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5:41-43/먹을 것을 주라
210704 주일설교 독립기념주일
1. 왜 먹을 것인가
본문을 읽는 동안 ‘또 야이로야?’ 하신 분이 계셨을 겁니다. 오늘은 정말 마지막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야이로의 야자도 꺼내지 않겠습니다. 한 동안은 야고보서도 읽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믿어주세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 보도된 다소 의아한 말씀, 표현을 세 주째 살펴봅니다. 기적을 알리지 못 하게 한 것과 소녀가 열두 살이었다는 의미를 두 주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막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병치례로 제대로 먹지 못 했을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일이 하등 이상한 것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마가복음이 굳이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입니다. 먹을 것이 무엇 그리 중요했던 것일까요? 죽었다 살아난 이가 음식을 먹는 상황은 복음서 다른 곳에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예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요 21:9)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 21: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 (요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 만났으니 나누신 중요한 말씀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여러분이 기자이고 한미대통령이 십 년 만에 만나 정상회담을 한 기사를 압축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면 저녁메뉴가 무엇이었고 어떻게 식사를 했다는 내용을 쓰시겠습니까? 양국관계에 중요한 수많은 협의내용도 다 못 써서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먹을 것을 찾으셨고 제자들과 나누어 드신 이야기를 여러 구절에서 설명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식사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2. 음식을 먹는 몸
어떤 점이 중요했을까요? 누가복음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눅 24: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 하고 영으로 즉 귀신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눅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눅 24: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못 박힌 손과 발을 보이셨는데도 저희가 믿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행동을 하나 하십니다.
(눅 24:4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 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눅 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그들의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일부러! 왜입니까? 영은 음식을 먹지 못 하기 때문이지요. 소화기관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육은 음식을 먹습니다. 음식섭취는 이처럼 부활한 이가 영이 아니라 육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심을 믿지 못 했듯 소녀의 부활기사를 읽은 이들도 비슷한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아이가 살아난 것? 부모들이 너무 간절히 원하다보니 환상을 본 거야. 아이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아이의 영이 나타나서 그것을 본 거야.’ 이런 의심을 하는 이들을 위해 마가복음은 그 아이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영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다
더 나아가서 마가복음은 당시 육체의 부활을 믿지 못 하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이 장면을 묘사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성도가 육체가 아닌 영으로만 부활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영지주의자입니다. 로마제국 이전에 지중해 주변 세계를 다스리던 것은 알렉산더제왕이 세운 헬라 즉 그리스제국이었습니다. 로마가 그리스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차지한 이후에도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뿌리깊은 그리스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스철학의 주류는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으로 한마디로 요약하면 육은 저급한 그림자일 뿐이면며 영이야말로 고귀한 실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이 육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 없어서 실제로는 영으로만 오셨는데 육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도의 부활도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왜입니까? 성경과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성도의 부활이 영이 아니라 육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부활을 분명히 이렇게 묘사합니다.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부활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분명히 영이 아니라 몸으로 삽니다. 우리가 매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들의 신앙고백도 이와 같습니다.
“…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4. 육과 영의 이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분도 계실 겁니다. ‘성경에서도 그렇게 읽었고 설교에서도 육을 버리고 영을 좇으라고 배웠는데 정작 성도는 왜 영이 아니라 육체로 다시 사는 것인가, 육체가 부활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좋은 것인가?’ 이것은 많은 경우 설교자도 성도도 용어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육과 육적인 것은 다릅니다. 영과 영적인 것도 다릅니다. 육과 영은 존재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육은 물질로 구성된 채 존재하는 상태로 인간과 동물과 식물 등 물질세계를 가리킵니다. 영은 비물질로 존재하는 상태로 하나님과 천사, 사탄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육과 영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방식일 뿐입니다. 육과 영에는 가치판단이 없습니다. 육체라고 악한 것이 아니고 영이라고 선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셨지만 전혀 죄가 없으셨고 사탄은 영이었지만 악하였습니다.
반면 육적이다, 영적이다 라는 표현은 가치판단을 담고 있습니다. 육적이란 말은 죄성을 가진, 타락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 영적이란 말은 죄성을 갖지 않은, 거룩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대립됩니다.
