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8 부모가 되는 길 / 딤후 2:1-2

20210418 부모가 되는 길 / 딤후 2:1-2

딤후 2:1-2/부모가 되는 길

210418 주일설교
열두자녀의부모
캘리포니아 메니피에 사는 50세의 팸 윌리스와 53세의 게리 윌리스 부부 이야기입니다. 아내 팸은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입양을 기다리는 일곱 남매의 슬픈 사연을 읽었습니다. 4살에서 15살까지의 이 아이들은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위탁가정에서 1년 넘게 생활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사실 살아서도 마약중독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일곱 남매는 노숙자쉼터를 전전하며 힘겹게 지냈습니다. 이미 다섯 남매의 자녀를 낳아 장성하도록 양육한 팸은 이 사연을 읽는 순간 운명처럼 아이들의 사진에 시선이 고정되었습니다. 누군가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더불어 자신이 그 부모가 되면 왜 안 되느냐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단 한 번도 입양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결국 가족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뜻밖에 남편 게리와 다섯 자녀 모두 흔쾌히 그녀의 뜻에 동의해주었습니다. 부부는 그 때부터 입양절차를 알아보고 두 달 후 일곱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작년 8월 법정에서 모든 절차를 마쳐서 법적으로 완전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새 가정에 적응하는데 6개월이 넘어 걸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밤 중 7살 아브리엘라가 부부의 침실문을 두드렸습니다. 악몽이라도 꿨느냐고 묻자 아이는 그냥 새 엄마, 아빠가 방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한 번 버림받았던 아이들이라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팸과 게리 부부는 아이들의 상처와 두려움을 따뜻히 보듬으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몸으로 낳은 다섯 자녀와 마음으로 낳은 일곱 자녀를 포함해 열두 자녀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진정한영웅
짧디짧은 인생길에 남길 수 있는 선한 발자국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선한 부모가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이를 영웅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한 생명을 이 세상에 낳고 잘 양육하는 부모는 진정한 영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에 뛰어드는 것은 잠시의 용기와 헌신이면 되지만 부모되기는 훨씬 오랫동안 더 큰 용기와 희생과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팸과 게리 부부는 진정한 영웅입니다. 그들의 신앙과 사랑과 헌신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줍니다. 솔직히 우리는 보통 한 명도 입양할 용기가 없고 내 몸으로 낳은 자녀를 양육하는 것조차도 얼마나 자주 버거워합니까?
팸이 느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부모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먼저는 우리 육신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그러해야 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주님은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팸처럼 피가 섞이지 않은 다른 이들에게도 부모가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 말은 우리도 누군가를 입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제가 이 시간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입양 못지않게 귀한 다른 방식의 입양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입양입니다. 영적 입양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영적입양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제자이자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무엇이라 부릅니까? 1절을 보십시오.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원래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를 방문하여 그 지역에서 칭찬받는 젊은 일꾼 디모데를 제자로 삼아 전도여행에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에베소 교회에 목회자로 디모데를 후에 세웁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입니다. 제자인데 왜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육체적으로는 피한방울 나눈 적이 없는 남남인데 말입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육체로 낳은 아들이 아니라 영으로 낳은 아들 즉 영적 아들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을 하였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바울은 선교여행 중에 디모데에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필요를 돌보았습니다. 모두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양육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부모가 되어 육체의 부모처럼 그를 양육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 입양입니다.
영적 입양의 대표적인 방법은 가르침입니다. 성경을 가르칩니다.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양육입니다. 바울의 선교팀은 기도로 양육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들입니다.
(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말씀교육, 중보기도 외에 돌아보는 것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욥바에 있던 초대교회의 여자일꾼 중 도르가는 많은 가난한 과부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영적 부모였습니다. 그녀가 병으로 죽자 교인들이 룻다에 있던 베드로를 모셔와 그 앞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행 9: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도르가는 가난해서 새 옷을 살 수 없는 과부들을 위해 옷감을 사서 만들어 주는 등 그녀들을 돌보는 영적 어머니였습니다. 그녀의 육체의 자녀가 몇이나 되었는지는 성경이 말씀하지 않지만 적어도 영적 딸들은 많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녀를 위해 기도했고 그녀는 살아납니다. 나사로의 부활처럼 도르가의 부활은 모든 성도가 바라보는 부활소망의 증거입니다.
입양의중요성
이 영적 입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5장입니다.
