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1 보이지 않는 강 / 사 55:8-11

20210801 보이지 않는 강 / 사 55:8-11

사 55:8-11/보이지 않는 강

210801 주일설교
1. 보이지 않는 강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은 무엇일까요? 이티오피아에서 발원하여 수단을 지나 이집트를 관통하고 지중해로 흘러드는 총 길이 6,650km의 이 강은 바로 나일강입니다. 나일강의 풍부한 수량은 이집트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이 외에도 아마존강, 양쯔강, 인더스강, 유프라테스강 등 무수한 강이 유유히 흐르며 고대의 4대 문명을 비롯한 수많은 문명을 일으켜왔습니다. 왜 강이 문명의 젖줄기가 됩니까? 강이 흐르는 곳에는 마실 물이 있고 기름진 땅이 있고 농사가 가능하기에 사람이 모여듭니다. 많은 인구와 풍부한 수확으로 생존이 해결되면 남는 시간과 자원으로 음악, 미술, 건축, 법률, 제도 등 문화를 생산하고 그 생산물이 쌓여 문명을 탄생시킵니다. 반면 강이 흐르지 않는 곳은 어떻게 됩니까? 사막이 되지요. 물이 없고 땅이 황폐하고 농사가 불가능하니 문화도, 문명도 세우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강은 기름진 땅과 문명에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땅이 사막화되지 않고 기름진 농토가 되게 해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저 강이 전부가 아닙니다. 저 수많은 거대한 강과 호수를 다 모아도 땅 위에 있는 물은 전체 육지에 있는 물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얼마나 될까요? 불과 0.112%에 불과합니다. 그럼 나머지 99.888%의 물, 천 배나 더 되는 거의 대부분의 물은 어디 있을까요? 땅 밑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강과 호수 즉 지하수입니다. 육지의 물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땅 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강은 눈에 보이는 강보다 1,000배나 많은 수량으로 보이는 강에 끊임없이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지하수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네, 땅 위를 흐르던 강이 텅빈 땅 밑으로 다 스며들어 순식간에 모든 육지는 사막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땅이 사막화 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보이는 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강입니다. 눈에 보이는 강은 사실 보이지 않는 강 때문에 흐를 수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인류의 생존과 문명의 발전에는 보이는 강보다 보이지 않는 강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눈 앞에 벌어지는 일,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이해불가한 일을 만나면 괴로워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주님을 신뢰하기 힘듭니다.’ 그 때 깨달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강보다 보이지 않는 강이 훨씬 크고 깊게 흐르며 땅을 지키는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삶을 지탱하는데 훨씬 중요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 교우께서 문자를 주셔서 말씀하시기를, 지난 주 설교를 듣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몇 번이나 다시 듣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전하지 못 해 죄송한데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다시 들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교우처럼 이해가 쉽지 않았던 교우들이 계실 듯 하여 오늘은 지난 주 설교를 보충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2. 보이지 않는 섭리
의인이 불행을 만나는 이유는 세상이 병들어 정상적 질서가 깨지고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고치고 질서를 회복하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에게 율법이란 백신을 주셨습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백신을 퍼뜨려 세상을 치유하는 일을 우리에게만 맡기신 것입니까? 세상이 치유될 때까지 의인들은 속절없이 망가진 질서에 고통받으며 불행을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지금 당장 개입하셔서 질서를 바로잡고 고통받는 의인을 건져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결코 당신 백성들에게만 맡겨놓지 않으셨습니다. 11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담대히 선포합니다.
(사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다 이루십니다.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십니다. 당신의 구원역사를 형통하게 이루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모릅니까? 그 방법이 우리 기준에서 볼 땐 너무 오묘하기 때문입니다.
(사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더하기, 빼기 산수를 배우는 진리에게 6살 많은 평화형이 공부하는 수학 알지브라는 이해불가한 주문이고 마술이고 미지의 세계입니다. 평화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진리가 함수와 미분과 적분과 방정식을 이해할 길은 없습니다. (사실은 저도 모릅니다.) 불과 6년 차이도 이해불가의 간극을 만드는데 끝이 보이지도 않는 이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수천, 수만 차원의 방정식과 배부르면 행복이고 아프면 불행이라는 더하기, 빼기의 산수로 살아가는 우리의 단순한 인생관의 간극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에게 은밀한 비밀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주님은 그 오묘한 섭리의 일부를 믿고 신뢰하는 자녀들에게 이해시켜 주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입니다.
(렘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런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던 의로우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3. 세대를 넘어서는 섭리
(시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편 기자가 살펴보니 의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기만 하는 것 같은데 길게 보니 결국 의인이 승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대대로 의인의 삶을 돌보시고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출 20장입니다.