정리하자면 육체는 육적인 몸일 수도 있고 영적일 몸일 수도 있습니다. 영도 육적인 영일 수도 있고 영적인 영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육적인 길을 가지 말고 영적인 길을 가라는 것이지, 육체를 버리고 영의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5. 왜 몸의 부활이냐
그럼 왜 주님은 우리를 영이 아니라 육으로 부활시키실까요? 그 이유는 첫창조 때 우리를 영이 아니라 육으로 창조하신 이유와 같습니다. 육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솜씨와 능력이 발휘된 엄청난 걸작품이요, 육체에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엄청난 복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며 매일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고 인간창조로 모든 창조를 완성하신 6일 째는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저 피조세계는 주님의 모든 능력과 영광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스며있는 걸작품입니다. 그 중 가장 백미는 바로 인간의 창조입니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 걸작품 중 걸작품을 왜 하나님은 영이 아니라 육체로 만드셨습니다. 육체가 저급하거나 죄악되거나 부질없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이 육체를 만드셨겠습니까? 육체에는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와 복이 들어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저 아름다운 석양과 노을과 무지개와 푸른하늘과 초록들판과 형형색색의 꽃과 장엄한 산과 계곡과 강과 바다를 보고 행복을 느끼고 경탄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 모든 것을 느낍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것처럼 동물이나 곤충의 눈은 색맹이거나 시야각이 인간과 완전히 달라서 우리가 보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 합니다. 영은 즉 천사나 귀신은 우리가 보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까요? 누가 알겠습니까만, 저는 못 본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눈, 안구를 갖지 못 했으니까요.
우리의 귀는 저 아름다운 새소리와 물소리, 베토벤의 음악과 찬양대의 황홀한 화음, 가슴을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흥에 겨워 춤을 추도록 만드셨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이 소리들을 들으며 하나님을 떠올리고 사랑을 회상하며 아름다운 춤사위를 만들어내고 즐거움과 행복에 잠기지 못 합니다. 천사는 우리가 듣는 방식으로 못 들을 것입니다. 귀와 고막이 없으니까요.
우리의 몸이 주는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큰지 지금 이 시간 다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육체로 창조된 인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사람은 감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되었으며 영화롭고 존귀한 관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에 거의 하나님에 가까운 영광과 존귀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그런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6. 어떤 부활이냐
이 쯤 되면 의아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 육체가 그렇게 영광스럽다면 왜 이렇게 쉽게 병들고 깨지고 늙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시는 바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울창하고 아름다운 소나무숲에 나무에 기생하며 갉아먹는 소나무재선충이 퍼지면 숲이 초토화됩니다. 죄악은 인간의 삶에 퍼져 육체와 영을 다 타락시켜서 육체의 영광을 대부분 앗아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육체는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부활은 바로 이런 육체의 영광을 회복시키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육체에 깃든 죄악을 남김없이 씻으시고 그 병들고 상한 육체를 죄악과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새육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영화와 존귀로 관 쓴 육체로 만드십니다. 사도 바울의 선포입니다.
(고전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는 몸이 아니라 썩지 않는 새 몸으로, 이 죽는 몸이 아니라 죽지 않는 새 몸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믿기 어렵습니까? 보십시오. 이파리에 붙어 꼼지락거리기만 하던 2차원의 존재 애벌레가 창공을 훨훨 나는 아름다운 3차원의 존재 나비로 변하지 않습니까? 벌레조차도 이렇게 변할 수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빼앗긴 우리의 육신이 그 영광을 회복한 영화롭고 존귀한 육신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요? 우리가 부활하여 입을 새 몸과 살아갈 새하늘과새땅의 상태를 다시 계시록의 비전으로 들어보십시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7. 소망을 품은 이들
이 부활의 소망을 품은 자들은 낙심과 절망과 두려움을 물리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은상 교수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이민자입니다. 남편 황희철 교수와 함께 UCLA 대학 교수가 되었고 거기에 더해 남편은 미국 대통령 자문위원을 비롯한 각종 공직에도 올랐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 중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 뭐 하다 왔니? 뭘 하다니요?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되었고 교회에서도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지 모르는데요. 아니, 넌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있어. 너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줄 순 없겠니? 그 음성을 듣고 그녀는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주님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듣고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하라는 음성을 듣고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목회하라는 음성을 듣고 부부가 모두 교수직을 내려놓고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어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선교하라는 음성을 듣고 부부가 함께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다른 선교사들이 못 들어가는 오지에만 들어가는 오지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을 쉬지않고 누비다 건강을 해친 남편이 악성림프종암으로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견디기 힘든 투병 중에도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이 늘 주님 얼굴 빨리 보고 싶다고 했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천국 가지~ 내가 먼저 주님 얼굴 보지.’하며 웃음과 소망과 위로를 주고 갔습니다. 남편과 함께 누비던 오지에서 잠시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고 다음 선교지로 떠날 때마다 자녀들이 말립니다. ‘엄마, 제발 이번에는 안 가면 안 돼? 꼭 가야하면 안전하게 돌아오세요.’ 그 때마다 이은상 선교사는 유언을 남깁니다.
“얘들아, 정말 사랑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 나라는 존재한다. 예수 똑바로 믿어라. 못 돌아오더라도 천국에서 만나자.”
자녀들은 ‘엄마, 아빠를 보면 하나님이 믿어져요’라고 합니다. 이은상 선교사는 그 말이 가장 큰 상이자,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왜 이들은 땅의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모두 내어버렸을까요? 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을 섬길까요? 바위처럼 굳건한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굳건한 소망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