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8 객을 배부르게 하라 / 신 14:28~29

20210328 객을 배부르게 하라 / 신 14:28~29

신 14:28-29/객을 배부르게 하라

210328 종려주일 혐오범죄
늘어나는 혐오범죄 
오늘은 짧은 영상 하나를 먼저 보시겠습니다. <영상> 지난 17일 텍사스주의 한인이 운영하는 스토어에서 벌어진 아시안혐오범죄입니다. 전날인 16일 조지아주 아틀란타의 연쇄총격사건으로 한인 4명 등 8명이 숨진 사건도 들으셨을 겁니다. 뉴스를 통해 연일 이런 아시안혐오범죄소식이 보도됩니다. 우리 교인들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사건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런 아시안혐오범죄의 증가는 통계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시아태평양계혐오범죄신고센터인 비영리단체 Stop AAPI Hate가 내놓은 최신고보고서에 의하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국내 아시아계혐오범죄가 특히 급증했습니다. 팬데믹이 시작된 작년 3월 19일부터 지난 2월 28일까지 1년간  이 단체에 신고된 것만 3,795건에 달합니다. 내용을 보면 언어폭력이 68%로 가장 많고 따돌림이 20%, 물리적 폭력이 11%였습니다. 아시아계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 뉴욕이 발생빈도 1, 2위였습니다. 장소로는 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사업장이 가장 많았고 길거리, 온라인, 공원, 대중교통 순이었습니다. 이는 한 개 단체에 접수된 사건만의 통계이며 실제 벌어진 범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고 봅니다.
아시아계혐오범죄는 미국 뿐 아니라 서구사회 전체로 번지고 있습니다. 영국 런던경찰청은 작년 6-9월 동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가 222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95%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중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호주에서도 동아시아인들을 향한 혐오범죄가 크게 늘고 있으며 다른 서구권 국가들도 비슷한 보고를 연일 쏟아놓고 있습니다.
성경 속 혐오범죄
그리스도인이 혐오범죄를 거부해야 하는 많은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장 혐오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성경 속 혐오범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잘 보여줍니다. 두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의 악행을 확인하러 들어가 의인 롯의 집에 머물 때 소돔의 백성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두 나그네와 상관할테니 끌어내라고 협박하였습니다. 상관하다로 번역된 단어 ‘야다’는 성관계를 하다 혹은 폭력을 행사하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두 천사는 그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롯의 가족을 성으로부터 끌어내었고 성은 유황과 불이 쏟아져 멸망합니다. 소돔을 멸망으로 이끈 가장 무서운 죄로 흔히 소돔사람들이 두 천사에게 저지르려 했던 동성애를 꼽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죄는 그들 중에 들어온 약자이자 소수자인 나그네, 이방인들을 착취하고 폭행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와 이방인 폭행 중 어느 것이 더 큰 죄인지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 죄들의 언급횟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동성애를 뜻하는 남색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 총 5회 등장합니다. 그러나 객 또는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하고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은 40여회 이상 등장합니다. 단순 계산해도 8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신 14:28)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신 14:29)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매년 드리는 십일조 중 매 3년 째 십일조는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을 위해 쓰라고 하십니다. 이 중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 중 보호막이 없는 소위 취약계층입니다. 반면 ‘우거하는 객’은 외부에서 들어와 어울려사는 이들, 이방인들입니다. 오늘날 미국으로 치면 소수민족 혹은 유색인종이 그들입니다. 한국에도 요즘엔 주변국에서 들어와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선하게 대하면 하나님이 범사에 복을 주십니다. 반면 그들을 멸시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신 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 (출 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그러므로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시안혐오범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호히 혐오범죄에 반대하는 데에 앞장설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당연히 공권력은 법을 강하게 하고 범죄를 감시하고 신속하고 엄하게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를 발견하면 즉시 신고하고 시위나 시민운동 등을 통해 정부와 사회를 향해 반대에 동참하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실천이 있습니다. 그것은 혐오범죄라는 독버섯이 자라도록 만드는 혐오라는 토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독버섯은 제거해도 습한 땅이 그대로 있으면 또 자라납니다. 혐오범죄를 비난하고 처벌해도 혐오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면 잠시 주춤할 뿐 다른 대상을 향해 또다른 혐오범죄가 시작됩니다. 햇살을 비추면 독버섯의 포자가 말라죽듯이 이 세상에 은혜의 빛을 비추어 혐오를 녹여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빛을 보고 눈 뜬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실천입니다. 이 실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용서의 해독제를 뿌려라
첫째, 용서의 해독제를 뿌려야 합니다. 복수심을 갖지 말자는 뜻입니다. 연일 한인들이 테러를 당하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불의를 향해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의로운 분노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을 향하는 순간 복수심이 됩니다. 의분과 복수심은 다릅니다. 복수심을 품는 순간 우리는 독버섯에 양분을 더 제공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향해 분노하되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것은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 경험하고 아는 이들은 가능합니다.
(살전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마 5:44)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죄악을 미워하고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이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 8:11)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눅 23:34) …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 안의 혐오를 버리라
