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4 다시 예루살렘으로 / 눅 24:13-35

20210404 다시 예루살렘으로 / 눅 24:13-35

눅 24:13-26/다시 예루살렘으로

210404 부활주일
무덤에 갇힌 성도들 
부활하신 주님의 놀라운 평화와 기쁨과 소망이 여러분의 심령과 일터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이 당신이 선포하신 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 분의 주장이 부활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이 누릴 부활의 증거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장차 경험하게 될 부활의 약속이 진실임을 부활이 증명해 주었습니다. 셋째 부활의 주님은 죽음도 깨뜨린 그 능력으로 오늘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승리케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그런데 이런 소식을 듣고서도 기쁨을 누리지 못 하는 이들이 많다면 그것은 왜 일까요?
지난 세기 말 어느 미국신학자가 한국교회를 방문하고 남긴 인터뷰가 기억납니다. 그는 한 세기 안에 기적처럼 성장한 한국교회를 큰 기대를 갖고 방문했다가 적어도 한 가지에서는 실망했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한국교회는 아직도 무덤에 갇힌 주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가 꼬집은 것은 신앙의 기쁨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 하는 한국교회 예배의 엄숙주의였습니다. 감정표현을 자제하는 유교식 엄숙주의의 영향도 있었지만 힘겨운 정치, 사회, 경제적 현실을 견뎌야 했던 삶의 정황도 한 몫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다일까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관한 소식을 이미 들었지만 불신앙과 슬픔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17절입니다.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미련과 불신
그들은 왜 슬퍼하고 있습니까? 부활의 소식을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를 본문 25절이 들려줍니다.
(눅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미련함이고 둘째는 불신입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마음에 더디 믿는 것, 불신이지요. 먼저 그들은 어떤 점에서 미련했습니까? 19, 21절입니다.
(눅 24:19)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눅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은 예수님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단순히 선지자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지도자일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도 몰랐고 엉뚱한 기대를 품고 있다가 실망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미련함입니다. 둘째는 불신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거를 다 들었습니다.
(눅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 24: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누가복음 24장 전반부를 보면 그 여자들은 천사들이 전한 주님의 부활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부활소식은 말하지 않고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만 언급합니다. 즉 부활소식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부활의 예고를 들었고 여인들과 베드로로부터 부활의 증거와 부활의 소식도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디 믿음 즉 불신이었습니다.
이 미련과 불신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 하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누구신지, 그 분의 약속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믿는 주님은 누구입니까? 그들의 바람이 투영된 분을 가상으로 만들어놓고 그들의 바람을 주님의 약속으로 믿고 기다리다가 실망하고 원망합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가르쳐 주어도 더디 믿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들어도 잘 믿지 않습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그러니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 합니다.
이는 마치 철없는 젊은이가 판타지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를 이상형으로 그려놓고 현실의 여자친구에게 그 여배우처럼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유사합니다. 영화배우는 늘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남자친구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며 남자친구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해달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현실에는 그런 여자친구가 있으리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판타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의 하나님을 계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계시해 주십니다. 미련과 불신을 버리고 부활의 주 예수님을 통해 참 하나님을 아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과 떡을 먹는 자리
그러면 어떻게 미련하고 의심많은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 일이 일어나는 곳은 첫째 주님과 떡을 먹는 자리입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눅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두 제자는 예수님과 떡을 떼던 중 눈이 열려 그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신 줄 깨닫습니다. 30절의 이 표현은 명백히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즉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언제요? 주님의 고난과 희생을 묵상하는 성만찬의 때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찬양의 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는 예배의 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희생과 고난을 묵상하는 자는 영의 눈이 열립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되고 부활의 주님이심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성경을 풀어주시는 자리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두 번째 자리는 주님이 성경을 풀어주시는 자리입니다. 32절입니다.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눅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님은 진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이후에도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신 주님을 성경을 풀어 제자들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44-45절을 보십시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성경은 미련함을 밀어내고 불신을 제거하고 우리를 믿음과 지혜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리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마지막 자리는 바로 성도들이 모인 곳입니다. 주님을 증언하고 높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눅 24:33)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슬픔에 잠겨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그들이 떠나왔던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공동체로 돌아갑니다. 그 곳에서 다시 만난 제자들과 무엇을 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합니다. 34-35절입니다.
(눅 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렇게 제자들이 모여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바로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제자들이 모여 서로서로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하자 그들 중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 하고 증언으로만 들었던 많은 제자들이 그들 눈 앞에 나타나신 주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구역모임을 하고 부서모임을 하며 할 일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 주님이 부활하셨다! 주님이 역사하신다! 이런 증언이 넘쳐나는 곳에서 부활의 주님이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부활의 기쁨이 넘쳐납니다. 부활의 능력이 경험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처럼 슬픔에 잠겨 힘겹게 거친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모르고 계시더라도 주님은 이미 여러분과 함께 걷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 분을 알아보지 못 할 뿐입니다. 미련과 불신을 버리고 여러분 곁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에게 귀기울일 때 여러분의 눈이 열려 부활의 주님을 보는 기적이 시작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