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3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 요 6:66-71

20211003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 요 6:66-71

요 6:66-71/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211003 오병이어7
교회를 떠나는 이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한국교회나 미국교회나 동일한 고민입니다. 기독교리서치사 바나그룹 대표인 데이빗 키네먼은 18세에서 29세 사이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을 가리켜 모자이크세대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일관된 틀이 없이 모자이크처럼 여기저기서 가져다가 붙여 놓은 듯 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로 번역된 책 ‘You Lost Me : Why Young Christians Are Leaving Church…and Rethinking Faith’에서 그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분석합니다. 젊은이들은 교인들의 위선적, 배타적, 혐오적 태도, 정치적 편향성, 시대와 동떨어진 가르침 등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이 중에는 뼈아프게 들리는 설득력 있는 이유도 있고 편견과 무지의 탓으로 보이는 답도 없지 않습니다. 아무튼 시대마다 세대마다 또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이유로 교회에 들어오고 나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교회를 떠날까요? 남아있는 사람들은 또 왜일까요?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이 이런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로 시작된 예수님과 무리와의 긴 대화의 마무리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땅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 양식을 찾으라 하시고 또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영생의 양식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에 대해 무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세 부류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예수님을 떠난 이들입니다. 오늘 본문 66절을 보십시오.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왜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 하였습니다. 둘째는 깨닫기는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못 하였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그 무리들의 몰이해와 제자들의 수용하지 못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52절을 보십시오.
(요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이해는 했으나 따르지 못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60절입니다.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따르기) 어렵도다. 누가 들을(따를) 수 있느냐?” 한대
그들은 가르침을 수용하지 못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불신앙입니다. 64절입니다.
(요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근본적 원인은 바로 이 두 가지로 수렴됩니다. 첫째 진리를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진리를 보지 못 하고 영원하지 않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 봅니다. 교인들의 모습이 실망스럽습니다. 교회시스템이 마음에 안 듭니다. 관계에서 이런저런 상처를 받습니다. 둘째 진리를 수용하지 못 합니다.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 가르침이 나의 뜻과 충돌합니다. 그 가르침이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불신앙이 맞습니다.
교회를 안 떠나는 이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 하였지만 여전히 예수님 곁에 남아있는 이들입니다. 베드로와 열두 제자가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영생의 말씀 때문에 떠나지 않겠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마음에 믿음이 없이남아있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7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 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지만 믿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64절에서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요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으면서 떠나지 않은 것입니까?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믿음이 없지만 다른 이익을 얻고자 교회를 떠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친교의 욕구일수도, 대접받고 싶은 욕구일수도, 이민생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스스로 믿음이라 착각하는 종교심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이니 언젠가는 복음을 깨닫지 않겠나, 다행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반면 끝까지 복음을 깨닫지 못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안타깝지만 예수님을 파는 지경에 이를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마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예수님을 팔듯이 교회를 파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전에 한국교회신문에 ‘교회 팝니다’라는 광고가 떴습니다. 광고내용은 채무 얼마가 남은 목 좋은 곳의 교회당 건물, 출석교인 몇 명의 교회를 얼마에 판다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궁금했는데 주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5-6년 전 저희 교회가 속한 해외한인장로회 총회 뉴저지노회 임원으로 섬길 때 노회소속 교회인데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었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한참 만에야 연락이 되었는데 목사님과 한 10여 명 남은 교인이 교회문을 닫고 건물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고 목사님에게도 퇴직금 조로 조금 주고 남은 적지않은 돈을 한 분 있던 장로님이 선교헌금이라며 가지고 계신다는 겁니다. 총회헌법상 개교회 재산은 원칙적으로 노회소유이므로 임원들이 장로님과 만나서 그 돈을 노회에 제출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려는데 그 분이 차일피일 만남을 미루시고 나중에는 연락도 받지 않으셔서 결국 아직도 못 만났습니다.
