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3 아래에서 위로 / 요 8:21-29

20220213 아래에서 위로 / 요 8:21-29

요 8:21-29/아래에서위로

220213 초막절7
1. 영화바벨
작품상, 감독상 등 3개의 아카데미상을 포함해 28개의 국제영화제 수상경력을 가진 세계적 명장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2006년작 ‘바벨’을 소개합니다. 명장의 영화답게 평단의 극찬을 받은 영화는 깊이 생각할 만한 스토리를 들려줍니다. 한 일본인 여행격이 모로코 사막에 사냥여행을 갔다가 가이드에게 사냥총을 선물로 주고 옵니다. 가이드는 총을 산지에 사는 압둘라에게 팔고, 아버지가 사온 총이 마냥 신기했던 어린 유세프와 아흐메드 형제는 아버지 몰래 산꼭대기 올라가 이것저것을 겨냥하며 쏘다가 까마득히 멀리 가는 버스를 향해서도 설마하며 쏘아봅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 탄 미국인 관광객 수잔이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맵니다. 미국정부가 이를 테러로 규정하자 미국과 관계가 악화하고 관광객이 끊길까 염려한 모로코 정부는 경찰을 보내 속히 테러범을 찾아내려 하고 이 과정에서 형 아흐메드는 경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한편 수잔과 그의 남편이 제 때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 하자 아이들을 돌보던 멕시코인 보모는 아들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잔의 아이들과 함께 남동생의 차를 타고 멕시코로 넘어갔다 돌아옵니다. 미국국경순찰대는 멕시코인 남녀가 백인 아이 둘을 태운 것을 보고 납치범으로 오해하고 추격합니다. 추방을 두려워한 동생이 차를 사막으로 몰아 도망치고 결국 보모는 죽을 고생을 하다가 추방됩니다. 아이들도 사막에서 고립되어 죽을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집니다.
이 영화에는 사기꾼이나 강도, 테러리스트 등 범죄자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선량한 모로코 산골주민, 상처를 극복하려 애쓰는 미국인 부부, 고단한 현실을 극복하고 잘 살아보려는 멕시코 이민자일 뿐인데 이상하게 일은 점점 꼬여가고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 시련을 겪고 결국은 목숨을 잃는 이들까지 나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우리도 공유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도둑질이나 강도질, 사기를 치려는 이들이 없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자 할 뿐인데 왜 원치않는 오해와 갈등,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요? 언제나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답을 줍니다.
2. 소속이문제다
오늘 본문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예수님의 선포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믿지 못 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 중 가장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모범적인 이입니다. 그런데 왜 죄 가운데 죽는다는 섬뜩한 저주를 하실까요?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전도할 때 교회 밖 사람들이 가장 수용하기 힘든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내가 도둑질을 했나, 사기꾼인가, 강도짓을 했나? 왜 나를 죄인이라고 하는 거요? 나는 적어도 평균 이상의 선한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데! 교회 안 간다고 죽을 죄인이야? 그럼 교회만 가면 쓰레기 같은 인간도 구원받나? 말이 돼?’ 교인들도 이 메시지를 이해 못 하는 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이해하지 못 하여 의문을 품자 예수님이 그 이유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요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바리새인들이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사기꾼, 도둑, 강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선행은 분명 악행보다 고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소속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래에서 나 세상에 속했습니다. 그 아래는 하나님이 계신 위와 대비되는 곳으로 죄의 세계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거역하는 질서로 가득한 곳입니다. 죄와 불의의 질서로 가득한 아래의 세상은 심판받을 것이고 그 세상에 소속된 인간은 그가 좀 더 선하든, 좀 더 악하든 상관없이 함께 멸망합니다. 이는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 탄 사람은 제일 꼭대기층에 탄 부자든, 제일 아래층에 탄 빈자든 상관없이 목숨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3. 바벨탑을쌓다
앞서 소개한 영화의 제목 바벨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따왔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언어가 다 달라져 더 이상 소통하지 못 하고 온 땅으로 흩어집니다. 그들이 겪은 단절이 영화 속 인물들이 겪은 갈등의 원인입니다. 그들은 언어의 장벽 이외에도 인종의 벽, 종교의 벽, 무지의 벽, 강대국과 약소국의 벽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이 단절은 의심과 두려움을 낳습니다. 경계하고 두려워합니다. 섣부른 단정과 오해가 거듭되다 마침내 미움과 분노로 폭발합니다. 상대를 해치려 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가 서로를 해치고야 맙니다. 선한 의도를 가진 이들조차 마침내 서로를 해치게 만든 것은 첫째 그들이 사는 곳, 단절된 세상이며 둘째 믿음과 사랑 대신 의심과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지적하신 지점입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했다! 이 세상은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도 이웃을 해치게 만드는 곳이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다! 너희는 믿음과 사랑 대신 의심과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는 죄의 본질을 품고 태어났다. 그 죄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바벨탑 사건은 또 보여줍니다. 단절된 세상을 만든 바벨탑을 쌓던 인류의 의도를 보십시오.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성과 탑을 쌓았습니다. 피조물이었지만 창조주의 자리인 하늘에 오르려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해야 했지만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하였습니다. 온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했지만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불순종을 선택하였습니다. 즉 세상에 단절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 땅에 발딛고 살아가는 가장 선한 사람조차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바벨탑을 쌓는 인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살인, 강도, 도둑질과 상관없이, 미움과 욕심없이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그들의 마음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인 자신의 뜻대로 삷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지 않고 그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고 자신의 기준에 옳게 살아갑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도덕적으로 살아도 본질은 자신의 바벨탑을 더 높이 쌓을 뿐입니다.