(롬 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공동체 안에는 항상 믿음이 강한 이와 약한 이가 공존합니다. 왜 저 사람은 나처럼 헌신적이지 않지? 나처럼 희생하지 못 하지?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첫째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둘째 그런 생각이야말로 그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돌아보라는 주님의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땅히 담당하라’는 것은 그것이 믿음이 강한 이들의 의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강한 이들은 그러므로 약한 이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양육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고 섬깁니다. 그렇게 양육할 생각이 없다면 나도 사실은 실천은 없고 말만 번지르르한, 믿음이 약한 이일 뿐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섬기지, 비난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양육에는 하늘의 상이 큽니다. 다니엘서입니다.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믿음이 연약한 자녀를 영적으로 잘 양육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시킨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습니다. 그 상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영광을 누려보아야 한 세대도 지나가기 전에 대부분 잊힙니다. 돈을 벌어보십시오. 공부를 잘 해 보십시오. 유명스타가 되어 보십시오. 들풀처럼 그 영광도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러나 영혼을 돌보아 양육하여 잘 성장시킨 영적 부모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큰 영광을 누립니다.
부모가 되는 길
그럼 우리는 어떻게 영적 부모가 될 수 있습니까? 큰 재능이나 헌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첫 걸음은 우리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자기 생각만 합니다. 그래서 옆에 누가 사는지, 누가 외로운지, 누가 고난을 겪는지도 사실 잘 모릅니다. 심지어 한 집에 사는 가족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걱정, 근심, 슬픔, 외로움, 원망, 불평은 모두 자신만 바라보느라 생깁니다. 부모는 자녀를 돌보느라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에 잠겨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서 떨어져서 이웃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비로소 사람이 보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겪는 외로움과 고통과 우울함과 괴로움이 보입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팬데믹이 시작되고 더욱 사람들이 고립되었습니다. 교회 출석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아프고 힘들어도 연락할 사람도 하나 없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우선은 그런 이들에게 기도하고 연락하고 대화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이들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도 있고 교회 밖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혼자 마음으로 입양하는 겁니다. 말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누구를 영적 아들로 삼았어, 당신을 내 딸로 여길게… 좋은 방식이 아닙니다. 그저 마음에 품고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면 됩니다. 대단하고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속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와 만날 기회가 생기고 전도할 기회가 생기고 그의 어려움을 돌아볼 기회가 생깁니다. 그런 길이 열리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를 섬기면 됩니다. 성령님은 영적 부모와 자녀된 자 모두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양육이 일어나도록 도우십니다.
교회된 이유
현대 기독교인이 가진 가장 심각한 착각 중 하나가 신앙생활을 나 홀로 한다는 생각입니다. 목회자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나, 나만 잘 믿으면 되지… 이상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스트레스 받을 필요 있나, 나 홀로 예배 잘 드리면 되지… 꼴 보기 싫은 사람들하고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 점잖게 봉사하고 헌금하고 믿음 지키면 되지… 가혹하게 들리겠습니다만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은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어울려 살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허물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손길로 깎이고 다듬어지고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홀로 잘 믿는 것은 산 속에 사는 다른 종교의 구도자의 신앙일지 모르나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몸 안의 세포가 몸의 질서를 거슬러 홀로 별개의 질서를 가지고 자기증식을 할 때 그것을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고 성도들은 몸의 각 지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가락이 몸에서 잘려나가면 죽듯이 홀로 지키는 신앙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보면 눈이 마음에 안 들고 콧대가 마음에 안 들 수 있지만 그래도 내 눈이고 내 코입니다. 다른 지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홀로 살아가려 한다면 교회에 암세포가 됩니다.
저는 중고생 시절 저를 돌보고 가르치신 선생님 덕분에 방황을 끝내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더디지만 여전히 자라나고 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목사로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목사가 되지 않더라도 영적 부모가 되어준 누군가의 양육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제자로 자라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를 영적 자녀로 삼아 양육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한 몸을 이룬 공동체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양육으로 오늘까지 자라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양육하는 영적 자녀가 있습니까? 혹 없으셨다면 오늘부터 영적 자녀를 주시기를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빌립보서입니다.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