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8 교회는 필요한가 / 마 16:13-19

20210808 교회는 필요한가 / 마 16:13-19

마 16:13-19/교회는 필요한가

210808 창립49주년
1. 교회는 필요한가
얼마 전 한 기독교 유투브 채널을 시청했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라는 제목으로 한 문화평론가를 초대해서 교회 밖 사람들이 보는 교회의 모습을 들어보는 자리였습니다.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밝힌 평론가는 신랄한 한국교회비판을 쏟아놓았는데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행동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팬데믹에 방역지침을 무시하며 집단감염의 온상이 된 것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온갖 병폐들을 꼬집는 것이었는데 일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으로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둘째는 교회의 믿음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실체가 없는 것을 믿으며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공격했는데요, 미안한 말이지만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하는 오해로 대부분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들으면서 저도 타종교에 대해 말할 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주장하기를, 사실 교회는 사회에 필요없으며 사람들이 점점 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믿지 않고 있으며 머지않아 교회는 사라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자신있게 주장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서구선진국에서 기독교인의 인구가 분명 감소세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개신교와 카톨릭을 더한 기독교인의 비율은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1990년 미국인의 약 85%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답했지만 10년 후인 2000년에는 80%로 줄고 그 후 20년이 지난 2020에는 68%로 감소했습니다. ‘아직도 미국인 3명 중 2명이 기독교인이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독교리서치사인 바나그룹은 실천적 기독교인의 수가 20년간 거의 절반으로 감소했습니다. 실천적 기독교인이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밝히고 실제로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이 삶에서 중요한 우선순위를 갖는다고 응답하는 이들입니다. 2000년에는 미국인의 45%가 실천적 기독교인에 속했는데 20년이 지난 2020년에는 25%로 줄었습니다. 반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밝히고 성경읽기나 기도도 하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속칭 가나안성도의 비율이 같은 기간 35%에서 43%로 증가했습니다. 개신교만 보면 감소세는 더 두드러집니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첫 조사를 한 1937년 개신교인의 수는 미국인의 73%였지만 2020년에는 49%로 떨어졌습니다.
다시 평론가의 비판으로 돌아와서 교회가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듣다보면 정말 이 사회에서 교회가 꼭 필요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 법 합니다. 교회가 꼭 필요한가? 아니 오히려 교회 때문에 더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같은 질문을 개인적 차원에서 던져보신 분들은 없으신지요? 내가 꼭 교회를 가야하는가? 과연 교회는 내 인생에 필요한가? 그렇다면 오늘이야말로 이 의문에 답해 보기에 더없이 적합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교회가 창립 49주년을 맞는 기념주일이기 때문입니다. 1972년 8월 13일 The Silas Condict Park에서 창립예배를 드린 우리교회는 벌써 반세기를 달려왔습니다. 그 동안 무려 2,548번의 주일을 지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훨씬 많은 주중기도회와 성경공부, 봉사와 구제와 전도와 선교를 하며 교인들이 그들의 시간과 헌금과 에너지를 교회에 드렸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49년 동안 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만한 가치있는 공동체였고 그래서 앞으로도 다시 반세기를 바라볼 만한 곳인가요? 교회 문을 닫고 여러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봉사에 쏟거나 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하다못해 골프라도 치러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교회가 왜 필요한지를 예수님은 이렇게 들려주십니다. 본문 18절입니다.
