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6:16-21/주님 없는 배
210718 주일설교 물위를 걸으심
1. 인생의 진짜 문제
한국의 석학 이어령 박사의 장녀 고 이민아 목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의 출신과 뛰어난 학력, 캘리포니아주 검사라는 경력만 놓고 보면 남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포장지 뒤에는 견디기 힘든 인생의 풍파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유명인이지만 사랑표현에 서툴렀던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자라며 자신은 결코 사랑받지 못 하는 존재라는 상처를 받았고 이는 그녀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고통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하기싫은 공부를 기를 쓰고 하고, 채우지 못 한 아버지 사랑을 연인에게서 갈구하여 일찍 결혼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유학하고 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피할 수 없게 된 이혼과 연달아 재발하는 암투병, 망막박리로 인한 시력상실, 목숨처럼 사랑한 큰 아들의 죽음, 자폐증을 앓는 둘째 아들을 양육하는 고통 등 한 가지로도 힘든 인생의 풍파가 사방에서 에워싸듯 그녀를 덮쳐왔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암흑기, 사정없이 몰아치는 풍파로 그녀의 인생이 사정없이 흔들리던 2002년 어느 날 예배 중 설교를 듣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날 목사님 설교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뭐? 그럼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야?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거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자신은 예수 믿은 지 10년을 넘기며 새가족반 리더, QT반 리더까지 하며 섬기면서도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왔지 한 번도 주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그 날부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힘겨운 암투병 중에도 쉬지 않고 한인기독교인 가정의 비행청소년선도사역과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과정이 책 ‘땅 끝의 아이들’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완고한 무신론자이던 아버지마저 전도하고 예수님을 인생의 배에 모시고 기쁨으로 믿음의 항해를 하던 그녀는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유고작인 된 책 ‘땅에서 하늘처럼’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쓰는 저는 말기 위암환자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는 차고 넘치는 천국의 의와 기쁨이 있습니다. 저를 사랑하셔서 여러 번 고쳐주신 아버지 하나님이 또 고쳐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신다 해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암이 낫는 것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삶을 나누고 싶습니다.”
2. 주님이 없는 배
그녀가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심장을 찌르는 고난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한 삶의 비밀을 오늘 본문은 알려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모시려 하자 주님은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저물 때 즈음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가려고 갈릴리 호수에 배를 띄웁니다. 벳세다에서 가버나움까지는 도보로 약 4km 정도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고 배를 타면 당연히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호수 위에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해수면보다 240m나 낮고 주변에는 높은 산지와 고원이 형성되어 있는 지형으로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산을 넘어 푹 꺼진 호수 위에 도달하면 회오리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호수엔 거센 파도가 일어납니다. 19절을 보면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저어 호수 위에서 십여 리, 4km를 넘어 갔다고 합니다.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를 갔다는 말인데 아직도 가버나움에 도착하지 못 했습니다. 그 말은 배가 똑바로 목적지로 못 가고 풍랑에 밀려 엉뚱한 곳으로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때의 정황은 같은 사건을 묘사한 공관복음서를 보면 더 자세히 나옵니다.
(막 6: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의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새벽 3-6시) 즈음에…
제자들이 저물 때 배를 띄웠으니 새벽 3시라고 해도 최소 9시간 이상을 호수 위에서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고작 4km, 2.5mile, 한 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9시간이나 고되게 노를 젖고도 도착하지 못 한 채 바다 위를 위태롭게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나요? 17-18절은 세 가지 환경이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요 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요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첫째는 어둠, 둘째는 바람 그리고 셋째는 파도입니다. 한 가지만도 힘든데 세 가지가 결합하니 그들의 항해는 무척이나 힘들고 위태로웠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그런 환경적 요소 외에 한 가지가 더 그들에게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큰 문제입니까? 우리는 늘 어둠과 바람과 파도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시자 그들의 배가 목적지에 이릅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그들의 배에 모시지 못 한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3. 물위를 걸어오신 분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시기에 그 분을 모시지 못 한 것이 어둠과 바람과 파도보다 더 큰 문제입니까? 먼저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요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목적지로 데려가십니다. 이 사건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오병이어로 배고픈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지난 주 일꾼모임을 마치고난 후 한 구역섬김이께서 문자로 질문을 해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이 오병이어 사건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을 나란히 놓은 데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우리는 잘 모르지만 유대인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한 후 무리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했습니까? 14절로 돌아가 봅니다.