(출 20:5) …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인생은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아서 엎치락 뒤치락 하며 악인이 앞서가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의인이 승리하는 시합입니다. 우리는 한 인생도 끝까지 지켜볼 만한 시야가 없지만 주님은 대대손손이 의와 불의를 갚으시며 역사 전체를 보실 만큼 시야가 넓은 분이십니다. 우리의 시야가 좁기 때문에 주님의 시야를 도저히 보지 못 합니다. 미련하고 의심많은 주님도 우리 같은 줄 알고 이것도 빠뜨리고 저것도 안 보고 계실까 봐 염려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티끌 하나도 빠뜨리시는 것이 없고 다 기록해 두시고 마침내 모든 것을 다 갚으실 것입니다. 이 진리를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가라지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원수가 와서 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간 것을 안 종들은 그 가라지를 당장 뽑아야 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마 13:28) …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가라지)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 (마 13:30) (주인이 이르되)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주님은 모든 것을 추수할 때, 계산할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연히 티끌만한 의와 불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계산하고 계십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4. 영원을 준비하시는 섭리
그러면 주님은 그 의와 불의의 계산을 왜 지금 당장 하시지 않으실까요? 의인이 온갖 고통을 다 당한 후에 마지막에 계산하시는 것보다 지금 당장 개입하셔서 모든 것을 계산하시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역시 시야가 좁고 눈 앞 밖에 못 보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은 더 많은 이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기다리십니다. 이를 위해 불의마저 인내하십니다. 때로 권면하며 때로 꾸짖으며 더 늦기 전에 복음을 듣고 돌아오도록 자녀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십니다. 이런 의문과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죄인을 위해 의인이 왜 이토록 희생하며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도 주님처럼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주님의 인내로 덕을 보는 죄인이 저 밖에 있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이런 불평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는 말씀하십니다.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주님의 인내 덕분에 우리가 구원 얻은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저 밖에 죄인들을 기다려주지 않기로 결정하셨다면 우리도 그 은혜를 입지 못 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죄인을 위해 기다리는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이가 우리라면 그것도 우리가 의인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성경의 의인은 죄가 티끌만큼도 없는 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런 이는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의인이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즉 겸손히 예수님을 붙드는 이입니다. 그런 겸손의 증거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위해 쉬지 못 하시고 애끓는 부모의 마음,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의인을 구원하시고 모든 의를 갚으실 때가 결코 멀지 않습니다.
5.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몇 주 전 소개한 적이 있는 고 이민아 목사는 아버지 이어령 씨가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어나 그 날만큼 기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채 기쁨이 가라앉기도 않은 두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큰 아들이 전화로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감기도 잘 앓지 않는 건강한 아이였기에 그저 두통약을 먹으라고 했는데 며칠 있다 아들이 응급실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달려갔더니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데 의사들이 아무리 조사를 해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3주 정도를 누워있던 아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진단서엔 사인불명이라고 적혔습니다. 명문대 버클리를 졸업하고 엄마처럼 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이들, 불우청소년들을 돕겠노라고 고백하는 신실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기에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예쁜 아이를 왜 데려가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으며 백만 번도 더 하나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 때마다 주님은 오늘 이사야의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과 같다! 네가 모를 때도 나는 일하고 있고 네가 이해 못 해도 내 길은 의롭다. 네가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
마침내 이민아 목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하고 고백할 때 주님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아이가 살아서 세상에 할 수 있었던 기여와 비교할 수 없는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란 믿음을 주셨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다시 만날 것이란 굳건한 믿음을 주님은 주셨습니다. 지금 이 슬픔과 고통이 너무 사소하여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크고 완전한 기쁨과 행복을 아들과 함께 누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소망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 뒤에서 섭리하고 계시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닮아가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결국 이목사에게나 아들에게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더 선하고 놀라운 일을 이루도록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돌보고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케 해주셨습니다.
땅 위를 흐르는 강보다 땅 밑을 흐르는 강이 훨씬 크고 깊고 넓으며 이 땅이 사막으로 바뀌지 않도록 지키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일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훨씬 크고 깊고 넓고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찬양합니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크고 깊고 넓은 보이지 않는 강처럼 일하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믿고 인내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