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5:31-47/녹슨 마음의 문
210530 주일설교
평면지구론
모든 이들이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었던 세상에서 지구가 둥들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입니다. 근대 이후 과학의 발달로 지구가 둥글다는 관찰증거가 점점 더 쏟아지다가 미국과 구소련의 우주선 항해사들이 찍어보낸 사진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만 반대로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관찰증거는 잘못된 것이고 잘 살펴보면 그 반대의 증거를 관찰할 수 있으며, 우주에서 찍어보냈다는 사진은 미국 정부와 CIA, FBI 그리고 NASA가 공모하여 미국국민을 속이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과학잡지 National Geographic에 따르면 미국 인구의 2% 이상이 평면지구설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600만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인데 특히 유투브 등을 많이 접하는 20대에서는 그 비율이 4%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여러 개의 단체를 만들었는데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The Flat Earth Institute 즉 평평한지구학회라는 곳이 지난 2017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1회 컨퍼런스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런 류의 음모론이 미국에는 많습니다. 나사의 달착륙이나 인공위성도 모두 조작된 것이라거나 지구는 속이 텅 비어 있고 발전된 문명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믿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과학분야 뿐 아니라 정치분야도 음모론이 활개치는 곳입니다.
이들은 왜 이런 음모론에 빠지는 것일까요? 이유 중 하나가 확증편향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증거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에 따라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결론을 내리고 그에 부합합 증거만 받아들이고 반대의 증거는 외면함으로써 결론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생각의 방식 때문에 사람은 구매를 끝낸 제품의 좋은 점만 보고 문제점은 외면함으로써 구매선택이 옳았다고 안도감을 가집니다. 자신이 산 주식이 오를 것이라는 정보는 주목하고 떨어질 것이란 정보는 외면함으로써 불안감을 달랩니다. 물건구매나 주식투자에서 마음의 방향을 고정시켜 두는 것은 낭패를 보긴 하지만 재정적 손해를 보는 수준에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생명에 관한 영역입니다.
불신앙의 유대인들
오늘 본문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후 예수님과 유대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대화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랫만에 이 본문으로 돌아왔는데 오늘로 요한복음 5장이 마침내 끝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꾸짖으십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메시야란 증거가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31-32절입니다.
(요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요 5: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그 증거는 세 가지인데 각각 세례 요한과 하나님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나온 증언입니다. 먼저 33절의 세례요한입니다.
(요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나)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다음은 36-37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요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 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행하는 모든 기적행위가 곧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입니다. 39절입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선지자와 하나님의 표적 그리고 성경은 유대인들이 진리를 판단할 때 부여하는 가장 권위있는 근거입니다. 이보다 더 큰 권위가 그들에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모든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못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확증편향에 빠진 유대인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확증편향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40, 43절입니다.
(요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메시야일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신들의 시스템에서 배출되지 않은 외부 지도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젊은 지도자,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 지도자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은 욕심과 관습과 권위주의에 찌든 그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과 기적과 성경의 모든 증언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몰랐고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았습니다. 37절 이하입니다.
(요 5:37) …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 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요 5:47) 그러나 그의 글(모세의 율법)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그들은 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중들을 가르쳤지만 정작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그 형상을 보지 못 했고 그 말씀에 기뻐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 했을까요?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그들 마음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방향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42절 이하입니다.
(요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몰랐고 늘 성경을 보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성경의 증언을 보고도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믿지 못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열정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은 열심히 걷는 것보다 바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 영생의 길을 가는 이들도 열정으로 달리는 것보다 바른 마음의 방향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을 닫은 사람들
지구가 둥들다는 진리에 마음을 닫은 이들과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진리에 마음을 닫은 이들처럼 오늘날도 그릇된 믿음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진리를 거부한 채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학의 발전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믿는 이들이 대표적입니다.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증명하지도 않습니다. 영의 세계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 너머에 존재합니다. 과학이 영의 세계를 인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과학이란 망원경으로 볼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태도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믿지 않기로 작정했기에 믿지 못 할 이유를 찾습니다. 과학의 망원경을 믿지 못 할 이유라고 여기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마음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비난하기로 작정한 마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을 뿐더러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쫓아다니며 말과 행동에서 비난거리를 찾아내려 하였습니다. 눅 11장입니다.
(눅 11: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눅 11: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행위의 의미를 이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많은 성경지식을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할 거리를 찾아내는데 썼습니다. 그들처럼 형제, 자매를 비난하기록 작정한 마음이 있습니다. 실수하는 이들을 찾아내 지적하고 비난하고 훈계할수록 자신이 더 의로워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을 비난할 능력이 있는 것이 자신의 성경지식과 경건성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비난은 경건한 사람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이 잘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만하다고 자신도 모르게 여기는 이들의 전유물이 형제, 자매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형제, 자매에게서 비난할 거리를 찾지 않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이유를 찾아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줍니다.
또 다른 닫힌 마음은 상처받기로 작정한 마음입니다. 이 세상은 지뢰밭과 같아서 원치 않는 실패와 시련를 한 번도 겪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없습니다. 학업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결혼에 실패하고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우정에도 실패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그런 상처로 오래 고생하지 않고 치유받고 새로운 도전,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지만 쉽지 않습니다.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 한 나머지 계속 고름이 흘러나오는 채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곁의 사람과 스치기만 해도 견딜 수 없이 아픕니다. 골형성부전증이란 희귀난치병이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전신이 골다공증상태로 태어나 살아가야 하는 병인데 재채기만 심하게 해도 뼈가 부러집니다. 이런 상태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마음의 뼈가 부러질 준비를 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운명이요, 자신은 피해자요, 아프고 우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고난에 넘어지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마음을 여시는 하나님
주님은 닫힌 마음을 여시는 분입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마음을 성령으로 여십니다. 사울은 신앙의 열심으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한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정으로 그는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다녔습니다. 그의 마음은 사실상 진리에 대해 닫혀 있었고 자신의 의와 자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메섹 가는 길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그의 열정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방향이 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마음의 방향을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리자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비난하기로 작정한 마음을 성령으로 녹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큰 자비를 입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만 달란트를 빚지고도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형제를 정죄하는 악한 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 우리는 이웃의 빚도 갚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연약한 이웃을 정죄하는 대신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주님은 상처받기로 작정한 마음을 성령으로 치유하십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박해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책임져서 긴장하고 떨고있는 젊고 미숙한 목회자 디모데에게 그의 젊음을 업신여기지 못 하도록 은혜 안에서 강하고 믿음의 본이 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주님은 상처받고 아프고 낙심한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일어나 전진하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이 모든 기적이 언제 일어납니까? 우리가 닫힌 마음과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맡길 때 일어납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의 눈에 덮힌 비늘이 떨어져나가듯 닫혔던 우리의 마음문이 활짝 열리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옵니다. 영의 눈이 열리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은혜로 충만하고 강하여져서 세상을 품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그리스도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까? 혹시 녹슬어 꼼짝도 않는 철문처럼 굳게 닫혀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녹슨 철문도 열고야마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