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6:22-27/삶이 표적인 사람들
210822 오병이어2
1. 영성지수
어떤 이가 공사장을 지나다 인부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첫째 인부가 답했습니다. “보면 모르겠소? 벽돌을 쌓고 있잖아요. 웬 놈의 벽돌이 이렇게 무겁담?” 둘째 인부가 답했습니다. “돈을 벌고 있잖아요. 하루 종일 일하고 겨우 받는 일당이 이거라니…” 마지막 인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예배당을 짓고 있답니다. 사실 우리 가족도 이 교회를 다니는데 곧 새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생각을 하니 얼마나 흥분되는지 몰라요.” 세 인부 중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모두 달랐습니다. 왜입니까? 이 답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같은 행위에 대한 이해가 모두 달랐던 이유는 눈에 보이는 노동의 보이지 않는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이 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뭘까요?
전통적으로 사고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지능지수(IQ : Intelligence Quotient)라는 개념을 썼습니다. 최근에는 느끼고 공감하는 정서적 능력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측정하기 위해 감성지수(EQ : Emotional Quotient)란 개념을 씁니다. 문화적 창의성을 측정하기 위해 문화지수(CQ : Culture Quotient)란 개념도 씁니다. 여기에 더해 영성지수(SQ : Spiritual Quotient)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미국 심리학자 도나 조하와 영국 정신과의사 이언 마셜이 처음 주창한 이 지능은 현상과 경험 너머에 있는 의미, 가치 그리고 목적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앞서 소개한 세 인부가 똑같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은 바로 이 영성지수의 차이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첫째 벽돌을 쌓고 있다는 인부는 영성지수가 낮은 사람이어서 노동의 고단함 외에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 하였습니다. 심리학자 도나 조하는 영성지수가 낮은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어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두번째 돈을 벌고 있다는 인부는 영성지수가 평균인 사람이어서 노동에서 생계해결도구라는 의미를 찾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당을 짓고 있다는 인부는 영성지수가 높은 사람이어서 그 행위가 이룰 결과로서 예배당과 그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가족을 상상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을 짓는다는 의미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능지수나 감성지수가 높으면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듯이 영성지수가 높은 사람이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 풍요로운 영적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영성지수를 높여주십니다.
2. 영성지수가 바닥인 무리
우리는 다시 요한복음 6장으로 돌아왔습니다. 6장 초반에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고 그 날밤 반대편 가버나움으로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 도중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배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오늘 본문이 시작합니다. 벳새다에서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 들판으로 왔다가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분명 전날 저녁 한 척밖에 없던 배에 제자들만 타고 떠났던 것을 기억하고는 예수님은 거기 아직 계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때마침 호수 남서쪽의 디베랴에서 온 여러 척의 배가 도착하여 타고는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상대로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 언제 가버나움으로 넘어오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지런히도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의 열심을 칭찬할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들의 열정이 달갑지 않다는 투로 말씀하셨습니다. 26절입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먼저 표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은 표시, 예고, 징조 등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 포스터나 예고편이 세메이온입니다. 헐리우드사인도 세메이온입니다. 디즈니월드 입구사인도 세메이온입니다. stop 사인도 세메이온입니다. 이 모든 세메이온의 공통점이 뭘까요?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라는 점입니다. 이 상징을 보고 우리는 실체를 떠올립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표적을 보아야만 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 기적이 가리키는 실체를 깨달아야 했다는 뜻입니다. 무리가 그 실체를 깨닫지 못 했다고 예수님은 꼬집으십니다. 그런데도 무리는 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또 배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또 그들을 배불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요?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려는 진짜 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화를 보여주지 않고 포스터만 계속 보여주는 것입니다. 디즈니월드에 들어가지는 않고 입구사인 앞에서 사진만 하루 종일 찍는 것입니다. 헐리우드 사인만 계속 보고 있고 정작 헐리우드 거리에는 가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사거리마다 스탑사인을 보지만 정작 차는 한 번도 스탑하지 않는 것입니다.
3. 표적의 목적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무리가 배고플 때마다 예수님께 나오면 배부르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그 기적보다 더 중요한, 그 기적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영적 진리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얼마나 중요하던지 배부른 것보다, 기적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 교훈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같은 은혜를 우리 인생에도 종종 베푸십니다. 고 3때 저는 기도로 몇 년 동안 고생하던 허리디스크, 계절마다 걸리던 감기를 그냥 치유받았습니다. 저희 교회 한 누나는 은혜를 받고 너무 뜨거워 밤 늦도록 기도하고 교회봉사하느라 중간고사 준비를 거의 못 했는데 전날 밤에 꿈에 시험문제가 보여서 깨서 공부하고 잤는데 그 문제가 시험에 그대로 다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선교지에서 일어난 부흥을 소개하는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이란 책에는 밀림에서 성찬식을 하려는데 당연히 포도주가 없어서 물을 떠다가 기도하고 나누어 마시는데 다 포도주로 바뀌었다고 보고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란 책에서 윈형제는 중국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74일간 금식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경험을 보고합니다. 아마 여러분의 삶에도 이런저런 기도응답의 간증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기적과 응답을 주실까요? 이제부터 아프면 병원가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의미일까요? 이제부터 중간고사는 시험공부하지 말고 꿈에서 계시를 받으라는 말일까요? 성찬식은 앞으로 물로 하고 모두가 74일 쯤은 가볍게 금식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전혀 아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기도해도 감기가 안 나아요. 주님, 왜 더 이상 응답이 안 됩니까? 주님이 ‘약 먹어라’고 하시더군요. 그 누나도 그 때 한 번 꿈에 보여주시고는 시험문제를 안 보여주시더랍니다. 당연히 밀림을 나와서는 성찬식을 하려면 포도주를 준비해야 하고 겁없이 74일 금식한다고 하나님을 시험하면 굶어 죽습니다. 그럼 왜 그런 응답을 주십니까? 그 특별한 경험을 통해 진짜 중요한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 영적 진리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시며 깨달으라고 하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병이어가 표적인 것을 깨닫고 무리는 무엇을 배워야만 했습니까?