둘째, 우리도 혐오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혹 한인들이 백인에게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분개하면서도 또 다른 유색인종의 약점을 들어 멸시하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타당해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세요. 어떻게 무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백인들이 우리를 차별할 때도 비슷한 이유를 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혐오에 분노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을 향한 혐오에도 마찬가지로 분노해야 합니다. 우리는 혐오가 아시안이나 한인들을 향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든 혐오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혐오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을 향한 혐오는 괜찮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독버섯에 양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번 아시안혐오가 팬데믹을 초래한 중국탓이니 우리야 억울하지만 중국인들은 억울할 것 없다고 합니다. 첫째 이 주장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미국에 사는 중국인은 코로나를 퍼뜨린 데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제식민지를 겪었다고 하여 옆 집에 사는 일본인을 혐오하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까? 그가 식민지 통치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데 말입니다. 둘째 이 주장은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설사 코로나를 퍼뜨린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먼저입니다. 책임을 묻는 것도 합당한 분별과 절차를 통해야지 혐오와 테러를 쏟아놓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야만적입니다.
선동가들을 멀리 하라
셋째, 혐오의 포자를 퍼뜨리는 선동가들을 멀리 해야 합니다. 앞서 소개한 Stop AAPI Hate는 지난 10월 보고서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코로나19 확산 사태와 관련해 아시아계 주민에 대한 차별적 언사를 하는 정치인 중에서 가장 큰 전파자”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는 중국바이러스, 우한바이러스란 말을 반복하여 팬데믹사태에 지친 사람들의 분노를 아시아계를 향해 쏟아놓도록 했습니다. 그와 함께 혐오를 부추겨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이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뉴스를 퍼나르는 것은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혐오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버섯이 자라는 곳에 비료를 갖다 붓는 꼴입니다. 실제로 테러를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퍼뜨리라
넷째,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퍼뜨려야 합니다. 즉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혐오의 뿌리는 분노입니다. 사람들은 왜 분노합니까? 힘들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으로 갇혀 지내니 힘이 듭니다. 수입이 줄어드니 힘이 듭니다. 아프고 치료비가 너무 비싸니 힘이 듭니다. 학비가 비싸 진학이 안 되니 힘이 듭니다. 좁은 집에서 살기가 힘든데 고생해도 집을 살 수 없기에 힘이 듭니다. 분노는 어려운 현실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면 분노가 줄고 분노가 줄면 혐오가 줄고 혐오가 줄면 당연히 혐오범죄가 사라집니다.
실제로 범죄예방에는 강력한 경찰력이나 처벌법규보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통계연구가 많이 나와있습니다. 경찰력이나 법규강화는 일정수준까지 범죄억제효과가 있지만 그 이상이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반면 좋은 일자리는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더 큰 비율로 범죄가 줄어듭니다. 사람들이 일해서 정당하고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있으면 부상과 처벌의 위험을 무릎 쓰고 범죄에 뛰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흑인들이 더 많이 범죄를 저지릅니까? 교육과 취업, 성공의 기회에 그들에게 현저하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에 첫 흑인노예가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잡혀온 1619년부터 402년 동안 노예와 2등 시민으로 살며 백인들로부터 모든 면에서 착취와 억압,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4백년 동안 그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미국사회가 법을 바꾸었다고 금방 평평하게 바뀌지 않습니다. 정당하게 복지를 누리며 살 수 없는 사회에서 그들의 좌절과 분노가 범죄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눈 앞의 범죄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을 묶고 있는 구조화된 차별, 빈곤, 불평등과 같은 죄와 악의 권세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바로 그 어둠의 권세를 향한 것입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 세상을 불평등과 빈곤과 무지와 편견과 증오와 혐오의 사슬로 묶고 있는 마귀의 권세를 꿰뚫어 보고 그 사슬을 복음과 사랑과 진리의 칼을 휘둘러 끊음으로써 마귀의 종노릇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해방시키고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입니다.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하지만 이런 큰 싸움을 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닐까요? 과연 노력한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된다면 최근 로이타통신이 전한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섬의 달리라는 마을의 기적을 들어보십시오. 화전민들의 농업방식 때문에 숲이 잿더미가 되고 주민이 떠나 마침내 황량한 폐허로 변한 마을을 보고 마음이 괴로웠던 45세의 사디만 씨는 마을을 살릴 방법이 나무라고 믿었습니다. 염소를 내다팔아 산 반얀나무 씨앗을 심기 시작한 그를 사람들은 미쳤다고 조롱하고 방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은 그는 ‘결국 나무가 마을을 살릴 것’이라고 외치고 다니며 24년간 쉬지않고 250헥타르의 땅에 1만1천 그루의 반얀 나무와 피쿠스 나무를 심었습니다. 뿌리가 깊어 많은 물을 머금은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자 마을 곳곳에 샘물이 솟아났습니다. 늘 물이 부족해 1모작 밖에 못 하던 땅에서 3모작을 할 수 있게 되자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와 번성하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69세가 된 사디만 씨는 마을에서 영웅 할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사람들이 풍족하게 사는 것만이 자신의 바람이니 죽을 때까지 나무를 심겠다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혐오로 불타는 세상에 사랑과 진리의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저 거대한 혐오의 불길 앞에서 이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지만 쉬지 않고 심은 나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고 이 땅 곳곳에 은혜와 정의의 샘물이 솟아나도록 만들지 못 하겠습니까? 노인 한 사람의 신념이 마을 하나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면 생수의 근원이신 성령님을 모신 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바꾸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요?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