이것이 곧 아래에서 난 삶이요,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삶입니다. 이 삶은 세상과 함께 멸망합니다. 이것이 곧 영화 바벨의 인물들이 악한 의도가 없이도 서로를 해치는 이유요, 우리가 선한 의도로 최선을 다 하는데도 상처와 고난과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이유요, 바리새인들이 온갖 율법을 다 지키며 신실하게 사는 데도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왜 도덕적인 자신이 죄인이냐고 물을 때 성경이 주는 답이기도 합니다.
4. 타이타닉탈출하기
그러면 어떻게 해야 침몰하는 타이타닉 같은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더 도덕적인 층, 더 선한 층으로 달려올라가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배를 벗어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늘에서 날아온 구조헬기에 올라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구조헬기를 몰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4절입니다.
(요 8:24) “…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배는 곧 가라앉을 터이니 빨리 헬기에 올라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듣지 않으면 배와 함께 침몰하리라는 경고입니다. ‘뭐야? 타이타익이 얼마나 크고 튼튼한 배인데 왜 가라앉아? 게다가 난 제일 꼭대기층 튼튼한 객실에 머물고 있는데 별 일 있겠어? 당신이 도대체 누군데 내가 당신 말을 듣고 이 튼튼한 배를 떠나야 해?’ 바리새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요 8: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요 8: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다. 너희의 죄는 낱낱이 정죄하고 심판받아야 마땅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전한다. 그러므로 나의 말을 들어야만 산다.’ ‘그럼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28절입니다.
(요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는 오히려 부활하여 승천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제서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야임이고 내가 전한 모든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말씀대로 믿은 자들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을 체험하며 예수님을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말씀이 모두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씻는 희생임을 깨닫고 죄씻음을 얻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소속이 바뀝니다. 아래에서 위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바뀝니다. 타이타닉에서 구조헬기로 옮겨 탑니다. 마침내 멸망의 운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5. 대속하신아버지
1974년 5남매를 데리고 플로리다 올랜도로 자동차정비공으로 취업이민을 온 송석춘 씨의 가장 큰 바람은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그러하듯 자신은 고생해도 자녀들이 성공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민 4년 만에 큰 아들 시영이가 미들스쿨에 들어가서는 큰 사고를 치고야 말았습니다. 영어 못 하고 눈 찢어진 아시안이라고 놀림과 왕따를 당하다 백인친구들과 주먹다짐을 했고 교장실에 여러 차례 불려가 벌을 받았습니다. 불만이 쌓인 아이는 어느 주말 몰래 학교에 들어가 모든 교실의 기물을 몽둥이로 다 때려부수어 쑥대밭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아이는 구치소에 갇히고 이 사건이 지역신문 1면에 실리자 미국인들은 물론 한인들마저 올랜도를 떠나라고 노골적으로 비난을 하였습니다. 교장은 퇴학은 물론 카운티 내 어떤 학교로도 전학이 불가하니 다른 도시로 떠나라고 통보하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이민왔는데 큰 아들부터 범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가막혀 부부는 좁은 아파트에서 부둥켜안고 통곡했습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마음먹은 그는 아내와 어린 네 아이들과 함께 교장을 찾아가 아들의 죄가 자신의 죄니 제발 자신에게 속죄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주말부터 온 가족이 학교의 안팎을 구석구석 청소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조롱과 비난에 멈추지 않고 매주 청소를 하다보니 이 사실이 알음알음 주변에 알려졌고 급기야 AP 통신이 ‘자녀의 잘못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미국부모들은 이 동양인 부모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논조로 이 사건을 보도했고 여러 신문이 인용보도하며 미국전역에 알려졌습니다.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 교장에게 아이를 용서해달라고 호소하는 수백 통의 편지가 미 전역에서 날아들었고 송석춘 씨 가족에게는 격려의 편지와 변호사비로 쓰라며 5불, 10불 짜리 체크가 날아왔습니다. 며칠 후 법정에서 아이를 선처하여 방면해주었고 다른 지역 학교로의 전학도 허락받았습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아버지가 한 일을 깨달은 소년 시영이는 통곡하며 뉘우쳤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생활을 하여 석사학위를 마치고 미우주항공국 NASA 산하의 방산업체에서 고위 우주선 탑제 전문가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대속하는 희생이 범죄자의 인생을 살 뻔한 아들을 성공한 인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송석춘 씨의 책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하였기에 우리는 죄씻음을 받고 아래에서 위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누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