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30 돌을 든 사람들 / 요 8:1-11

20220130 돌을 든 사람들 / 요 8:1-11

요 8:1-11/돌을 든 사람들

220130 주일설교
1. 촉법소년
작년 11월 한국 대구의 한 식당에서 난동을 부린 13-15세 소년 3명이 입건되었습니다. 이들은 식당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나무라는 주인에게 앙심을 품고 두 차례에 걸쳐 가게에서 난동을 부리고 손님을 내쫓고 주인을 죽인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은 촉법소년이라 사람을 죽여도 교도소 안 간다고 소리치고 출동한 경찰들에게도 폭언을 한 사실이 알려져 촉법소년연령대와 처벌수위논쟁이 또 다시 벌어졌습니다. 만 10-14세 사이 소년들은 촉법소년에 해당되어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고 소년원 송치 등 가벼운 처분을 받습니다. 미성숙한 나이인데다 교화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대체적인 여론은 그들의 행위에 분노하며 괘씸한 놈들이니 처벌수위를 높여서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분노를 우리는 마당히 사형당해야 한다고 여기는 범죄자에게 형편없이 낮은 판결을 하는 재판소식을 들을 때도 느낍니다.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이웃국가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 할 때도 느낍니다. 비슷한 분노를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웃, 동료에게 느끼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에게도 느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요? 만약 영혼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설 수있다면 손에 돌을 들고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던지려는 율법사를 마주하지 않을까요?
2. 돌로 치라 명하였거늘
요한복음 8장으로 들어섭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감람산 너머 베다니에 머물며 낮에는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음행 중 잡힌 여자를 끌고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시도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완벽합니다. 그녀는 현행범이었고 율법에는 돌을 쳐 죽이라고 했고 그 율법사들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권위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반대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찬성하면 살인에 동조하였다고 로마법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추궁에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손가락을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쓰셨을까요? 힌트는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말씀을 기억하셨을지 모릅니다.
(렘 17:13) …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율법사들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흙바닥에 쓰신 게 아닐까요? 그 율법사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의로우신 예수님을 해치려는 죄 살인입니다. 아벨을 비롯한 수많은 의인을 살해한 조상들의 죄를 그들은 반복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약자를 짓밟는 폭력입니다. 그들은 음행의 현장에서 여자를 잡아왔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내세우는 율법은 뭐라 명합니까? 신명기 22장을 보면 간음한 남져가 모두 처벌을 받는데 왜 여자만 잡아와 죽이려 합니까?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약자에게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빵 하나 훔치고 몇 년을 사는 현대판 장발장이 수두룩한데 부자와 권력자들은 수백 억씩 빼돌려도 늘 3년 집행유예인 이유입니다.
셋째는 위선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재촉하자 일어나셔서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른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왜 어른부터입니까? 삶이 길어질수록 죄가 더 쌓이는 자아숭배의 삶이 우리네 인생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깨달았습니다.
3. 돌을 든 이들
촉법소년의 처벌강화를 반대하는 이들은 이런 이유를 듭니다. 그들을 패배자로 만들어 거리로 내몬 입시제도와 기회의 제한, 빈부격차와 가정의 붕괴 같은 근본원인을 해결하지 않은 채 처벌만 강화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며 성인들이 만든 문제의 책임을 약자인 아이들에게 다 뒤집어씌우는 무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손에 돌을 들고 아이들을 향해 던지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은 무죄한 의인인양 가족과 이웃과 타인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배우자에게도 말합니다. ‘당신은 이게 문제야. 내가 얼마나 자주 당신에게 말했어? 그런데도 못 알아듣겠어? 날 무시하는 거야? 당신 때문에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되었나 봐. 우리 가정이 어떻게 되었나 봐.’ 자녀에게도 말합니다. ‘넌 엄마 말을 콧등으로도 안 듣지? 엄마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와. 엄마 말 안 듣고 네 인생 어떻게 되는지 봐라.’ 자는 애를 깨워서 왜 떡을 먹이려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비난을 듣고 고치는 자녀, 배우자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모두 마음에 분노와 상처만 쌓일 뿐입니다.