2. 음부의 권세를 이기리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로 번역된 헬라어는 하데스(ᾍδης,)는 죽은 자의 거처를 의미하고 King James Version 성경에서는 지옥으로 번역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스올, 사망, 무덤으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문맥을 살리면 죽음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 한다는 뜻입니다. 왜 죽음의 권세가 교회를 대항합니까?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죽음의 권세와 싸워이기는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의 권세에 뒤덮혀 있습니다. 죽음은 무서운 기세로 독침을 모든 사람에게 쏘아대고 그 독침을 맞은 사람들은 독이 마음과 생각과 육체에 퍼져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독침은 바로 죄입니다. 고전 15장을 보십시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앞서 소개한 평론가는 주장하기를, ‘다 착한 사람들에게 교회에서는 왜 그렇게 죄인이라고 욕을 하냐’고 비난하였습니다. 맞습니다. 많은 이들이 착합니다. 상대적으로요. TV에 나오는 살인자나 사기꾼, 강도에 비하면 우리는 다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착함이란 상대적인 것일 뿐 어느 누구 하나 죽음이 쏘아대는 죄의 독침에 맞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독이 더 많이 퍼졌느냐, 적게 퍼졌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대로 두면 마침내 독이 온 몸에 퍼져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이 죽음의 권세 죄의 독침은 사람 개개인만 쏘지 않습니다. 가정에도, 일터에도, 사회에도, 국가에도, 제도에도 쏘아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공동체가 죄의 독이 퍼져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실상을 알려면 잠시만 신문사회면을 펴서 읽어보십시오. 끊임없는 도둑질, 사기, 폭행, 강도, 살인에, 구조적인 빈곤과 약자, 여성, 유색인종, 빈곤계층의 착취와 차별에, 마약과 포르노와 매춘과 밀수에, 빈곤국가와 불의한 정부의 억압과 부정과 부패에,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과 착취, 전쟁과 식민통치에, 자연의 파괴와 착취와 훼손에, 조직적인 폭력배와 부정한 공무원과 탐욕스러운 기업의 이야기까지 끝도없는 죄의 독에 중독된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죄악이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죄악에 아무런 책임도 없이 무균실에서 자란 난초같은 인생일까요? 이래도 다 착하기만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까?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순진해도 이렇게 순진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3. 해독제를 가진 교회
세상을 뒤덮고 있는 죄의 독의 해독제를 가진 유일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진리의 말씀이란 두 가지 해독제를 가지고 죄의 독을 제거합니다. 보혈은 우리 영혼에 가득퍼진 독을 씻어냅니다. 말씀은 우리 생각과 의지에 가득 퍼진 독을 씻어냅니다. 또 이 세상 질서에 가득퍼진 독을 씻어냅니다. 그래서 거룩한 영혼, 거룩한 삶 그리고 거룩한 질서를 가진 세상을 만들어냅니다. 이 해독제를 가진 곳이 교회 말고는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 평론가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세상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꼭 교회만이 그 해결책인가? 우리는 교회 말고도 다른 종교, 철학, 법과 공권력, 계몽된 지식인들의 노력, 사람을 개선시키는 좋은 교육 등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은 많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계속 진보하고 있지 않는가?
현재의 인류 문명을 지탱시켜주는 생명존중, 자유, 평등, 평화, 민주주의, 복지 등의 가치는 서구사회가 일군 문명발전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서구사회가 일구어놓은 인간존중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용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라는 것만 보아도 분명합니다. 그럼 서구사회가 무엇을 기초로 인간존중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세웠을까요? 서구사회의 정신적 뿌리를 크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의 철학과 이성이 그 핵심이고 헤브라이즘은 유대-기독교사상이 그 핵심입니다. 헬레니즘은 오늘날 과학과 물질문명을 건설한 기초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신앙과 정신세계를 건설한 기초입니다. 즉 서구사회가 성취한 과학발전, 물질문명 건설은 그리스 철학에 빚을 졌다면 법, 제도, 질서, 문화에 뿌리박힌 인간존중과 평등과 민주주의 등의 신념은 유대-기독교신앙에 빚을 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4. 진리의 우물
인간존중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현대화된 국가는 예외없이 그 헌법을 인간의 존엄부터 선언하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왜 인간이 존엄한 존재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의 생명이 다른 동물의 그것과 달리 존엄합니까? 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인간생명을 살려야 하는 것일까요? 단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할 수만 있다면 수억, 수십억 그보다 더한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살려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 것일까요?
어떤 이는 인간이 동물과 자유로운 의지와 이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의지와 이성이 없는 인간도 많습니다. 태아도 그러합니다. 심한 치매나 정신이상을 앓는 이도 그러합니다. 코마상태의 환자에게도 자유의지나 이성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이들은 존엄을 상실하고 희생되어도 괜찮은 것인가요?
