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0:38-42/그대 시선이 머무는 곳에
211216 주일설교
1. 성실한 성도의 괴로움
지난 주에 오랜 만에 만난 교우와 이런저런 상담을 하였습니다. 제가 아는 이들 중 누구보다 신실하게 믿고 섬기려고 애쓰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가지 일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첫째는 친구를 돕다가 겪은 마음고생이었습니다. 자신도 돈과 시간의 여유가 없지만 더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진심으로, 일방적으로 퍼주다시피하며 섬겨왔는데 어느 순간 그가 자신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 네가 좋아서 이러는 것 아니냐’는 뉘앙스의 말을 듣자 무척 섭섭했습니다. 혼자서 섭섭한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섬김이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그가 고마워하든 말든 상관없었을텐데 섭섭함을 느낀 것을 보면 결국 자신도 인정과 대가를 바라는 속물인 것 같아 부끄럽고 괴로웠던 것입니다. 둘째는 전도하다가 겪은 혼란이었습니다. 가까운 이를 전도하려고 애써왔는데 그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만 빼면 거의 선교사처럼 사는 이였습니다. 욕심도 없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약한 이들을 돕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알면알수록 자신과 주변의 기독교인보다 더 반듯한 사람인데 그보다 더 바르게 살지 못 하는 것 같은 자신이 그를 전도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분은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써왔는데 왜 이런 부끄러움과 혼란으로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던 것일까요? 게으르고 부정직하게 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의 마음고생이 어디서 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 유명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일화입니다.
2. 수고하는데 괴로운 마르다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르다라는 여제자의 집에서 대접받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집은 요단강 옆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의 3남매가 삽니다. 이 집은 갈릴리에서의 베드로집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고 삼남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든든하고 친밀한 후원자들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병으로 죽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의 행동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도 잘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에 방문하셨으니 베다니의 그들의 집에 묶으신 것은 극히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과 제자들이 오셨으니 얼마나 극진히, 잘 대접하고 싶었을까요? 아마도 이 집의 안주인이었을 마르다가 음식이며 잠자리며 섬길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40절입니다.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여기서 ‘분주하다’고 번역된 헬라어 ‘페리스파오’는 바쁘다는 뜻 외에 흩어지다, 무겁다, 괴롭다, 지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지친 그녀는 돕지 않는 마리아와 내버려두시는 예수님을 향해 비난과 원망을 합니다. 마르다처럼 종종 우리는 봉사와 전도와 선교 때문에 마음이 괴롭고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원망과 비난이 생깁니다. 교인끼리 다투고 목회자끼리 시기하고 선교사끼리 관계가 깨어집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문제입니까? 봉사와 전도와 선교를 그만 두면 됩니까? 무엇이 문제인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공동번역과 Contemprary English Version으로 읽어 보십시오. 41-42절입니다.
(눅 10:41)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다, 마르다,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눅 10: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공동번역)
(눅 10:41) The Lord answered, “Martha, Martha!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so many things, (눅 10:42) but only one thing is necessary. Mary has chosen what is best,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CEV)
마르다에게는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 한 가지가 부족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르다의 모든 걱정과 괴로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반면 그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을 마리아는 택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39절입니다.
3. 주님을 바라보는 마리아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들으면 주님을 올려다 보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사실상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이 주님을 바라보지 못 함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 눈에 무엇이 들어옵니까? 자신이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고 세상이 보입니다. 이 모두의 공통점은 죄와 악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거기엔 우리를 치유할 은혜도 없고 살릴 진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보면 볼수록 나오는 것이라곤 죄와 악의 열매 즉 근심과 걱정과 분노와 원망 뿐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의 몸을 만들듯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채웁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고요한 호수와 평화로운 들판을 늘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어지러울 리 만무합니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찢기는 전쟁터와 죽고 죽이는 증오의 살육전을 늘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평안할리 만무합니다. 우리 영혼이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려면 압도적인 은혜와 진리의 근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말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니 그 안에 무엇이 충만합니까? 은혜와 진리입니다. 죄인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은혜,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진리가 충만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넘치는 이 은혜와 진리가 흘러나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옵니다. 복음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세상 모든 종교와 사상은 인간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더 나은 존재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더 나은 존재가 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두 가지 극단의 벼랑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속여서 외식하는 이가 되는 것,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택한 방식입니다. 아니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절망하고 포기한 채 사는 것, 당시 세리와 죄인들이 택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인간에게 소망을 줍니다.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들을 절망에서 건지십니다. 동시에 그들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을 통하여 도우십니다. 칭의도, 성화도 모두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인간의 의가 티끌만큼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드러납니다. 로마서입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4. 주님을 보지 않는 성도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신 목적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먹이느라 분주해서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하시면 오병이어만으로 오 천명도 먹이실 수 있는 분이고 실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마리아처럼 생명의 떡, 말씀을 듣고 먹기를 바라셨습니다.
앞서 소개한 교우는 자신이 속물과 같다는 것에 속이 상했습니다. 속물인 것을 깨닫고 왜 속이 상할까요? 자신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합니까? 자신을 계속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 높은 기대치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주님을 바라보아야 마음이 평화를 되찾습니다. 주님 앞에서 속물 아닌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다 오십 보, 백 보일 뿐, 저기 주일 아침에도 돈에 눈 멀어 쫓아다니는 속물이나 돈에 관심 없는 척 여기 앉아있는 우리나 똑같은 절망적 죄인입니다. 고결한 척 할 필요도 없고 고결하지 못 한 것에 자존심 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의로우십니다. 주님만이 순결하십니다. 아름다우신 주님을 바라보면 알량한 자존심도 사라지고 초라한 자기비하도 사라집니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전도하려는 이가 자신보다 더 정직하고 성실하고 너그러운 것을 보고 혼란을 느낀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그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고 있으면 대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대단함조차도 완전하신 주님 앞에서는 거리에 굴러다니는 휴지조각보다 못 합니다. 한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좋은 집안 출신에 능력도 부족하지 않은 그는 율법을 어긴 적이 없고 의와 선에 지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재물을 다 나누어주란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가장 축복받은 이로 여기는 부자조차도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고 깜짝 놀란 베드로가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하자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할 수 없드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답을 주십니다. 결론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만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어떤 성실과 정직과 너그러움도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그 자신의 의로움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인간을 보고 있을 때는 깨닫지 못 합니다. 도토리키재기를 하느라 진짜 의로움을 못 봅니다. 눈을 돌려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만이 깨닫습니다.
5.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이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나옵니다. 근심을 이기는 능력이 나옵니다. 모든 좋은 것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쏟아부으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옵니다. 그럼 어떻게 주님을 바라봅니까? 성화나 십자가를 벽에 걸어놓고 계속 보면 됩니까? 그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앞서 마리아도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 분을 바라보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그 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넘쳐나서 우리 영혼에 흘러들어와 모든 잘못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바로잡습니다. 우리를 참 평안과 기쁨의 삶으로 이끄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향한 시선을 주님께로 돌려보십시오. 주님을 멈추지 말고 바라보십시오. 주님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보십시오. 세상이 주지 못 하는 평화와 안식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에 은혜와 진리를 넘치도록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