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냐 예식이냐/요 4:19-24
210516 주일설교
예배냐 예식이냐
예전에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결혼식 때 우리가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까, 예식입니까? 장례예배, 결혼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가요?” 저도 늘 교우들께 설명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문제였습니다. 답을 말씀드리자면 장례, 결혼시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의식은 예배가 아니고 예식입니다. 장례예배가 아니라 장례예식이 맞고 결혼예배가 아니라 결혼예식이 맞습니다. 우리 교단 헌법의 예식서는 임직예식, 봉헌예식, 결혼예식 그리고 장례예식 등을 소개합니다.
예배와 예식의 차이는 그럼 무엇일까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임의 형식입니다. 우리교단헌법은 예배의 요소로 말씀선포와 목회적기도, 성찬과 세례와 같은 성례식 그리고 봉헌 등의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대부분 한국교회의 주중모임은 성도의 신앙은 견고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말씀과 기도, 찬양 등 일부요소만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여러 교단에서 이를 예배가 아닌 기도회, 집회, 모임 등으로 부르도록 권고합니다. 수요예배가 아닌 수요기도회로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금요예배가 아닌 금요기도회, 새벽예배가 아닌 새벽기도회, 심방예배가 아닌 심방모임, 위로예배가 아닌 위로기도회 등이 맞습니다. 예배의 요소를 온전히 갖추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모임의 목적입니다. 모임의 1차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면 예배입니다. 반면 기념, 축하, 애도 등 다른 목적이라면 예식입니다. 주일에 교회오는 이유는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배입니다. 예배 중 친교나 기념이 일부 들어갈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기에 여전히 예배입니다. 그러나 결혼식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입니까? 장례식에 모이는 이유가 고인을 송별하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입니까? 둘 다라고요?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합니까? 예배를 포기해도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면 목적이 결혼에 있기에 결혼예배가 아니라 결혼예식입니다. 장례예배가 아니라 장례예식이 맞습니다.
이렇게 모임의 형식과 목적에 따라 예배가 아닌 모임은 예식, 집회, 기도회, 모임 등으로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추락한 예배의 가치
‘목사님,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예배면 어떻고 예식이면 어떻습니까? 예배는 많이 드릴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다 예배라고 부르면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이니 다다익선이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예식을 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죄도 아니고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이런 혼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듯이 사소해보이는 혼란이 누적되어 생긴 문제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무엇이든 흔하면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의 어리석음입니다. 돈을 물쓰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돈과 물 중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돈이 없어도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48시간을 넘기지 못 합니다. 사람 몸의 70%를 이루는 물의 1-2%만 줄어도 갈증을 느끼고 5-10%를 잃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12%를 잃으면 사망합니다. 당연히 물이 더 귀하지만 사람은 물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왜요? 돈은 벌기 어렵지만 물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면 마실 물이 없다고 하듯이 예배 아닌 예배가 넘쳐나 참 예배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예배, 심방예배, 위로예배, 임종예배, 추모예배, 추도예배, 개업예배, 개회예배, 폐회예배, 감사예배, 찬양예배, 예배, 예배, 예배… 한국교회는 예배의 홍수 속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조건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기도와 유사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통로라는 기도의 본질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의나 노력으로 기도응답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 같은 말을 끊임없이 길게 반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마 6:7입니다.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당시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해야 기도를 들으실 줄로 착각한 것처럼 오늘날도 예배를 많이 드려야 하나님이 좋아하실 줄로 착각합니다. 많은 예배가 아니라 참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참되지 않은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성도에게 물과 같습니다. 물이 없으면 육체가 죽듯이 참예배가 없으면 영혼도 죽습니다. 예배가 아닌 온갖 모임에 예배, 예배, 예배를 붙여놓는 통에 흔해빠진 예배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예배하는 마음가짐이 쉽게 흐트러집니다. 요즘처럼 온라인예배를 드릴 때는 더더욱 마음가짐이 흐트러집니다. 여보, 일어나. 예배시간 다 됐어. 어, 벌써? 아이패드 켜봐. 왜 이래? 연결이 잘 안 되네. 이따가 녹화된 것 보지 뭐. 그럴까? TV 보고 왔다갔다 하다보니 하루 해가 다 갔습니다. 예배드려야 하는데… 다음 주부터 잘 드리지, 뭐. 자자… 혹시 이런 분은 안 계십니까?
예배 아닌 예배가 넘쳐나는 통에 예배를 드렸는데도 영혼이 살아나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고 기력이 되살아는데 예배를 드리고도 영혼에 기쁨과 소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목마른 영혼은 점점 더 예배의 빈자리를 예배 아닌 것으로 채우려 애를 씁니다. 즉 본질 아닌 비본질에 몰두한다는 말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무엇이고 비본질은 무엇입니까?