어떤 이는 더불어 사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내린 사회적 합의에 근거한다고 주장합니다. 서로가 고통과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서로를 존엄하다고 합의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합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존엄을 지켜주지 않아도 됩니까? 싸이코패스가 나는 그런 합의에 동의한 적이 없으니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해치겠다고 한다면 그를 비난할 도덕적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합의한 적도 없고, 합의할 의지도 없는 사람에게 합의를 지키라는 것만큼 부당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상가도, 철학가도 인간존엄의 이유를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천부인권설입니다. 신께서 인간에게 존엄함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성경의 가르침,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복주시고 그 인간이 죄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여 구원하신 창조자의 존재에서 이 인간존엄의 사상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기독교인 아니더라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인간존엄의 정신으로 만든 헙법과 질서와 문화 안에서 살아가며 안전과 복지를 누리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성경의 진리의 우산 아래 보호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가치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보편적 가치는 모두 성경의 진리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다른 경전, 철학, 사상, 문화에도 이런 가치가 희미하게 들어있기 하지만 성경만큼 압도적으로 인류사상에 기여하고 풍성한 자양분을 공급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마 5:45) …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 교회의 가치
부패한 정치인이 있다고 정부제도 자체를 없애버리는 나라는 없습니다. 어떤 부패한 정치인도 무정부상태만큼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 하기 때문입니다. 못된 의사가 있다고 의사제도자체를 없애버리는 사회는 없습니다. 못된 의사를 처벌하고 훌륭한 의사들이 환자를 살리도록 해야지, 의사제도를 없애버리면 속절없이 죽어가는 환자들은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깊고 넓게 보지 못 하는 미숙한 이들이나 감정에 휩쓸려 그런 주장을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미국교회도 적지않은 문제를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물질문명에 물든 사회 속에서 세상 조류를 거스르며 빛과 소금이 되어야 마땅하건만 오히려 거센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가는 모습으로 실망과 상처를 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이 병든 중세교회를 고친 것처럼 교회를 개혁해야 하지, 교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숙한 일입니까? 교회를 부정하고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인류가 일구어온 문명을 부정하는 것이요, 딛고 올라온 사다리에 불을 지르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의 착각과 달리 모든 시대의 교회는 문제투성이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미국교회가 가장 타락했다고 탄식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사람들이 일제시대, 6.25전쟁을 돌아보며 ‘그래도 그 때는 낭만이 있었지, 정이 있었어’하고 회상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 낭만과 정을 느끼기 위해 내전 중에서 수십 만이 굶어 죽고 총맞아 죽고 난민촌에 갇혀 짐승처럼 살아가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살고 싶은 분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모든 시대의 교회는 항상 문제투성이였습니다. 심지어 그 성령충만했다는 초대교회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통해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의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 바리새파와 이방선교파간의 멈추지 않는 갈등의 기록을 사도행전에서 읽어보십시오.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온갖 추문과 갈등과 무질서를 탄식하며 꾸짖는 고린도서를 읽어보십시오. 바울의 서신마다 등장하는 교회의 온갖 문제를 읽노라면 과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합당한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6. 교회의 비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2천 년을 성장하며 오늘날 전 세계인 3명 중 1명이 기독교인이라 고백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구교회가 위축된다고 하지만 사실 비서구권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성장 중입니다. 지난 20세기 백년 동안 기독교인구는 인류의 3분의 1을 늘 유지했었고 이는 교회역사상 가장 높은 비율입니다. 1900년에 18억 인구의 3분의 1인 6억이 기독교인이었는데 120년이 지난 2020년 78억으로 늘어난 인류의 3분의 1 즉 26억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사라질 것이란 주장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치던 19세기부터 늘 해오던 예언입니다만 오히려 교회는 더욱 성장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교회가 진리의 우물인 성경을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에 가라지가 많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긴 거룩한 알곡 천국백성들이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가라지를 보지 않으시고 알곡을 보십니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주님의 주목하시는 백성은 누구입니까?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그 보혈에 씻김을 받고 그 가르침을 좇아사는 성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뉴저지장로교회가 49년을 달려오며 이 지역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교회로 성장해온 비밀입니다. 우리는 다 허물이 많은 죄인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굳게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런 이들을 통해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반 세기도 세워가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마음에 굳게 새기고 고백해야 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욱 굳건히 세워가며 땅 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