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3 딸을 살리려면 / 막 5:21-24, 35-43

20210613 딸을 살리려면 / 막 5:21-24, 35-43

막 5:21-24, 35-43/딸을 살리려면

210613 주일설교
딸을 돌려받으려면
지난 주에 이어 회당장 야이로의 사건을 살펴 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는 열두 해 혈루증 걸린 여인의 이야기를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샌드위치 구조라고 부릅니다. 야이로는 자신보다 훨씬 젊었을 것이 틀림없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채 발 아래 엎드려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저의 딸 사랑이가 딱 열두 살인데 저라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흔쾌히 그의 집으로 가시는데 갑자기 혈루증 걸린 여인이 끼어들어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 동안 야이로는 얼마나 초조했을지요. 한 시가 급한데 왜 예수님은 비천한 여자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시는지, 또 왜 그토록 느긋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지, 야이로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이 그녀를 보내고 돌아서실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그녀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 중 사람들이 달려오더니 야이로에게 딸이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을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을 잃고야 말았다는 절망감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직장을 잃고 신분을 잃고 가정을 잃고 가족을 잃고 평판을 잃습니다. 잃지 않으려고 애쓸 때 얼마나 절박하고 초조합니까? 잃고 나면 또 얼마나 쉽게 절망합니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삶의 의욕을 잃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 순간에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야이로가 잃어버린 딸을 돌려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딸을 살려주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 기적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요구하신 그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죽은 딸마저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불신앙의 말
첫째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불신앙의 말을 멀리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35절입니다.
(막 5:35) 아직 (혈루증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딸이 죽었다, 사실을 정확히 묘사합니다. 예수님을 귀찮게 할 필요가 이제는 없다. 예의바른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이로와 동행하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무지의 말이며, 딸을 살려주시겠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공수표로 만드는 불신앙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을 듣지 말라고 야이로에게 요구하셨습니다. 36절입니다.
(막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παρακούω)’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곁에서 들으셨다’고 번역된 것은 헬라어 παρακούω:파라쿠오입니다. 곁에서 들으셨다고 하니 그저 우연히 그들의 말을 들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은 ‘들으려 하지 않다, 듣기를 거절하다’입니다. 강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이 곳 말고 딱 한 곳에서 더 쓰였습니다. 마 18장입니다.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παρακούω)’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36절을 공동번역은 원어의 뜻을 충실히 살려 이렇게 번역해 두었습니다.
(막 5:36)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공동번역 개정판)
예수님은 불신앙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거나 의도적으로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야이로에게도 그런 말을 듣고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불신앙의 말을 듣고 염려하는 일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불신앙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마시기를 축복합니다.
불신앙의 사람
둘째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불신앙의 사람을 멀리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37절입니다.
(막 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왜 예수님을 에워쌓고 야이로의 집으로 몰려오던 무리들이 따라오지 못 하게 하셨습니까? 그들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모두 예수님을 떠밀며 만졌지만 혈루증 여인과 달리 믿음없는 이들임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셔서도 믿음이 없는 이들을 동행하지 못 하게 하셨습니다. 40절입니다.
(막 5:40) …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시기 전에 야이로의 집에 모여있던 이들을 다 내어보내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의 불신앙의 말을 야이로 부부와 제자들이 더 이상듣지 못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불신앙은 38절 이하에서 확인합니다.
(막 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막 5: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 5:40) 저희가 비웃더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비웃었습니다. 그런 불신앙의 무리를 예수님을 내어쫓으셨습니다.  아이를 살릴 현장에는 야이로 부부와 제자 3명만을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은 왜 동행시키셨습니까? 야이로 부부는 간절함과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의지하였습니다. 세 제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졌기에 구원역사에 초청을 받았고 그로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불신앙을 버리라
불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합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과 허영을 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변화되기 전 사울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성도들을 박해합니다. 성경은 그런 이들을 멀리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잠 22: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잠 22:25)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그들의 돌팔매 같은 말은 믿음의 탑을 무너뜨립니다. 합리적인 듯 가장하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모르는 말은 걱정과 두려움을 퍼뜨립니다. 염려하는 척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말은 불만과 미움을 전염시킵니다. 온갖 미사어구로 치장하지만 예수님의 소망을 모르는 말은 냉소와 회의를 감염시킵니다. 코비드 바이러스 팬데믹보다 더 큰 불신앙 바이러스의 팬데믹을 오늘날 세상 뿐 아니라 교회도 겪고 있습니다. 불신앙의 사람들과 소셜디스턴싱을 해야 합니다. 코비드 비말보다 불신앙의 말이 더 위험합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존경받는 한국교회 원로이신 이동원 목사님이 한 설교에서 말씀하시기를, ‘평생 목회를 돌아보건대 말 많이 하는 사람치고 교회에 유익이 되는 이를 못 봤다. 교회에 유익이 되는 유일한 사람은 말 대신 기도를 하는 사람’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많으면 실언도 많습니다. 불신앙의 말도 많습니다. 우리 안에 애초부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면 말이 줄어듭니다. 신앙의 말을 합니다. 끝났다, 망했다, 안 된다, 문제다… 불신앙의 말은 퍼뜨리기도, 듣기도 거절하고 무릎 꿇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성령님이 주시는 말을 하십시오. 부활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동시에 깨끗한 마음을 가진 이들과 가까이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딤후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거룩한 성도의 교제, 거룩한 관계, 거룩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거기서 성령님은 구원의 역사,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의 말이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가로막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으라
예수님의 마지막으로 예수님 당신을 신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36절을 다시 보십시오.
(막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이시기에 믿으라는 것입니까? 41절이 이렇게 보여줍니다.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아이를 살리신 방법이 중요합니다. 그저 손을 잡고 명령만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일어섰습니다. 이 방법이 가르쳐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구약에도 죽은 이를 살리는 위대한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엘리야와 그 제자 엘리사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의식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엘리야를 보십시오.
(왕상 17:21) (엘리야가)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왕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는 자신의 몸을 죽은 아이의 몸 위에 펴서 엎드리기를 세 번 반복하고 간절히 부르짖어서 아이를 살립니다. 그의 제자 엘리사는 스승의 영성을 갑절로 구했고 응답받았기 때문인지 같은 의식을 두 번만 합니다.
(왕하 4:33) …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왕하 4: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 (왕하 4:35) …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이 두 선지자는 기도와 의식이 필요했습니다. 이 의식은 일종의 주술적 행위로 의학이 발달하지 못 했던 시기의 민간요법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기도하고 수술도 하고 약도 먹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기도와 의식이 모두 필요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께 부르짖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그들은 생애 내내 단 한 명씩 밖에는 죽은 이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
그에비해 예수님은 이 소녀 외에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살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간구나 의식이 필요없었습니다. 그저 명령이면 충분했습니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눅 7:14) … 예수께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왜 예수님에게는 기도도 의식도 필요없이 명령이면 충분했을까요? 당신이 곧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주관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가) 내게 주셨으니…”
하늘의 권세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땅의 권세도 예수님께 있습니다. 생명을 주관하는 권세도 당연히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딸을 살려주시겠다 약속하셨으니, 그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계시니 불신앙의 사람들이 하는 불신앙의 말을 듣고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달리다굼’ 단 한 마디 말씀만으로도 죽음을 물리치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바로 이 믿음입니다. 우리 삶이 추락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심할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망했다고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마귀가 속삭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는 이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는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세상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떨고 계시지 않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심으로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