 집이나 세리장 삭개오의 집의 초청도 흔쾌히 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비난하곤 했습니다.
(눅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동시에 예수님은 우는 자들와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빠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눈물 앞에서 함께 우셨습니다. 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나인성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그 아이를 살려주셨습니다. 굶주리고 병들고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실 때마다 긍휼히 여기시고 먹이고 치유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동네마다 병들고 귀신들고 마음에 상처난 이들, 온갖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게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런 이들을 멸시치 않으신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고 이용당하고 착취당하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능력 있는 분이라도 그들이 긍휼히 여김받지 못 한다면 감히 예수님 앞에 몰려나오지 못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명백한 죄인조차도 정죄하시기 전에 먼저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기 전에 그녀를 위선자들의 돌팔매질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누운 38년 된 병자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기 전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경고하시기 전에 그를 먼저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긍휼 없이 심판을 선포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회개와 심판을 선포해야 할 때조차 잊지 않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심판은 긍휼 없이 선포되면 저주와 폭력이 됩니다. 진리는 항상 사랑과 동행합니다.
위로와 소망이 되는 교회
어김없이 새 해가 밝아 2021년이 시작되었습니다만 우리의 바람처럼 그렇게 빨리 판데믹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 모두들 전망합니다. 빨라야 여름, 늦으면 연말이 되어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현재의 고통을 당분간 더 견뎌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한 해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은 고통받는 세상을 향해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우는 자들 곁에서 함께 울고 고통받는 자들 곁에서 함께 고통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 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위로와 소망이 되는 교회’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가 이웃과 세상을 향해 주어야 하는 것이 저주와 정죄가 아니라 위로와 소망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회는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 쉬지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와 싸우는 미국정부와 한국정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의료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에 걸린 이웃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도록 기도해야 겠지만 이 사회의 코로나 상황이 빨리 종식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코로나에 걸린 이들을 정죄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과거 한 때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의인은 환란을 만나지 않게 지켜주시기에 병이나 재앙을 만난 이들은 죄인이라는 그릇된 가르침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린 사람에게 병문안을 가서는 ‘권사님, 혹시 회개할 것 없는지 생각해 보세요.’라고 해서 그렇잖아도 몸이 아픈 사람을 마음까지 아프게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코로나에 걸린 이들이 종종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바라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배려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한 아프리칸 어메리칸 의사가 코로나에 걸려서 죽기 전에 자신이 유색인종이라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았다고 호소한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유색인종, 소수민족, 빈곤계층에 훨씬 가혹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통계로 여러 차례 보도되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작년 초 코로나판데믹이 시작되면서 긴급푸드드라이브를 시작했습니다. 한 해 동안 매 주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60여 가정에 생필품과 쌀 등을 제공했습니다. 이 사역에 1년 동안 교우들께서 37,382불을 헌금해 주셨고 이 중 32,066불을 지출하여 현재 5,315불 정도가 남았습니다. 올 해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판데믹이 끝날 때까지 하려 합니다. 이와 별개로 코로나 판데믹으로 교회예산이 작년에 비해 크게 줄어 모든 부서 예산이 줄었지만 구제부 예산만은 늘여서 올 해는 다른 어느 해보다 긴급구제에 힘쓰고자 합니다.
나 한 사람의 힘은 자고 우리 교회 역시 부자가 아니니 이렇게 해본들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기적도 꼬마아이가 들고온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작은 것이지만 주님 손에 들고가면 주님께서 많은 이들을 먹이고 치유하고 살리는데 쓰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느 교우께서 지난 연말에 댁에서 구운 빵을 여러 교우들과 지인들의 집 문 앞에 두고 주님이 그 빵으로 그 댁의 교우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저 따뜻한 빵 한 덩어리일 뿐이지만 주님께서 그 빵을 사용하셔서 그 집에 외롭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살리는 데 사용하신다면 그래서 그 집의 지친 영혼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도록 사용하신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 한 구석이 그 교우의 빵 한 조각으로 더 환하게 밝아지는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뉴저지장로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 위로와 소망이 되는 202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