율법과 정죄는 죄를 고발하고 심판할 뿐 죄를 용서하고 사람을 고치고 살리지 못 합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것이 아닙니까?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가족과 이웃을 치유하고 살리고 함께 생명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4.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돌을 던지려던 이들과 달리 예수님은 그녀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요 8:11)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할 자격을 가진 유일한 분이셨지만 정죄하지 않기를 택하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그녀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긍휼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은혜가 그녀를 살렸습니다. 그녀의 죄를 씻었습니다.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님의 이 은혜로 이 세상은 지탱됩니다. 세상엔 반드시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 은혜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이 은혜로 지탱됩니다. 얼마나 많은 실수와 잘못을 우리는 배우자에게 합니까? 배우자를 무시하고 홀대하고 속이고 괴롭히고 방치하는데도 어떻게 우리 가정이 유지됩니까? 배우자의 인내와 용서 덕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서있지 않으면 가정을 지키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자녀에게 또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합니까? 큰 아이를 키우며 했던 실수와 잘못을 생각하면 저는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둘째, 셋째에게 그러지 않으려고 다짐합니다만 또 실수합니다. 부모자격라이센스가 있다면 저는 결코 통과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자녀만 부모에게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도 자녀들에게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많은 허물을 참아주고 인내해주는 자녀 덕에 부모도 부모노릇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교우, 친구, 동료 그리고 이웃들에게 얼마나 크고작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허물이 더욱더 큰 산처럼 쌓여가는데 우리는 어떻게 돌을 맞지 않고 살아갑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주님의 은혜의 음성 덕분이 아닙니까?
5. 은혜를 든 이들
올 1월부터 뉴욕시장이 된 애릭 애덤스는 자신을 브라운스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태어나 자란 브라운스빌은 브루클린에서 가장 흑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고 빈곤율과 범죄율도 뉴욕시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였습니다. 뉴욕주의 범죄수도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뉴욕시 전체의 범죄율이 큰 폭으로 떨어지는 동안 브라운스빌만은 무풍지대로 거의 나아지지 못 했습니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더 많은 예산과 경찰력이 투입되었고 범죄자들을 더 엄하고 가혹하게 다루었지만 이런 조치는 오히려 범죄자와 그 가족들에게 공권력이 부당하고 자신들은 억울하다는 비난의 명분만 심어주었습니다. 2003년 시주택관리국장으로 부임한 조앤 야페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발탁한 데이빗 글래스버그 경감은 이 지역 청소년들을 범죄자가 아닌 고통받는 아이로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함께 J-RIP(청소년 범죄 중재 프로그램)을 만들고 타운의 청소년범죄자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이 리스트로 청소년범죄자들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들의 범죄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 가족들의 상처와 분노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찰들은 초과근무수당을 모아 추수감사절에 구운 터키를 들고 소년들의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엔 장난감 선물을 준비하고 농구교실을 열어 소년들을 초청하고 방학 때는 일자리를 찾아주고 무료건강검진을 주선하였습니다. 가장 힘든 가정의 식구들은 크리스마스 만찬에 초대하고 소년들을 한 명씩  안아주었습니다. 경찰이라면 죽일 듯 노려보고 욕설을 쏟아놓기 일쑤이던 소년들과 가족들은 경찰들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는 막대한 예산과 경찰력 투입이 이루지 못 한 것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된 1년 후부터 리스트에 있던 소년범들의 검거율은 크게 떨어져서 3년 만에 10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브라운스빌 전체의 강도사건발생율도 프로그램이 본격화된 2006년 이후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은 뉴욕타임즈 기자이자 베스트셀러작가인 말콤 글래드웰의 책 ‘다윗과 골리앗’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처벌의 강도와 범죄율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 어느 정도까지는 처벌이 커지면 범죄율이 떨어지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면 오히려 범죄율을 상승시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한계선을 넘어서서 범죄율을 떨어뜨리려면 범죄의 근본원인인 빈곤, 차별, 불평등과 같은 환경적 요소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경찰이 아니라 사회복지사를 더 투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약하면 사람과 사회를 진정으로 구원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는 말입니다.
가족, 이웃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너무나 쉽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악화시킬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정죄가 아닌 은혜로만이 사람을 용서하고 치유하고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삶도, 가정도, 일터도 그리고 세상도 돌이 아닌 은혜를 손에 든 이들에 의해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오늘 여러분에 손에는 무엇이 들려있는지요? 돌을 놓고 대신 은혜를 붙들어 주님처럼 세상을 치유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