예배의 본질
오늘 본문은 예배의 본질과 비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요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녀는 예배에서 중요한 것이 장소인 줄 알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는 그리심산과 유다인들이 주장하는 시온산 중 어디가 진정한 예배의 장소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소와 같은 비본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본질에 주목하라고 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장소는 비본질이고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합니까? 23-24절입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성령의 인도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즉 예배의 본질은 예배자의 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장소에 집착하고 정결법에 집착하고 안식일 규정을 지키느냐에 집착하고 유대인이냐, 아니냐에 집착하고 율법을 지켰느냐에 집착하고 복장규정에 집착하고 머리 모양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느라 정작 예배의 주인공이신 하나님과 그 분 앞에 완전히 엎드려 자신을 드려야 하는 믿음은 잃어버렸습니다.
예배의 비본질
오늘날에 우리도 그들처럼 비본질에 집착합니다. 장소에 집착합니다. 팬데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일부 교회에서는 대면예배만이 참된 예배요, 온라인예배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장소가 예배의 참됨을 보증해준다는 어리석음이요, 비본질에 가려 본질을 외면한 사례입니다.
한 때 음악에 집착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찬송가를 오르간이나 피아노로 연주하여야만 거룩한 찬송이요, 워십송을 기타와 드럼으로 연주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라는 주장도 했습니다. 중세교회에서 오르간을 받아들이려 하니까 찬송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사람의 목소리로 해야지 어떻게 인간이 만든 세속적인 악기를 쓰느냐고 거부했습니다. 18세기에 피아노가 발명되어 교회에서 이를 받아들이려니까 찬송은 거룩한 오르간으로 해야지 어떻게 술집에서 사용하는 피아노로 연주하느냐고 거부했습니다. 20세기 교회가 전자악기를 받아들이려하자 똑같은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이런 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음악의 형태는 순전히 문화와 취향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더 거룩한 특정악기, 특정장르, 특정발성이란 없습니다. 지금도 찬송가는 거룩한 것이요, 가스펠은 좀 덜 거룩한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이들이 적지않습니다.
복장에 집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마땅한 복장은 양복정장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정장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도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 모두 팬데믹 전부터 정장매출이 크게 줄고 묻닫는 관련의류업체가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계속 나왔습니다. 왜입니까? 젊은이들이 더 이상 직장에서도 정장을 입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복장이 양복정장이라는 생각은 그 복장에 익숙한 세대의 것일 뿐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모든 연령대의 세대가 고르게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주일예배시 복장을 저와 교역자들이 팔팍에서는 정장을, 오클랜드에서는 캐주얼하게 입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의문이 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럼 아무 데서나 아무 옷이나 입고 아무 노래나 불러도 괜찮은 건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외적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은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경건한 마음, 전심을 다하는 태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표현하기 적당한 장소, 복장 그리고 음악 등을 택해야 합니다. 다만 이런 외적인 조건의 선택은 다분히 문화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기에 내게 익숙한 것을 절대화하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익숙한 것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내게 찬송가가 익숙하듯이 다른 이는 가스펠이 익숙하고 내게 양복이 편안하듯이 다른 이는 캐주얼이 편안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됩니다.
참된 예배자
그러면서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본질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세입니다. 이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로 우리의 시선이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고 우리의 자세가 겸손하고 신실하고 충성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격은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주시는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 어디서 어떤 형태로 예배하든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예배가 됩니다. 그 예를 사도 바울의 전도팀이 보여주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은 도저히 예배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조명도 없이 캄캄했고 어떤 음향시스템도, 찬양대도, 잘 차려입은 설교자도 없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예배합니다. 행 16:23-25입니다.
(행 16:23) (바울과 실라를)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26절입니다.
(행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리고 그들을 매로 치고 가둔 간수가 회개하고 그 집에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됩니다. 참된 예배는 이처럼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어 참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성도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주님은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참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리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 대면예배의 횟수와 인원을 서서히 늘이고 있습니다. 1년이 넘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대면예배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부득이한 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면예배로 돌아오시기를 권합니다. 계속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까? 가능합니다. 온라인예배에서도 참된 예배가 가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대면예배를 불가피하게 보완할 수는 있을지언정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첫째는 예배의 두 축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와의 교제 중 두 번째 성도와의 교제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와 공동체와 교제하는 것은 신앙의 핵심요소입니다.
둘째는 예배자의 자세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명절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화상통화로 안부를 전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옆 동네에 사시는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고 화상통화로 명절인사를 대신한다면 그것은 불효가 아닙니까? 대면예배를 드리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었겠으나 가능한데도 온라인예배만 드린다면 어찌 마음가짐이 온전하다고 하겠습니까?
우리를 가두던 옥터가 움직이고 닫힌 삶의 문이 열리고 매인 족쇄를 다 풀어버리는 능력의 예배가 다시 한번 성도 여러분의 삶에서 새롭게 시작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