혹시 ‘야, 그 장로님은 수지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 계십니까? ‘나는 왜 교회를 안 떠나고 있는 것일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안도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왜 교회를 지키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교회에서 전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첫 번째 선교지는 바로 교회입니다. 실제 복음을 모르는 교인이 적지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 하고도 직분자도 되고 심지어 목회자, 선교사도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의인이라 높이며 예수님을 팔듯 교회를 팔고 비방하고 정죄하고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고교회를 깨뜨리기도 합니다.
교회를 지키는 이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마지막 반응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결코 예수님을 떠날 수 없는 이들입니다. 67절 이하입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의 질문에는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했던 도전이 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미 많은 사람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 곁에 있는 것은 겨우 열두 명에 불과합니다. 그들도 많은 사람들을 따라, 세상풍조를 따라 떠나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습니다. 오늘 이 시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목소리가 옳은지 그른지 충분히 숙고하지 못 한 상태에서 마치 해일에 휩쓸린 아이처럼 그에 동조하도록 압박을 느낍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처지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무언가 모순된 것인양 생각하도록 압박을 받습니다. 어디가서 교회 다닌다고 하면 별종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느낍니다. 모두가 yes 하는데 혼자 no 해야한다는 압박감입니다. 모두가 쳐다보는데 혼자 no 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런 압박을 이겨내고 제자들이 예수님 곁은 지키기로 결정했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시대에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면 확실한 이유가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것은 영생의 말씀을 베드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그는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을 그는 보았습니다. 여기 생명이 있는데 세상의 압박, 사람들의 시선이 무슨 대수입니까? 살고 죽는 일이 여기 달렸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진리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 말씀이 참된 양식입니다. 그 말씀을 먹고 배부르고 시원하고 행복하고 기쁩니다. 이 말씀 안에서 생명과 진리와 복을 발견한 사람은 주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떠나지 않습니다. 떠나라고 칼을 들이대어도 떠나지 못 합니다. 주님 곁을 떠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순교를 기꺼이 당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데는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도 큽니다. 교회가 그들에게 참된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을 그럴 듯 하게 포장하여 가르쳤습니다. 진리를 그들이 알아듣게 가르치지 못 하고 우리끼리만 이해하는 말로 독백하듯 하였습니다. 진리가 가르치는 바가 아닌 우리의 종교성으로 위선적이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목소리로 그들을 윽박질렀습니다. 정확히는 저를 포함한 목사들의 잘못입니다. 구름을 뚫고 비취는 햇살처럼 교회는 진리를 혼란스러운 세상의 소음 가운데 정확하고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선포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교회를 지키는 우리는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을 먹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먹었다면 예수님이 아닌 그 누구에게 가도 만족을 얻지 못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새롭게 창조된 천국백성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거룩하신 자, 메시야 그리스도 구세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심을 아는 이들이 교회를 지킵니다. 교회를 드나드는 교인들이 많지만 교회를 지키는 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신앙고백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압박에 굴복하지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녕보다 주의 몸된 교회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교회를 위해 기꺼이 죽습니다. 이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갈 때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을 택해 새로운 천국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은 두 번이나 예수님 곁에 남은 이들이 열둘이라고 강조합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요 6:70) …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열둘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시대의 수백 년 전 앗수르에게 북왕국이 멸망하며 열 지파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열두 지파로 구성된 옛 하나님 백성은 실패했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실패하지 않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 열두 제자를세우셨습니다. 그들이 실패하지 않을 이유는 바로 영생의 말씀이 그들을 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혼탁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세상의 소음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문턱을 밟았다가 무지하여, 실망하여, 믿지 못 하여, 어리석어서, 욕심대로 되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교회에 남은 자들 중에도 유다처럼 마귀짓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럼 교회는 흔들리고진리는 사라질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위협에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영생의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그들은 영생의 말씀으로 구원받고 배부르고 힘을 얻어 주님 곁을 지키며 진리를 선포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져 땅에서도 이루어져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진리를 온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 때까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이 고백을 멈추지 않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