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9 참 믿음의 장애물 / 요 7:25-36

20211219 참 믿음의 장애물 / 요 7:25-36

요 7:25-36/참 믿음의 장애물

211219 대강절3주
1. 참 믿음의 장애물
지난 2009년 영국의 한 무신론자 단체는 영국 전역의 800대의 버스에 이런 광고캠패인을 했습니다.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광고문구를 붙힌 버스 앞에 유명한 무신론자 리차드 도킨스와 단체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한 사진입니다. 이 광고는 하나님이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싫어한다는 생각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C.S. 루이스의 책 순전한기독교에도 이런 생각이 나옵니다. 어느 초등학생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었더니 잠시 생각하더니 ‘누군가 재미있게 지내는가 매일 감시하다가 결국은 훼방을 놓는 분’이라고 답했다는 일화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기 전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아니었을까 여길만한 이런 유치한 하나님 이해를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광고캠패인을 보여줍니다.
이런 수준의 어설픈 앎이야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참된 앎의 장애물은 모름이 아니라 어설픈 앎입니다. 모르는 이는 배우려 하는데 어설프게 아는 이는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르치려 합니다. 그 결과 자신도, 이웃도 망하게 만듭니다. 그런 어설픈 앎이 어떻게 참 믿음의 장애물이 되는지, 참 믿음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배웁니다.
2. 어설픈 앎
요한복음 7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이 군중들을 가르치시는 중의 대화입니다. 오늘 본문 25절부터 36절에는 예수님의 정체를 판단하는 두 부류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25절의 무명의 예루살렘 주민이고 둘째는 31절의 일단의 무리입니다. 먼저 무명의 예루살렘 주민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일리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데, 그 근거로 다음의 사실을 듭니다. 27절입니다.
(요 7: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메시야는 그 출신을 아무도 모르도록 오신다.’ 이 명제를 이 주민은 어디서 들은 걸까요? 지난 화요일 일꾼모임에서 한 구역일꾼께서 ‘성경을 아무리 봐도 이런 말씀이 없던데 도대체 어디에 나오는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이 일꾼께서 정확히 보셨습니다. 이런 주장은 구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당시 민간에 떠돌던 전승에서 나온 것입니다. 1세기 당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고통을 겪던 민중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 대망이 나날이 커져가자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소위 자칭 스승들이 많이 나타나서 메시야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메시야는 이런, 저런 분이고 이렇게, 저렇게 오실 거라는 주장을 펴며 민중들의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하고 자신의 이익을 얻어내었습니다. 요즘도 사람들이 보고 듣고 싶어하는 자극적인 컨텐츠를 올려 돈을 버는 유투버들이 많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의 예루살렘 주민은 그들의 주장을 듣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일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얼마나 많은 곳에서 오실 메시야의 출신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지요!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은 최소 삼백 곳 이상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하는데 그 중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며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과 나사렛 사람으로 불릴 것과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것 등 예수님의 출신에 관한 예언도 분명히 포함됩니다. 시간이 없어 한 곳만 봅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구약을 제대로 알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이 예루살렘 주민은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요 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참되신 하나님을 모르니 그 아들 예수님도 당연히 모릅니다. 성경은 모른 채 주워들은 어설픈 전승으로 아는 체 한 것이 그의 눈을 가려 메시야를 눈 앞에서 보고도 알지 못 하게 만들었고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빠뜨렸습니다.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 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이렇게 진리를 모른 체 아는 체 하는 이들 때문에 그들 자신이나 이웃이 모두 고통을 당합니다.
(눅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오늘날 얼마나 많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여 함께 망하는 길을 가는지요! 성도 여러분이 이 인도하는 맹인이나 인도받는 맹인이 되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3. 어설픈 믿음
첫 번째 부류가 어설프게 알았던 예루살렘 주민이라면 두 번째 부류는 어슬프게 믿은 무리입니다. 31절을 보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믿었는지가 이렇게 소개됩니다.
(요 7: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이적을 보고 놀라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일단 믿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기도응답을 받고, 병을 고침받고, 이런저런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찬 물을 끼얹습니다. 33-34절입니다.
