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2 365일 동행하는 인생 / 창 5:21-24

20211212 365일 동행하는 인생 / 창 5:21-24

창 5:21-24/365일 동행하는 인생

211212 대강절3주
1. 동행의 복
세계에서 가장 오랜 생활 결혼생활을 한 이들은 누구일까요? 현재까지는 카람 찬드와 카타리 찬드 부부입니다. 이들은 인도에서 태어나 1925년에 결혼했고 영국에서 살다가 각각 2016년과 2019년에 사망하여 결혼생활만 92년을 했습니다. 사진은 이들이 결혼 90주년을 축하할 때인데 각각 110세와 103세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떠날 때 8명의 자녀, 27명의 손자, 23명의 증손자로 구성된 대가족을 남겼습니다. 요즘처럼 결혼도, 출산도 어렵고 온갖 이유로 결혼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시대에 92년 동안의 동행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도 복이요, 자녀들에게도 복이요, 그들이 몸담은 사회에도 큰 복입니다. 인구감소가 큰 문제가 된 요즘은 더욱 그러합니다. 동행은 복입니다. 외롭고 힘든 인생길에 위로와 힘을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배우자와 가족과 교우와 친구들과 이렇게 오래 다정하게 동행하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과의 동행도 이렇게 복이 되는데 만약 하나님과 일생 동행하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더 큰 복이 되겠습니까? 그런 큰 복을 누리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런 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런 복을 누린 사람과 그 복을 누리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성경의 소위 원역사를 기록한 창세기 5장 오늘 본문은 몇 구절 안 되지만 가장 놀라운 인생을 산 이를 소개합니다. 그는 아담의 7대손 에녹입니다. 24절입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를 흔히 육체의 죽음을 겪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 신약의 예수님만이 경험하신 일입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다른 성도들도 누리지 못 한 놀라운 특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왜 이런 은혜를 입었습니까? 본문은 그 이유를 두 번이나 반복해 강조합니다.
(창 5:22)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 5: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365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365년은 지구의 공전주기인 1년을 구성하는 날수 365일을 연상시킵니다. 흔히 우리는 중단없이 지속하는 행동이나 상태를 묘사할 때 ‘1년 365일을 하루같이 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그의 전 생애가 하나님과 항상 동행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던 시기도 없이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이였습니다. 정말 흔치 않은 삶일 뿐 아니라 부러운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그 후손이 모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잃은 아들 아벨을 대신할 새로운 의의 아들 셋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셋의 후손에게 기대한 가장 건강하고 깨끗하고 조화로운 삶 그것이 바로 에녹의 삶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이 그를 죽음을 겪게 하지 않고 데려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에녹의 삶은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이상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위대한 모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3. 동행의 의미
그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할까요? 동행은 같은 방향을 향해 함께 계속 걷는 것입니다.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은 동행이 아니고 잠깐 같이 가다가 헤어지는 것도 동행이 아니고 같은 방향이라도 따로 가는 것도 동행이 아닙니다. 이렇게 동행하려면 무엇보다 두 사람의 생각이 같아야 합니다. 아모스서는 동행의 조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암 3: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가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동행하는 이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에녹의 증손자 노아를 보십시오.
(창 6:9)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 노아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과 계획을 다 알리셔서 방주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또 다른 이는 아브라함입니다.
(창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 말씀과 더불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도 있습니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을 자세히 알려주셔서 그가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자세히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뜻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름과 인간의 순종이 일어날 때 그 관계를 친밀하다고 묘사합니다. 이런 친밀함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지속될 때 동행한다고 표현합니다.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과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과 친밀했고 동행했습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이런 친밀한 동행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4.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여러분과 에녹처럼 동행하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뜻을 자세히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히브리서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수님을 통해 당신이 세상에 하시고자 하는 구원을 자세히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예수님께 복음을 듣고 깨달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복음은 대홍수시대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맡기신 구원의 메시지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 메시지입니다. 방주로 오는 이만이 사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의인 10명이 있어야만 소돔이 구원을 받는 것처럼 교회가 기도해야만 도시가 구원을 받습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들려주시며 주님은 우리가 그들처럼 순종하기를 기대하십니다.
5. 순종하는 성도
우리의 순종은 어떤 것입니까? 늘 하듯 예배하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면 됩니까? 이런 신앙행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아닙니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맞다는 것은 이런 신앙행위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틀리다는 것은 이런 신앙행위가 있다고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신앙행위만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이 보장된다면 바리새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이들이어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그토록 꾸짖으셨습니까? 이런 눈에 보이는 신앙행위와 더불어 보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이는 신앙행위가 하드웨어라면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하나님을 온 힘 다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은 마음이고, 배고픈 아기가 엄마의 모유를 찾는 마음이고, 사랑에 빠진 젊은이가 연인을 향해 품는 그리움이고, 멀리 떠난 자녀가 집에 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이고, 다급한 사업가가 은행 대출을 기다리는 것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이런 갈망, 바람, 그리움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래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친밀하게 교제하고 기뻐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죄가 이런 마음을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마음은 만물보다 부패하여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잊어버렸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뿜어내는 오물그릇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바꾸시고 새롭게 창조하셔서 다시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보혈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새마음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모든 신앙행위는 율법의 짐을 벗어버리고 참된 생명력을 얻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게 새롭게 창조되기를 축복합니다.
6.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한 성도 
사실 이런 친밀한 동행은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과 누리시던 복이었습니다. 요 17장의 기도를 보십시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이 연합은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이처럼 친밀한 동행을 경험할 수 있고 또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야말로 성도가 살아가는 바른 방식입니다. 연인들이 결혼하는 이유는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집안 일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아이를 낳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고 살다 보니 필요하면 돈도 벌고 집안 일도 즐겁게 하고 아이도 생깁니다. 모두 결과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봉사을 하거나 전도와 선교를 하거나 착하게 살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함께 살다보니 봉사도 하고 전도도, 선교도 하고, 선한 삶의 열매도 맺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함께 살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마침내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도들이 모두 서로 안에 거하는 연합, 친밀함, 동행의 삶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뉴저지장로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로 이런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