4.영생의 양식을 구하라
오병이어가 가리키는 진짜 실체, 영적 진리는 이것입니다. 27절 전반부입니다.
(요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오병이어가 가리키는 첫째 진리입니다. 우리는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무리들은 배가 불러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배가 고프면 고통스럽습니다. 배가 부르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만족스럽습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벌면 만족스럽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자랑스럽습니다. 어느 분야든 성공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합니다. 이거야말로 좋은 것 아닌가요? 세상사람은 그래서 다 배부르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배부르게 한 그 양식은 몇 시간이 지나면 썩어 배설물이 됩니다. 금방 다시 배고픕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픕니다. 그렇게 지켜낸 몸과 건강은 세월 앞에 여름날 꽃처럼 시들고 썩어 흙이 됩니다. 돈, 지위, 성공, 자아성취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다 썩어 사라집니다. 그들은 썩는 양식을 구하며 주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주님은 자녀들에게 그보다 더 크고 놀라운 선물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썩지 않습니다. 영생은 다시 배고프지 않습니다. 영생은 다시 외롭지 않습니다. 영생은 다시 공허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다시 두렵지 않습니다. 영생은 썩지 않는 참 행복이요, 참 생명입니다. 이것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배부르게, 안 아프게, 괴롭지 않게, 슬프지 않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썩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시 배고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의 삶입니다.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5. 주님이 양식을 주신다
오병이어가 가리키는 둘째 진리입니다. 27절 후반부입니다.
(요 6:27)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그 영생의 양식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십니다. 오천 명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시자 5천 명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누가 그들을 먹였습니까? 예수님이 먹이셨습니다. 영생의 양식은 우리가 스스로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격과 노력과 선함과 의로움과 성실함과 종교성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로 거저 주십니다. 주님이 영생을 주시는 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오천 명이 먹고 몇 광주리가 남았습니까? 열두 광주리지요. 성경에서 12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충만하다,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12 광주리가 남은 것이 아니라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영생의 양식은 부족함 없이 모든 인류를 먹이고도 남습니다. 영생의 양식은 우리의 일생토록 채워주시고도 모자람이 없이 충만합니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도록 우리를 먹이고도 남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평화와 평안은 영원히 우리 영혼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처럼 우리를 다시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게 하는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6. 삶이 표적인 사람들
불교집안에서 자란 최원규 씨는 연세의료원에서 근무하다 국제협력단 소속으로 몽골에 의료봉사를 간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조그만 몽골 한인사회에서는 한국에서 소아과의사가 왔다니까 집집마다 하루씩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면서 자녀들 진료를 부탁했습니다. 방문하다보니 대부분 선교사들 가정이었는데 사는 모양새를 보니 하나같이 넉넉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이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가난한 나라에 가족들까지 데려와 이 고생을 하며 사나, 다들 좀 정신이 온전치 않은 광신자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한 달 정도 가정을 돌며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해보니까 다들 멀쩡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궁금해서 한 선교사에게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여기 와서 이렇게 사세요? 최선생님, 궁금하시면 저랑 공부를 좀 해보실래요? 뭘 공부해요?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태어나 처음 성경을 읽고 공부해보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의산데 늘 공부하고 들여다보는 이 정교하고 복잡한 사람의 몸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왔구나, 간단하고 조그만 기계 하나도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 법인데 이 정교한 몸이 어떻게 저절로 만들어졌겠나, 정말 하나님이 창조하셨나 보다. 그는 지금까지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을 공부하고보니 하나님을 알아야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보니 되돌아보니 의미없던 그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하나 의미와 목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사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며 국제협력단으로 몽골에 온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고 선교사들을 만나 성경을 알게 된 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배부르게 사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게 만드는 표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임을 깨닫고 국제협력단 근무기간이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그 정신이 온전치 않은 선교사들처럼 의료선교사가 되어 20년을 섬겼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국에 보내신 것이 우연이 아니며 건강과 성공과 은사를 주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과 좌절과 실패를 겪게 허락하신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건강도 질병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 표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은 영생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적임을 깨닫고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양식으로 배부른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