(요 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요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예언하시고는 지금 이 믿는다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나지도, 예수님 있는 곳에 가지 못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찌 된 일입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여러 곳에서 만나셨습니다. 승천하신 후 그들이 있을 곳을 예비하면 다시 오셔서 그들을 당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우편강도에게조차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믿는 무리들은 당신 있는 곳에 가지도, 당신을 만나지도 못 한다면 곧 그들은 구원받지 못 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믿는데 도대체 왜 구원에 이르지 못 합니까?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종류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표적만으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 17:3을 보십시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표적은 그것을 보는 이에게 충격과 놀람을 주지만 진정한 앎을 주지는 않습니다. 예쁜 여자, 멋진 남자를 보면 호감이 생기지만 그것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참 사랑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상대를 복되게 하려는 의지입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상대를 복되게 할 수 있습니까? 말 한 마디 안 나눈 이성에게도 첫 눈에 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 하고서는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앎과 사랑이 분리될 수 없듯이 앎과 믿음 역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엡 4:13을 보십시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는 이는 제대로 믿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어설픈 앎이 곧 어설픈 믿음을 낳습니다. 이 어설픈 믿음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참된 앎을 통해 참된 믿음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참되게 앎으로 참된 구원의 믿음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4. 참된 앎과 참된 믿음
그럼 어떻게 참되게 주님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방법을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요 5장입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생명에 이르는 참 믿음입니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사람들이 가진 믿음도 그러했습니다. 요 4장입니다.
(요 4: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그들도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깨달았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그 아들과 생명에 대한 정확하고 참된 지식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라야 참된 믿음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럼 우리는 매주 말씀 듣고 새벽기도서도 듣고 성경공부에서도 들으니 참 믿음이 생겼겠네요?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분명히 이렇게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니 맞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경우가 있기에 틀리기도 합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깁니까? 마음 밭의 차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여러 종류의 마음 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길가밭, 돌짝밭 그리고 가시밭 같은 마음은 들어도 믿음이 자라지 못 합니다. 마음에 교만과 욕심과 유혹이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밭은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5. 좋은 마음
좋은 밭은 자신의 모름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어설프게 아는 것으로 자랑하고 주장하고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귀 기울여 듣고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마음입니다.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당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주님처럼 자신을 죽이고 굴복하고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 겸손과 순종의 양분이 없는 밭은 말씀을 많이 듣고도 믿음의 열매가 자라지 않습니다.
이민사회에 목사는 많으나 참 하나님을 가르치는 목사는 많지 않습니다. 교인은 많으나 참 하나님을 아는 교인은 많지 않습니다. 교회는 많으나 참 믿음으로 선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제가 참 하나님을 가르치는 목사이어야 하고 여러분은 참 하나님을 아는 성도여야 하고 우리 교회는 참 믿음으로 선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섣부른 앎, 섣부른 믿음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교회조차도 사사시대와 같습니다.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을 대로 주장하고 행동합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겸손도, 교회의 지도에 순종하는 이도 찾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나홀로의인놀이, 나홀로하나님놀이를 하느라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2007년 발간되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49주 1위를 하며 천 세계에서 4천 만부가 팔린, 2017년 영화로도 제작된 윌리엄 폴 영의 소설 ‘The Shack(오두막)’에 시련에 빠진 한 남자가 사람의 모습으로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판타지입니다. 분노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심판하는 보좌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왜 사람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가야 하느냐고 되묻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이미 평생을 하나님 대신 사람들을 심판하며 살아오지 않았느냐고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심판하다가 자신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홀로 의인이고 홀로 하나님이 되어 여기저기 심판하기에 바쁩니다. 왜 입니까? 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참 하나님을 아는 이는 나홀로하나님놀이를 더 할 수 없습니다. 참 예수님을 아는 이는 나홀로의인놀이도 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 영생에 이르는 참 믿음을 얻습니다. 뉴저지장로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이런 천국의 백성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