(요 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어투를 보건대 그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연설명이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던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가 누구일까요? 신명기 18장으로 갑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믿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찬찬이 다시 보면 예수님은 바로 그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묘사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4절을 보십시오.
(요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은 모세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날이 아닙니까? 3절입니다.
(요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율법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또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린 양식 만나를 이스라엘에게 먹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하시고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인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는 또 이스라엘을 데리고 애굽군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홍해를 건너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바람과 파도를 물리치고 갈릴리를 건넌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지금 예수님이야말로 신명기에 예언된 장차 하나님이 보내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내니’ 라고 하시는 분
이것만으로도 예수님은 대단한 분인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시면서 무엇이라 하십니까? 20절입니다.
(요 6: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나다, 나’ 하시는데 ‘나 유령 아니고 너희 스승 예수야’하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내니’로 변역된 헬라어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인데 에고는 I(나), 에이미는 am(이다) 입니다.
이와 유사한 자기선언이 구약에도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백성들에게 가서 당신을 누구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묻자 답하시기를 요드-헤-와우-헤 즉 야훼(יהוה)라고 답하셨는데 그 뜻은 ‘나는 나다’ 정도가 됩니다. 출애굽기 3:14을 공동번역으로 보십시오.
(출 3:14)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יהוה).”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구약성경을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한 기원전 3세기 경의 70인역본(셉투아진트:Septuagint:LXX 성경)은 이 야훼를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바로 에고 에이미로 번역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물 위에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하신 ‘내니’란 말씀은 시내산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신 ‘나는 곧 나다’란 말씀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장차 올 선지자인 동시에 그 수준을 넘어서는 분 곧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란 선언입니다. 그 하나님인 내가 너희에게 왔으니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는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5. 주님을 모신 배
과연 예수님을 배에 모시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21절입니다.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두려움이 가득하던 배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밤새 힘겹게 노저어도 앞으로 나가지 못 하던 배가 가려던 땅에 곧 금방 도착했습니다. 밤 4경 즉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 즈음이라 하였으니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의 빛이 밝아왔습니다. 어둠과 바람과 파도와 그로인한 고통이 가득하던 배에 빛과 기쁨과 평안이 가득했고 마땅히 그들이 가야할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우리 인생의 배에 모시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방황은 어둠과 바람과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빨리 어둠이 지나가고 바람과 파도가 멈추면 인생의 배가 행복을 향해 나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것을 자꾸만 기도합니다. 그러나 정말 인생의 배가 나가지 못 하고 제자리를 뱅글뱅글 맴도는 이유는 주님을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련이 없고 편안하고 성공한 삶이라 하여 방황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았고 우리가 가야할 참된 목적지,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지 못 한 모든 인생은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을 했든, 아무리 풍요롭게 창고를 채웠든 상관없이 방황하는 유령선일 뿐입니다. 그런 인생의 배에 주님을 모셔야만 방황이 끝납니다.
6. 기뻐서 영접하니
그럼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우리 인생의 배에 모셔들일 수 있을까요?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 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제자들은 배에 물을 퍼내고 노를 젓는 것도 버거워 주님을 찾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을 배에 모실 수 있었을까요? 마가복음은 주님이 제자들을 보셨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오셨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겁니다. 주님이 찾아주셔야만 우리는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우리 인생의 배에 찾아오십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권능과 죄인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구원주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씀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면 기쁨과 소망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려던 땅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바람과 파도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의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승리의 항해를 시작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